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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4화 (384/1,064)

384화

"믿고 맡겼건만, 이런 꼴로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콰이렌이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타가르아는 책임을 느낀다는 듯 고개를 숙였으나, 그 이상 숙이고 들어가지는 않았다. 패전을 한 것은 한 것이지만, 그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엔디게르를 비롯한 몇몇 족장들이 제 명을 무시하고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적의 유인에 말려들어 크게 피해를 보았고, 전력에 크게 손실이 생겼습니다. 저는 그 상태에서 버티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하여 남은 병력을 온존하고자 철군한 것입니다."

"그게 변명거리가 된다고 생각하나?"

"변명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닙니다."

"……."

호타가르아를 못마땅하게 노려보던 콰이렌은 혀를 차며 자리에 앉았다.

변명을 하고자 한 것은 아니라지만, 분명 변명이었다. 그리고 이 변명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엔디게르와 몇몇 족장들이 호타가르아와 불편한 사이라는 것은 그도 일찍부터 알고 있었고, 그것을 알면서도 한데 묶어 출진시켰다.

호타가르아에게 휘하 족장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한 책임이 있지만, 엔디게르가 돌출 행동을 하여 일을 그르친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호타가르아는 패했지만 병력을 대부분 온존하여 돌아왔다. 패한 와중에도 할 일은 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마냥 책임을 묻기에는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여기서 이놈을 벌한다면 다른 놈들이 불만을 품겠지.'

콰이렌도 알고 있었다. 지금 이 군중에 어쩔 수 없이 따르고 있는 자들이 있다는 것과, 그런 자들이 저들끼리 모여 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것을. 여기서 호타가르아를 크게 벌했다가는 그들이 위기의식을 느끼고 들고 일어날지도 모른다.

물론 그렇다 해도 억눌러버리면 그만이겠지만,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괜한 분란거리를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결국 콰이렌은 군공으로 과를 씻으라는 한 마디만 하고 호타가르아를 벌하지 않았다. 호타가르아는 그런 처분을 예상했다는 듯 별 반응 없이 받아들였다.

"그럼 이제는 양쪽에서 적을 맞게 되겠군."

"어차피 프롱기우스인가 하는 놈은 옴짝달싹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움직여 치는 게 어떤가? 듣자 하니 고작 오천 좀 넘는다면서?"

파그니타가 말했다.

그러자 콰이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건 어렵습니다. 우리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어쨌거나 저쪽에도 무시할 수 없는 기병 전력이 있습니다. 변절자 놈 말입니다."

프롱기우스 후작과 함께 군을 이끌고 있는 셍겐 파르네토 후작. 그는 일찍이 초원의 부족장이었으며, 기병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또한 그의 휘하에는 초원 출신 기병이 대거 포진해 있었다. 지난 수 차례의 전투에서도 번번히 그들의 방해를 받았던 콰이렌의 입장에서는 그들을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이 지금까지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지만, 등을 보였을 때에도 그럴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으니까.

"구노르들을 써야겠습니다."

파그니타가 코웃음을 쳤다.

"결국 그건가."

"예.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이렇게 발이 묶일 줄은 몰랐습니다."

파그니타의 질책에도 콰이렌은 그대로 수긍했다. 그의 결연한 표정을 본 파그니타는 슬쩍 찌푸렸던 표정을 풀었다.

"어찌할 생각인가?"

"전사들로 하여금 적의 시선을 분산시키고, 그 후에 구노르들을 보내 놈들의 진형을 무너뜨릴 겁니다. 놈들이 이제껏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기병을 뒤에서 받치는 단단한 보병 대형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구노르들을 이용해 그 단단한 대형을 깨버리면, 그 뒤는 쉽습니다."

*

프롱기우스 후작과 파르네토 후작이 이끄는 베이고르군의 진영은 울퉁불퉁한 고지에 위치해 있었다.

"흠……."

프롱기우스 후작은 매일 아침 저녁으로, 틈만 나면 언덕을 올라 먼 곳에 위치한 초원 동맹의 진영을 살폈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해가 뜨기도 전에 언덕을 올라 적군의 동태를 살폈다. 무언가 조금이라도 변한 것이 있나 주의를 기울이면서.

