소설리스트

군터-386화 (386/1,064)

386화

프롱기우스 후작은 적들이 전투를 개시한다면 그건 해가 진 이후일 것이라 말했다.

"이제껏 전투가 일어났던 때는 거의 모두 해가 뜨기 전이나 진 후였소. 설인 놈들은 더위에 약한 것 같더군."

그들의 외형부터가 더위에 약할 것 같은 외형이기는 했다. 게다가 그들이 본래 살던 환경이 상상하기도 힘든 혹한의 땅이라 하지 않는가.

"놈들이 끝장을 보려고 했던 전투에서 우리는 어떻게든 버텨냈지. 아마 지금쯤 놈들은 바짝 약이 올라 있을 터. 내 생각엔, 놈들이 야습을 가해올 가능성이 크오."

"야습이라……."

파르네토 후작이 작게 중얼거렸다.

가만히 듣고 있던 군터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우리가 먼저 놈들을 치는 것은 어떻습니까."

"먼저 친다?"

군터는 프롱기우스 후작이 자신의 관심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그것은 힘든 이야기일세. 우리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지형과 미리 구축해놓은 진지의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야. 헌데 우리가 먼저 나서서 적을 친다? 이쪽의 이점을 스스로 내버리는 꼴이네."

"전군이 움직일 필요는 없습니다. 기병 3천 기면 충분합니다. 맡겨주신다면 반드시 결과로 답하겠습니다."

"호기는 높게 사지만, 그럴 수는 없네. 감수해야 하는 위험부담에 비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너무 작아. 자네는 기병 3천 기면 충분하다 했지만, 그 정도 병력이면 이 전쟁의 성패를 가를 수 있는 큰 전력이네."

말은 길게 했지만, 한 마디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군터는 더 이상 주장하지 않고 물러났다.

"내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지만…원군이 제때 당도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적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소."

"그것이 무엇입니까?"

"화공(火攻)."

"으음."

화공이라는 말이 나오기가 무섭게 침음을 흘리는 자들은, 아마도 이틀 전에 있었던 전투를 떠올리는 자들인 듯했다.

"내 아무리 생각을 해보아도 그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소. 허나 다른 좋은 계획이 있다면 경청할 테니 누구든 기탄 없이 말해보시오."

"……."

입을 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다 같이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파르네토 후작이 겸연쩍은 표정을 애써 지우며 말했다.

"놈들도 이미 한 번 당했기에 경각심을 가질 터인데……."

"그럴 거외다. 하지만 어떻게든 성공시켜야 하오. 승리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뿐이니까."

그러며 프롱기우스 후작이 피식 웃었다.

"그러니 다 같이 머리를 맞대봅시다. 우리가 함께 궁리를 거듭한다면 무엇이든 떠오르지 않겠소?"

그렇게 되어 수뇌부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머리를 싸맸지만 별다른 묘안은 나오지 않았다.

"일단은 각자 막사로 돌아가 생각을 이어가도록 합시다."

그렇게 자리가 파하는 듯했다.

그런데 막사로 돌아간 군터에게 한 무관이 은밀히 찾아왔다.

"프롱기우스 각하께서 찾으십니다."

"……?"

의아했지만 일단 따라갔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조금 전 회의가 열렸던 그의 막사에서 같은 자세로 앉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서 오게. 곧바로 다시 불러 당황했겠군."

"아닙니다. 어인 일로 찾으셨는지."

"자네와 나눌 이야기가 있어 불렀네. 일단은 앉게."

군터가 자리에 앉자 프롱기우스 후작이 입을 떼었다.

"한 가지만 묻지. 조금 전에 회의에서 자네가 말했던, 그 기병을 이용한 기습은 진심이었나?"

"…그렇습니다만."

영문을 모르는 군터의 대답에 프롱기우스 후작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아니, 자네를 부른 이유는 그 때문은 아니네. 실은…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아서 말이야."

