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5화
프롱기우스 후작 쪽으로 보낸 전령이 돌아온 것은 막 해가 저물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보고 드립니다! 프롱기우스 각하와 파르네토 각하의 군이 적군과 교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프롱기우스 각하께서는 제게 당장 떠나라 하시며 장군께서 신속히 군을 이끌고 와 주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군터는 잠깐 생각을 정리했다.
"…전투가 벌어진 것이 언제냐?"
"이틀 전이었습니다."
밤낮으로 말을 달려왔을 터인데도 이틀이다. 지금부터 최대한 서둘러 이동한다 해도 최소 나흘은 이상은 걸릴 터인데, 그때 쯤이면 모든 상황이 끝난 후가 되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령이 못 다한 말을 이었다.
"프롱기우스 각하께서는 나흘까지는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 하셨습니다. 허나 나흘이 지나면 그때는 장담할 수 없다고 하시며, 장군께서 최대한 서둘러주길 바란다 하셨습니다."
'귀신 같군.'
이틀 전에 이틀 후의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했다. 그만큼 이쪽의 사정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리라.
그리고 이쪽의 사정도 이리 훤히 꿰고 있는 자가 나흘을 이야기했다면, 한 번 믿고 따라 움직여볼 만하다.
"모두들 들었겠지. 이제부터는 시간 싸움이오. 상황이 다급해졌으니 진군 속도를 최대한 올리겠소."
"옛!"
빠듯하다 못해 무리한 행군이었다. 낙오병만 삼백이 발생할 정도로 한계를 몇 번이나 시험하는 강행군 끝에, 동부 연합군은 프롱기우스 후작이 언급한 나흘 만에 새로운 전장에 당도할 수 있었다.
"크으!"
병사, 지휘관 할 것 없이 코를 감싸 쥐었다. 멀리서 봤을 때 시커멓다고 생각했던 것은 거대한 불길이 휩쓸고 간 흔적이었다. 불길이 사라지고 얼마나 지났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직도 매캐한 공기와 흩날리는 재는 숨 쉬는 것을 괴롭게 만들었다.
오는 일부러 길에 동쪽으로 방향을 한 번 틀었기에 동부 연합군은 적과 조우하지 않고 프롱기우스 후작의 군대와 곧장 닿을 수 있었다.
"두 분 후작 각하를 뵙습니다."
드디어 대면한 두 후작은 전투의 여파 때문인지 무척이나 피로해 보였다. 특히 파르네토 후작은 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이 드러난 목 부위를 통해 보였다. 지휘관인 그가 부상을 입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는 뜻이리라.
"잘 와줬네.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든 제 시간에 맞췄군 그래."
"예."
그래도 어느 정도 호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프롱기우스 후작과는 달리, 파르네토 후작은 무언가 못마땅한지 목소리부터가 불퉁했다.
"오면서 보았겠지만, 이쪽의 상황은 썩 좋지 않네. 자네들의 신색이 좋아 보이는데, 이제부터는 자네들이 활약해줘야겠네."
"군인이 전장에서 싸우는 것 외에 달리 무엇을 하겠습니까. 할 일이 주어지면 할 수 있는 것을 다 하겠습니다."
군터는 파르네토 후작을 상대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그러고 싶지 않았거니와, 이는 시어문드가 미리 언질을 준 부분이기도 했다.
파르네토 후작과 그 사이에는 후작과 기사라는, 넘을 수 없고 감히 쳐다볼 수도 없는 현격한 신분의 차이가 있었지만, 지금은 전시였다. 그들은 동등하게, 각기 일군을 이끄는 장군의 지위를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군터는 동부 연합군이라는, 동부의 군대를 이끌고 있는 입장. 따라서 그는 이 전쟁에서 동부의 대표자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그의 뒤에 선 동부의 영주들 때문에라도 파르네토 후작에게 무작정 굽혀서는 안 되는 처지였다.
"일개 기사 주제에 건방지군."
"기사가 아니라 일군을 이끄는 장군으로서 이 자리에 있습니다."
파르네토 후작이 인상을 일그러뜨리자 군터가 억눌렀던 기세를 슬슬 풀어냈다. 파르네토 후작의 낯빛이 굳어짐과 동시에 프롱기우스 후작이 나섰다.
