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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3화 (383/1,064)

383화

푹! 푸푹!

히히히힝!

갑작스레 나타난 창의 벽 앞에서 초원 동맹의 전사들은 줄줄이 쓰러졌다. 전속력으로 추격을 가하던 중이었기에, 선두가 무너지니 그 뒤로 연달아 무너졌다.

"뭐, 뭐냐!"

가장 먼저 낙마한 이는 엔디게르였다. 그는 거칠게 땅에 처박힌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하, 함정인가!'

머리로는 답을 찾았다. 그러나 부정하고 싶었다. 괴이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무식하게 긴 창을 든 병사들이 그의 전사들을 사정 없이 찔러대고 있었다. 아니, 전사들이 알아서 창의 숲 속으로 뛰어들고 있었다.

"크아아악!"

"찔러!"

저 죽을 줄 모르고 불 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같았다. 그러나 그 어리석고 무모한 자들이 자신의 수하였기에, 자신을 따르는 이들이었기에 엔디게르는 처절하게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다.

"안 돼! 퇴각하라! 퇴각해!"

아무리 외친들 허사였다. 그를 따르던 병력 일부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기다란 창에 쓰러졌다. 뒤쪽의 병력은 그나마 어떻게든 방향을 틀었지만, 그마저도 어느새 반전한 베이고르의 기병에게 덜미를 잡히고 말았다.

"큭!"

사분오열하는 전사들을 추스르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엔디게르는 전사들이 아니라 자신의 목을 지키기 위해, 당장 눈앞에 덤벼드는 적병들을 상대해야 했다.

채앵!

상대한다고 하지만, 엔디게르가 할 수 있는 건 연신 땅을 굴러다니는 것뿐이었다. 숨 한 번 돌릴 때마다 못해도 대여섯 개의 창이 찔러왔다. 파고들어서 뭘 해보려 해도 창의 길이가 보통의 창보다 배는 길었기 때문에 거리를 좁히는 것도 불가했다.

푸욱!

미처 피해내지 못한 창 끝이 허벅지를 길게 갈랐다. 자세가 무너진 엔디게르가 한쪽 무릎을 꿇었다. 뒤이어 찔러오는 창들을 몸을 굴러 피해냈으나, 그는 이전처럼 곧바로 일어나지 못했다.

"쿨럭!"

엔디게르가 입에 잔뜩 들어간 흙을 뱉어내며 몸을 일으켰을 때, 그는 어느새 자신의 목 앞에 닿은 칼날에 눈을 부릅떴다.

"잘 싸우더군. 허나 이제 그만 포기해라. "

루비오는 죽일 듯 노려보는 엔디게르를 비웃고는 칼자루로 그의 옆머리를 후려쳤다. 뻣뻣하게 굳은 엔디게르가 쓰러지자, 그는 병사에게 명해 그를 포박하도록 했다.

"귀한 놈이다. 상하지 않도록 후방으로 옮겨라."

"옛!"

*

대승이었다. 전날의 치욕(그것이 비록 의도한 것이라 해도)을 말끔히 씻어내는 승리.

거두어들인 적의 수급만 700여 두에 생포한 적의 수가 이백 가량. 합하면 거의 천에 이른다.

이러한 큰 승리도 승리지만, 그보다 더 큰 수확은 군졸들의 사기였다. 요 며칠 간 수 차례 반복된 의미 없는 전투와 퇴각, 거기에 이틀 전 적의 맹렬한 추격으로 크게 손해를 볼뻔한 일로 군심이 흔들리던 차였다. 그러던 와중에 이렇게 큰 승리를 거두게 되니, 흔들리던 마음은 제자리를 찾고 사기는 이전보다 더 높게 솟아 굳건해졌다.

"사로잡은 적장은 엔디게르라는 자입니다. 호전적이기로 이름이 알려진 자이며, 콰이렌의 소집령에 빠르게 응한 족장들 중 하나라 하더군요."

"호타가르아와는 다르군."

"완전히 상극이지요. 듣자 하니 군중에서 그와 몇 차례 대립한 적도 있다 합니다."