"움직이는군."

"그것을 어찌 아십니까?"

똑같은 것을 보고 있는데도 따라온 부관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손가락으로 멀리 보이는 적군의 진영을 가리켰다.

"본래 이 시간이면 연기가 피어 올라야 하네."

초원의 군대는 따로 보급부대를 운용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각자 개인별로 군량을 챙기는데, 짧은 날 동안 치러지는 전투에서는 일반적인 육포가 쓰이지만 길게 이어지는 전투에서는 다른 것을 챙겼다.

'뱌크'라고 부르는 것으로, 고기에 특수한 양념을 묻혀 건조 시키는 식이었다. 육포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으로 나름의 비법이라 하는데, 그야말로 살기 위해 먹는 것이라 그런지 맛은 정말 형편 없다고 했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한 번 건조시킨 고기는 너무 딱딱하고 메말라서 끓인 물에 넣고 얼마간 불려야 한다는 거다.

"그런데 물을 끓이는 연기가 전혀 보이지 않지."

두 군대가 대치한 이후로 연기가 피어 오르지 않았던 적은 거의 없었다.

"싸우려는 군대가 배를 곯는다는 건 말이 안 되니, 이미 식사를 마쳤다는 거겠지."

일찍 식사를 마친 군대가 부산스럽다면, 답은 하나가 아니겠나.

"긴 하루가 될 것 같군."

작게 중얼거린 프롱기우스 후작은 곧장 그의 막사로 향했다. 그의 막사에는 그가 오기 전부터 선객이 여럿 와 있었다.

"얼마나 남았나?"

프롱기우스 후작이 꾀죄죄한 몰골의 병사에게 물었다.

"엿새 후면 당도하실 겁니다."

"엿새?"

그 말에 프롱기우스 후작은 실소를 머금었다.

"남들은 순간을 다투는데, 자기 혼자 유랑을 나왔군."

"……."

답한 병사를 비롯해 막사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입을 다물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비웃는 대상이 그들로서는 감히 입에 올리기도 힘든 존재이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이대로 길을 열어주고 싶구만. 왕도까지 그대로 달려가라고 말이야."

"장군! 그 무슨……."

"농담이다 농담. 하도 답답해서 말이지."

농담이지만 진심이 담겼다는 말은 굳이 하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어려워질 전쟁은 아니었는데.'

아무리 적의 세가 예상 이상이라 해도, 베이고르가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대응을 했다면 이렇게까지 심각해질 전쟁은 아니었다. 그러나 왕실의 늦장 대응과, 북부가 위태로워진 이후에도 미온적인 태도를 보인 남부를 비롯한 각지 영주들의 안일함이 지금의 사태를 불러왔다.

당장에 엿새 거리에 있다는 리에론 공작만 해도 그렇다. 만약 그가 사태의 위중함을 느끼고 나라를 위해 군사를 내겠다는 마음을 가졌다면 열흘 거리도 닷새 안에 주파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열흘 거리를 닷새로 줄이기는커녕, 오히려 보름으로 늘려서 느긋하게 기어오는 중이었다.

'이런 것이 정치겠지.'

뻔히 보이는 속내에 짜증은 나지만, 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입장이 바뀌었다면, 자신도 그러지 않았으리라는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라는 것은 전쟁보다도 더 냉혹하군.'

그러고 보면 엿새라는 말도 믿음이 가지 않는다. 엿새 거리에 있다고 했지만, 엿새 거리를 엿새 만에 올지 열흘 만에 올지는 리에론 공작의 마음에 달린 것이니까.

'일단…원군은 없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가.'

그나마 동부의 연합군이 적을 패퇴시켰다는 것이 위안거리다. 그들이 움직여준다면 상황이 지금보다는 여유로워질 수도 있다.

"장군! 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전투에 대한 구상이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표정 변화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미 오늘 하루가 길어질 것을 알고 있지 않았던가.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다.

그러나 파르네토 후작은 그와 달랐던 모양인지, 소란이 일자마자 후작 체면도 버렸는지 다급하게 달려왔다.