"쓸모 없는 기 싸움은 집어치웁시다. 당면한 적이 있는데 우리끼리 이러는 게 우습지 않소?"
"커흠!"
"송구합니다."
한 마디로 두 사람을 중재한 프롱기우스 후작이 마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보아서 알겠지만, 지난 전투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네. 적들은 총공세를 벌였고, 우리는 사력을 다해 맞섰지. 어떻게든 버티기는 했네만…그게 전부였지. 상황이 썩 좋지 않네."
들어오면서 군영을 얼핏 살피니 그래 보였다.
"현재는 소강상태입니까?"
"바로 이틀 전에 또 크게 한 번 부딪쳤었지. 아마…지금은 잠깐 숨을 고르고 있는 듯하네."
파르네토 후작처럼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지만, 지치기는 오히려 프롱기우스 후작 쪽이 훨씬 더 지쳐 보였다. 목소리는 몇 년간 가문 땅처럼 마르고 갈라졌고, 안색은 창백했으며 눈 밑으로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일단은 쉬도록 하게. 자네의 군대가 합류한 것을 적들도 알아차렸겠지. 당장 공격해오지는 않을 거라고 보지만, 혹시 모르니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대비는 하도록 하고."
"그리하겠습니다."
*
"이쪽 병사들의 사기가 말이 아닙니다."
막사로 돌아오자 할렌이 그가 들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이틀 전의 전투에서 화공을 썼었답니다."
그런데 문제는 병사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곳에다가 불을 질렀다는 거다. 불길은 적군도 덮쳤지만, 그에 맞서 싸우고 있던 아군 병사들까지 휩쓸었다. 미리 기름을 깔아둔 땅에 불을 지르니 불길이 순식간에 전장을 집어삼켜버린 것이다.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만, 처음부터 병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말이 돌고 있습니다."
"……."
아마 사실일 거다. 이전에 함께 싸웠던 기억을 더듬어 보면, 프롱기우스 후작은 승리를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인사였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면 얼마든지 휘하 병사들을 땔감으로 써먹을 수 있는 자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냉혹하면서도 동시에 똑똑한 지휘관이었다. 대적을 앞에 두고 이렇게 군심이 흐트러져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터. 군사들의 사기가 꺾일 것을 감수하고서도 그런 극약처방을 강행했다는 것은, 그만큼 이틀 전의 전투가 위태로웠다는 반증이리라.
"이쪽의 분위기가 어떻든, 덩달아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병사들을 잘 단속하고,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시켜라."
"옛."
"카엘은?"
친위대에 배속이 된 후부터 카엘은 할렌과 함께 군터의 곁에 거의 항시 붙어있다시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카엘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에 군터가 의아해 물으니 할렌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답했다.
"그것이…수인병 출신 병사들에게 가 있습니다. 아무래도 병사들이 조금 동요하고 있는 것 같더군요."
"동요? 어째서? 무엇에 동요를 한단 말인가."
"모르겠습니다. 다만 이곳에 도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부터 병사들의 상태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카엘은 그것을 느끼고 움직인 것 같습니다."
"중요한 전투를 앞두고 있는데 그래서는 안 되지. 카엘을 불러라."
"예."
부름을 받은 카엘은 곧장 군터의 막사로 왔다.
"병사들이 동요하고 있다 들었는데, 어인 이유인가?"
"아…그것이."
말하기 껄끄러운 이유였는지, 카엘은 조금 머뭇거렸다. 그러나 군터가 지그시 보고 있으니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입을 열었다.
"장군. '저희'의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자네가 직접 이야기 해주었지 않나."
"예. 그랬지요. 말씀 드렸다시피, 저희는 바르바피라고 하는 놈들을 흉내 낸 결과물입니다. 그리고 왕은 우리를 실패작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지금, 저쪽에는 진짜 바르바피들이 있지 않습니까. 왕이 우리가 그리 되기를 바랐던 놈들 말입니다."
"그래서 기분이 이상해지기라도 했나?"
"예. 뭐랄까…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들뜨는 모양입니다. 괜히 독기를 품은 놈들도 있고, 긴장한 놈들도 있지요. 이래저래 분위기가 썩 좋지는 않은지라, 제가 가서 녀석들을 다독여주고 있었습니다."