지스에른이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허! 하고 탄식했다.

"그건 하극상이 아니오?"

"그만큼 성미가 대단하다는 뜻이겠지요. 또, 나름대로 믿는 구석도 있었을 테고요."

"좋군. 이제 그 놈에게 은밀히 이야기를 흘리면 끝인가?"

"예. 그렇습니다."

"헌데 시어문드 공. 이대로 놈들이 물러날 것이라 확신하시오?"

칼리온이 물었다.

시어문드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물론입니다. 물러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애초 적장은 전투에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내심 이전에 우리와 맞섰던 적들처럼 덧없이 희생당할 것을 우려했을 겁니다. 그런 그에게 물러날 구실이 주어졌으니 물러나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이 한 마디로, 군터는 시어문드와 다른 이들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다른 이들은 전세를 살핀다. 말하자면 눈에 보이는 현상을 보고 생각을 하고, 판단을 내린다.

반면에 시어문드는 현상보다는 그 현상을 이끌어낸 원인, 즉 사람을 살핀다. 보다 근원적인 것을 고려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사고는, 다른 이들과는 근본적으로 궤를 달리했다.

'시야의 차이.'

타고난 것일까, 아니면 스스로 기른 능력일까.

알았다고 해도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재주다. 군터는 다시 한 번 시어문드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확인했다.

"그럼 이대로 가만히 기다리고 있어야 하나?"

"예. 그렇지만 한 번 정도 위협을 해주면 더 좋겠지요. 바로 내일, 해가 뜨기 전에 대대적으로 군사를 움직인다면 적들은 알아서 물러갈 것입니다."

확신에 찬 시어문드의 말.

그런 그를 보며 의구심을 드러내는 이들은 이제 더 이상 없었다.

*

시어문드의 예상대로, 다음날 일찍 군사를 일으켜 대대적으로 공격을 가하니 호타가르아는 망설임 없이 군을 물렸다. 그냥 어느 정도 물러선 정도가 아니라, 아예 철군을 해버렸다. 제대로 된 교전 한 번 없이 너무도 깔끔하게 등을 돌려버리니 오히려 공격을 가한 베이고르군 쪽이 더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추격을 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칼리온이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전에 적의 수급을 대거 챙긴 적이 있는 그는 여전히 공적에 목이 마른 상태였다. 이미 한 번 맛을 봤기 때문에 더 그랬다.

"어렵습니다. 추격을 한다면 기병만으로 해야 할 텐데, 그리 되면 적에 비해 오히려 수에서 열세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크게 데일 수도 있지요."

시어문드가 칼리온을 비롯해 아쉬워하는 이들을 달랬다.

"그럼 이제 마지막 하나가 남았군."

군터의 말에 시어문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대대적으로 승전연을 여시지요 장군. 온 장병들이 즐기고, 한껏 풀어질 수 있도록 말입니다."

그 날, 군터는 출정한 이후 처음으로 크게 연회를 열었다.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내려 그들을 위무하고, 지휘관들을 모두 불러모아 승전을 자축했다.

그리고 그날 밤. 흥과 술에 젖은 병사들이 한껏 느슨해진 틈을 타, 몇 명의 포로가 허술한 방비를 뚫고 탈출했다. 그러나 다음날 그 사실이 알려지고 나서도 베이고르군의 군영에 별다른 소란은 일지 않았다. 마치 없었던 일인 것처럼, 당시 경비를 서던 병사들도 크게 처벌받지 않고 유야무야 넘어갔다.

그렇게 하룻동안 여유를 만끽한 후, 베이고르군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작은 승리를 거뒀으나, 이는 말 그대로 작은 승리일 뿐이다. 훨씬 더 거대한 적이 아직 건재했고, 그들이 있는 한 전쟁은 끝나지 않는다. 작은 승리에 취해 있을 틈이 없는 것이다.

"이틀째 소식이 없군."

"크게 변함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저들이 맹렬하게 달려든다 해도, 프롱기우스 각하께서 마음 먹고 버티신다면 별 도리가 없습니다."