"화공을 쓰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

"진심이 아니었네. 파르네토 후작이 말한 것처럼 이미 한 번 데인 적들이 또 당해주겠는가? 그런 어리석음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속 편한 생각이지."

"허면."

"자네도 알고 있지 않나? 우리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세운 계획이었으니까 말이야."

그 말에 군터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우리가 바라던 일이 일어난다면, 그게 언제겠는가?"

"으음."

군터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그러나 프롱기우스 후작이 원하는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어문드의 계책에 동의하였을 뿐, 그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까지는 그리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이제 곧, 이라고 생각하네."

"이제 곧? 어째서입니까?"

"지난 전투들, 특히 이틀 전의 전투에서 놈들은 우리를 끝장낼 기세로 총공세를 펼쳤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별다른 재미를 보지는 못했지. 뿐만 아니라, 우리도 피해를 입었지만 놈들도 어느 정도는 피해를 입었어. 사람은 원하는 결과를 손에 넣지 못했을 때 조급해지는 법이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진행한 일이라면 더더욱."

이 순간, 프롱기우스 후작의 눈은 전에 없이 빛났다. 얼굴에 눌러 붙은 피로는 여전했지만 조금 전 지휘관 회의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힘이 느껴졌다.

"말하자면 놈들의 상황이 그리 좋지는 않다는 거네. 잘 나갈 때는 보이지도 않던 문제들도 이럴 때는 슬슬 하나 둘씩 수면 위로 올라오는 법이지."

"그렇군요."

"그래. 그러니까…우리가 뿌린 불화의 씨가 슬슬 열매를 맺을 때가 되었다는 말이지."

"그것이 지금 우리가 당면한 상황에서 도움이 되겠습니까?"

"모르네. 그러니 그리 되도록 만들어야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적은 강하네. 그에 비해서 우리는 약해. 이런 불리한 형세를 뒤집기 위해서는 기책을 사용해야 하는데, 그마저도 지금은 여의치가 않아. 딱 잘라 말해서,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우리가 적을 이길 수 없네. 그러니 상황을 바꿔야겠지."

"상황을 바꾼다 하심은?"

"우리가 강해지거나, 그럴 수 없다면 적을 약하게 만들어야 하네."

적을 약하게 만든다. 이쯤 되자 군터도 짚이는 것이 있었다.

"강한 적을 상대로 밖에서 두드리는 것은 한계가 있네. 그렇다면 안에서부터 흔들어야겠지. 안쪽에 금을 내고, 그것을 넓혀서 적을 무너뜨리는 걸세."

조금 전 회의 때에는 시체처럼 죽어 있던 눈이 지금은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군터는 이것이야말로 프롱기우스 후작의 진면목이라 확신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쯤 불만과 불안을 동시에 안고서 끙끙거리고 있을 이들을 회유해야만 해."

"회유…말입니까."

"그래. 적의 전력을 깎고, 동시에 우리의 힘이 되어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자들을 포섭해야 해. 그러기 위해서 군터 장군. 자네에게 어려운 명…아니, 부탁을 해야겠네."

"무엇입니까."

"자네는 초원 출신이지? 자네 휘하에도 초원 출신 병사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앞선 전투에서 확보해놓은 적들의 무장과 깃발이 있네. 자네 휘하에서 능력 있고, 믿을만한 자들로 몇을 추려주게. 그리고 그들을 적진으로 보내어 우리와 손을 잡을 자들과 접촉하게끔 하는 것이야."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어렵겠지. 결코 쉽지 않을 것이야. 하지만 해내야만 하네."

"허나…어째서 저입니까? 파르네토 각하 역시 초원 출신이시지 않습니까."

"푸흐흐."

진지하게 물었건만 프롱기우스 후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기분이 나빠지려는 순간, 그가 웃음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말했다.

"주인을 보면 그 수하를 알 수 있지. 군터 장군. 내 솔직하게 말하겠네. 난 그에게 이런 중대한 일을 맡길 수 없네. 말했듯, 이건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단 하나뿐인 수야. 우리에게 뒤는 없네. 실패하면 그것으로 우리 모두 끝이야."