별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충은 이해했다. 군터는 그들이 겪었던 실험과 '우리' 안에서 느꼈던 고통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들의 심정 역시 짐작하지 못했다. 다만 카엘의 말을 통해서 그들이 바르바피들에게 갖는 특별한 감정을 알게 되었다.
"…그렇군."
이제껏 마주친 적들 가운데 바르바피는 없었다. 고급 전력이기 때문인지 전사장이라는 적의 우두머리가 친위대처럼 부린다고 들었다. 이제 곧 적들과 전투를 치르게 되면 그들을 볼 수 있으리라.
"장군께서는 바르바피들과도 싸워 보셨지요?"
"그랬지."
그것도 그냥 싸운 게 아니라 아주 질리도록 싸웠었다. 그들의 발톱에 살이 갈린 적도 있었고, 이빨에 물린 적도 있었다. 짐승처럼 변한 그들의 주둥이를 맨손으로 찢어발긴 적도 있었다.
"어떻습니까? 그 바르바피라는 놈들은."
"글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군."
"강합니까?"
"강하지."
카엘의 표정이 미미하게 굳었다. 그러나 군터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짐승 같은 놈들이었다. 한 번 눈이 돌아가면 지휘관의 통제도 통하지 않았지. 거칠고 강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군인으로서는 쓸모 없는 것들이다."
"…그렇습니까?"
그 말에 카엘의 굳은 표정이 풀어졌다. 그 변화가 군터는 우습게 느껴졌다. 애도 아닌데 저렇게 말 한 마디에 기분이 휙 바뀌다니.
"전장에서 필요한 건 군인이지, 짐승이 아니다. 너희가 바르바피들을 의식하고 있는 줄은 몰랐지만, 괜한 생각이라고 말해주고 싶군."
"송구합니다."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이지만, 카엘의 분위기는 들어올 때보다 밝았다. 군터는 그런 카엘의 마음이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병사들에게도 옮겨가길 바랐다.
*
"초원의 군대에 대해서는 자네도 잘 알 테니 따로 설명하지는 않겠네. 나는 설족이라는 놈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겠네."
프롱기우스 후작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설족…그러니까 설인이라는 놈들은 인간이 아니네. 생긴 것은 인간과 비슷하지만, 껍데기만 비슷하지 그 안에 있는 것은 꽤나 달라. 놈들은 갑옷 대신 너저분한 가죽 같은 것을 걸치고 있지만 그런 주제에 철판 갑옷을 입은 것처럼 단단하네. 화살 몇 대를 맞는다고 죽거나 멈춰서지 않으며, 힘도 대단해서 한 놈당 최소한 병사 다섯은 붙어야 막을 수 있네. 그런데 그런 놈들이 수백 명씩 뭉쳐서 움직이니…정말 끔찍하지. 놈들 하나하나가 바르바피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네."
말만 들어보면 바르바피보다 더 껄끄러운 놈들이다. 전투력은 바르바피와 비슷하다지만, 설인들은 이성이 있다. 전술적인 움직임을 보일 줄 안다는 것이다. 그 하나만으로도 그들의 위험성은 바르바피보다 월등하다.
"그리고 또 하나. 구노르라는 괴물이 있네. 알고 있나?"
"들어는 보았습니다."
"그야말로 끔찍한 괴물이야. 그것들 때문에 몇 번이고 벼랑 끝까지 몰렸었다네. 놈들에게는 창칼도, 화살도 통하지 않아. 오직 술법이나…불만이 놈들을 막을 수 있네."
구노르들을 이야기할 때, 안 그래도 지쳐 있던 프롱기우스 후작이 더 지쳐 보였다. 군터는 그를 짓누르고 있는 근심의 상당 부분이 구노르라는 괴물들에게서 비롯되었음을 느꼈다.
"불을 다룰 수 있는 술사들을 몇 내어주겠네. 그들을 잘 지키도록 하게. 그리고 구노르들이 움직이기 시작하고, 만약 자네 쪽으로 움직인다 싶으면 적절하게 그들의 힘을 빌리도록 하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