그는 헐레벌떡 달려오다가 덤덤한 기색의 프롱기우스 후작을 보고는 헛기침을 하며 걸음을 늦췄다.

"놈들이 움직이고 있소. 내 보기에는 그 기세가 전과 다르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오늘 하루는 꽤나 길 것 같구려."

프롱기우스 후작은 병사들에게 전투 태세를 갖출 것을 명한 후, 다시 언덕을 올라 적의 동태를 살폈다.

눈에 힘을 주고 조금 보고 있자 전과는 다른 적의 움직임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셋으로 나뉘었다?'

이제껏 우악스럽게 힘으로 밀어붙이던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진격해 오고 있었다. 평야지대에서의 전투였다면 저런 운용이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지금 베이고르군이 자리를 잡고 있는 곳은 온통 울퉁불퉁한 고지대였다.

지금껏 벌인 전투들 모두, 얼마간 손해를 보더라도 고지전(高地戰)만을 고집해왔다. 모두 적(기병)의 전력을 최대한 깎기 위해서였다.

이쪽이 고지를 점하고 버티는 한, 저쪽에서 아무리 병력을 셋으로 나누든 열로 나누든 전투의 양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렇게 안 하던 짓을 한다? 지금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재미를 못 본 적장이 답답함에 한 번 변화를 줘 본 것일까? 아니면…….

'이쪽의 주의를 분산시키겠다는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어째서?

'숨겨둔 한 수가 있다는 거겠지.'

프롱기우스 후작은 휘하 부장을 불러 몇 가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저 아래, 빠르게 가까워오는 적군을 응시했다.

*

하루의 달콤한 휴식 후에 동부 연합군은 군터의 지휘 아래 신속한 진군을 개시했다.

"남부군은 아직까지 소식이 없군."

"그쪽은 느긋할 겁니다. 여차하면 왕도에서 적과 맞서도 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요."

"설마 그렇게까지……."

지휘관들이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는 군터의 귀에도 들렸다.

'리에론이라.'

군터는 어쩌면 그가 어디 경치 좋은 곳에 눌러앉아서 이쪽의 전황을 보고받으며 웃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대의 리에론 공작은 무가 출신이면서도 무인보다는 정치인의 면모가 더 강한 사내이니까.

"리에론 공작은 굳이 서둘러 올 이유가 없습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런데 시어문드는 군터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말해주었다.

"올 이유가 없다…맞는 말이군."

"예. 그는 우리가 최대한 피를 흘리기를 원하겠지요. 우리가 아예 무너져버리는 것도 그의 입장에서는 좋을 겁니다."

"……."

비정하지만 틀린 이야기가 아니다. 북부는 이미 반쯤 무너졌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고, 베이고르를 지배하는 권력의 균형은 칸디시아렌 공작이 패한 순간에 깨어졌다. 현재 시점에서 베이고르 최고의 권력자는 리에론 공작이다.

이대로 전쟁이 끝난다면, 리에론 공작의 독주에 맞서 북부와 동부의 연수가 불가피하다. 왕은 늘 그랬듯 균형을 유지하려 애쓸 테고, 이런 그림은 리에론 공작이 보기에 그리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닐 터.

"여기서 북부와 동부의 전력이 깎여 나가는 것. 그것이 리에론 공작의 바람이겠지요."

이래서야 아군이 아니라 잠재적인 적군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 되게 놔둘 수는 없지."

"예. 그러니 우리는 최대한 피해를 줄이며 승리해야 합니다. 리에론 공작의 힘을 빌리지 않고 그럴 수 있다면 더 좋겠지요. 그리 되면 그에게 한 방 먹여주게 되는 것이니까요."

기껏 군대를 일으켜놓고 늦장을 부리다가 정작 전투에는 참여도 못하고 전쟁이 끝난다면 리에론 공작의 꼴이 우스워진다. 그가 가진 힘은 여전하겠지만, 그는 세인들의 비웃음을 사게 될 것이고 그의 명망에도 한 줄기 금이 가게 될 것이다.

"그거 마음에 드는군."

내내 굳어있던 군터의 입가에 자그마한 미소가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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