"……."

"파르네토 후작. 그는…괜찮은 군인이지만 두려움을 모르지 않고, 이겨낼 수 있는 자도 아니야. 그의 수하들 역시 그러할 것이네. 이 일은 서슬 퍼런 창칼에 맨몸으로 다가갈 수 있는 담력을 지닌 자만이 이룰 수 있을 것이야. 부담을 주려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기에 난 자네를 믿네. 우리가 처음 본 것도 아니지 않나? 난 이전에 우리가 함께 했던 전투에서 자네를 봤을 때부터 자네를 알았어. 이 군영에 이 일을 맡길 수 있는 사람은 자네가 유일하다고, 난 확신하네."

"저를 높게 봐주시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만……."

"무엇이 걸리는가?"

"수하들에게…죽을 자리에 들어가라 등 떠미는 것 같아 꺼려집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비릿하게 웃었다.

"순진하군."

"……."

"우리가 살아있다 생각하나? 그렇다면 우리가 이대로 얼마나 더 멀쩡히 숨 쉴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루? 이틀? 난 아무리 길어도 나흘이라고 보네. 이대로라면 아마 나흘 안에 우리는 모두 죽게 될 것이야. 고작 나흘짜리 목숨이란 말이지. 나나 자네나, 누굴 걱정하고 말고 할 처지가 아니야. 승리하지 못하면 패배할 것이고, 패배하면 모두가 죽을 것이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그는 여전히 앉은 채인 군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안타깝지만 장군. 우리는 지금 그런 감상에 젖을 여유가 없네. 부하들을 생각하는 지휘관의 마음은 높게 사겠지만, 지금 그런 것은 이 전쟁에 하등 도움이 안 돼. 마음을 굳게 먹고 냉정해지도록 하게."

*

'그의 말이 옳다.'

막사로 돌아와 돌이켜 생각하니, 반사적으로 뱉었던 말은 너무 배부른 소리였다.

변명을 하자면, 전쟁이 시작된 후로 겪었던 전투들이 모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쉬웠다고는 말하고 싶지 않지만, 패배나 죽음을 염두에 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막 도착한 전장에서 맞닥뜨린 상황의 심각성을 아직 잘 몰랐다.

어쩌면 '어렵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라는 근거 없는 믿음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할렌!"

"옛!"

막사 밖에서 지키고 있던 할렌이 뛰어들어왔다.

"장교들을 불러모아라."

"다섯 영지의 지휘관들 말씀이십니까?"

"아니. 내 휘하의 녀석들만."

"아…알겠습니다."

할렌이 막사를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교들이 모두 모였다. 서른이 넘는 무관들이 막사 안에 다 들어오니 막사가 가득 찬 느낌이었다.

"우리가 할 일이 생겼다."

군터는 프롱기우스 후작과 나눈 이야기를 더하고 빼는 것 없이 수하들에게 전부 이야기했다. 이야기를 듣는 내내 몇 차례 표정이 변하던 그들은 이야기가 끝나자 잠시 침묵했다.

"그러니까…적진으로 잠입해 들어가서 적의 부족장들 일부를 회유해야 한다는 거군요."

"그래."

"어려운 일입니다. 잠입하는 것도 문제지만, 회유를 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미리 알아둔 정보를 토대로 대상을 정했다 해도, 실패할 확률이 어느 정도는 있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실패한다면 그 즉시……."

어수선해지려는 분위기에서 군터가 입을 열었다.

"아니. 내 생각은 다르다. 한 명만 설득하면 된다. 그러면 그 놈이 나머지 놈들을 알아서 설득해 줄 거다."

"그 한 명은…누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호타가르아."

군터는 가볍게 손을 섞기도 했던 적장의 눈빛을 기억했다. 자신이 도발했을 때, 아닌 척하면서도 반응하던 그의 모습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