가장 최근에 들어온 소식에 의하면, 프롱기우스 후작은 적에게 패하여 군을 뒤로 물린 상황이었다. 벌써 세 번째 패퇴였다. 그러나 세 번 패한 것치고 병력의 손실은 미미한 수준이었는데, 교전이 일 때마다 소극적인 대응으로 일관했기 때문이었다.

"그럼…현재까지는 성공적인 거로군."

"예. 아주 잘 해주고 계십니다. 과연 프롱기우스 각하십니다."

적은 여유가 있다. 사기 역시 높게 올라 있을 거다. 동시에 조급함도 느끼고 있을 것이다. 조금만 더하면 완벽히 끝낼 수 있다 생각할 테니까.

"후방에서의 전갈은?"

"칸디시아렌 각하의 소식은 아직 들어온 것이 없습니다. 다만 군사를 규합하는 일은 그럭저럭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걸리겠나?"

"열흘을 보고 있습니다."

"늦어도 열흘인가?"

"빨라야 열흘입니다."

군터가 인상을 찡그렸다.

"느리군."

"주인이 사라진 땅에서 병사를 모집하는 일입니다. 강압적으로 징병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지요. 어쩔 수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난 그 건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오. 머리도 없는 잡졸들이 뭉쳐 일어선들 전쟁에 도움이 되겠는가?"

"전쟁에서 머릿수는 최고의 무기 중 하나입니다. 그들이 실제 전투에서 얼마나 힘을 발휘하느냐 하는 것과는 관계 없이, 그만한 머릿수가 아군이라는 것 자체만으로도 이득이지요. 어찌 되었든, 그들이 궐기하면 적들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두고 보면 알겠지."

군터가 시어문드를 비롯한 장수들과 앞으로의 전략에 대해 논하는 사이, 초원 동맹의 진영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을 몰아넣기가 쉽지 않군."

파그니타가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중얼거렸다. 걸걸한 목소리에 힘이 빠져 있는 것 같은 건 착각이 아니었다. 그는 상당히 지쳐 있었다. 연이은 전투 때문이 아니라, 저 하늘의 빌어먹을 태양이 뿌리는 더위 때문에 말이다.

"이러다가는 끝이 없을 것 같은데, 차라리 무리를 해서라도 들이받는 게 어떤가?"

"이번의 전투로 베이고르를 끝장낼 수 있다면 그리 하겠습니다만…그게 아니니 그럴 수는 없습니다."

콰이렌이 고개를 저었다. 파그니타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답답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바르바피와 설족등을 이용하여 적진을 휘젓는 것도 고려해 보았으나, 이미 브라노스를 떨어뜨리는 과정에서 상당한 피해를 본 바 있었다. 더 이상 그들을 소모했다가는 베이고르의 왕도에서 치를 일전에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지금도 충분히 어렵긴 하지만.'

적장인 프롱기우스 후작은 너구리 같은 자였다. 미리 수십 개의 굴을 파놓고, 전투 한 번을 치를 때마다 파놓은 굴로 교묘하게 빠져나간다.

매번 추격을 했지만 크게 이득을 보지 못했다. 겉으로만 놓고 보면 벌써 몇 차례 승리를 거두었기에 군사들의 사기는 좋지만…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보이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하는 그의 입장에서는 영 답답한 형국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영원히 도망만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피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파놓은 굴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지만, 계속해서 몰아붙인다면 언젠가는 그 굴들도 바닥을 드러낼 것이다.

"계속 몰아붙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각오를 다질 때였다.

"전사장! 급보입니다!"

"무슨 일이냐!"

다급한 목소리를 듣자마자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자연히 대꾸하는 목소리가 거칠어졌는데, 아니나 다를까 달려들어온 전사는 듣기 싫은 소식을 전했다.

"뷔아르 족장이 이끌고 간 군대가 적에게 패하였다고 합니다! 뷔아르 족장은 지금 잔군을 이끌고 돌아오는 중이라고……."

콰앙!

그 말을 듣자마자 콰이렌이 내려친 주먹에 탁자가 박살이 나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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