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화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소!"
족장 엔디게르가 언성을 높였다. 호타가르아는 발끈하려다가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을 감지하고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엔디게르가 한 마디 할 때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동조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나흘. 고작 나흘인가.'
고작 나흘이라기보다는, 그래도 나흘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호전적인 자들이 이 정도까지 참은 것만 해도 꽤 오래 참은 셈이니.
"우리는 싸우러 온 것이오!"
"그대 눈엔 우리가 지금 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아니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 것은 안다. 다만 그렇다고 쏘아붙이는 말에 가만히 앉아 맞고만 있기에는 호타가르아의 성정이 그리 무디지 않았다.
"우리의 임무는 전사장이 저들의 본군을 섬멸할 때까지 적들을 막는 것이야!"
"흥! 내가 보기엔 족장께서 적장에게 겁을 먹으신 것 같소만?"
콰앙!
"뭐라!"
단단한 원목으로 만든 탁자가 주먹 한 방에 부러졌다. 호타가르아가 벌떡 일어서니 엔디게르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내가 틀린 말을 했소?! 전투가 시작된 첫날부터, 족장은 그저 어떻게 하면 적과 싸우지 않을 수 있을까 골몰하는 것처럼 보이오!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공격해야 할 순간에 번번이 전사들을 물리며, 적들이 등을 보이고도 무사히 물러날 수 있게 용인했소?!"
"우리를 끌어들이려는 함정이라 몇 번이나 말을 했었다!"
"아니지. 그게 아니야. 함정처럼 보고 싶었던 것이겠지! 겁을 집어먹은 자의 눈에 무엇인들 두렵게 보이지 않을까!"
"뚫린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전장에 섰다고 해서 다 전사가 아니지! 나는 전사장의 명을 따르지만, 그렇다 해도 겁쟁이는 따를 수 없다!"
채앵!
"그 목이 떨어져도 그딴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보겠다!"
엔디게르도 허리춤의 칼에 손을 뻗었지만 호타가르아의 움직임은 너무 빨랐고, 급작스러웠다. 언쟁을 벌인다 해도 설마하니 칼까지 뽑을 줄은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목 앞에 칼날이 들어와 있어도 엔디게르는 눈을 부릅뜨고 호타가르아를 노려보았다.
"그래. 어디 한 번 봅시다. 나도 목이 떨어져도 내 입이 계속 움직일 수 있을지 궁금하군. 허나 내 목을 치면, 당신의 목 역시 온전치 못할 것이오."
안다. 잘 안다. 그래서 칼을 목 앞에 가져다 두고도 긋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호타가르아는 엔디게르의 도발에 반응하지 않고 살기 어린 눈으로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그의 입이 열린 것은 두 사람의 눈싸움이 조금 더 이어진 후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 대장은 나다. 그러니 이 군대는 내 명을 따른다.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내 군대에 둘 수 없다."
"나 또한 다시 한 번 말하리다. 나는, 우리는 싸우지 않는 대장은 따를 수 없소."
"좋다."
호타가르아가 칼을 거둬들였다.
"그렇다면 어디 멋대로 한 번 해봐라. 내일 또 한 번 적들이 공격해 온다면, 그때 너희들이 움직이고 싶은 대로 한 번 움직여보도록. 허나 그 결과에 대해서는 오롯이 너희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요. 그리 하리다. 다만, 그대 역시 책임질 부분이 생긴다면 마땅히 져야 할 것이오."
"물론 그리하지."
그들은 그렇게 합의 아닌 합의를 보았다.
초원의 동맹군은 두 무리로 갈렸다. 호타가르아를 따르는 쪽과 따르지 않는 쪽. 허나 그들은 전사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일단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정말 이래도 괜찮겠소?"
"걱정들 할 것 없소."
불안해하는 족장들을 엔디게르가 힘 있는 목소리로 달랬다.
"어차피 내일이면 다 해결 될 일이오. 내일이 지나면 호타가르아가 알아서 고개를 숙이고 들어올 테니 여러분은 이 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소."
아무리 호타가르아가 못마땅하다 해도 그는 전사장이 임명한 일군의 대장이다. 그에게 대놓고 반기를 들었으니 지금이야 어떻게 넘긴다고 해도 후에 문제가 불거질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엔디게르는 그에 대해 염려치 않았다. 전사장은 호타가르아를 비롯해 다수의 동맹 부족들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다. 때문에 엔디게르는 전사장이 이 일에 대해 문책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결과만 낸다면 말이지.'
그가 항명을 한 것은 단순히 호타가르아가 싫어서가 아니었다. 물론 그런 이유도 일부 있지만, 그보다는 그의 답답한 지휘를 견디기 힘들었던 탓이 더 컸다.
그가 보기에, 호타가르아는 이 싸움에서 이기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승리의 기회가 눈앞에 있는데도 그걸 그저 바라만 보고 있으니,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던 그에 대한 불신이 점점 더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 머저리 같은 놈들을 상대로 이제까지 발이 묶여 있는 것이 굴욕이지.'
확실히, 전사장은 적들을 막으라고 했었다. 그러나 그것은 최소한의 임무일 뿐, 전사장은 결코 승리하지 말라고는 하지 않았다. 받은 명령대로 적을 막되, 가능하다면 승리를 노리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렇게 겁만 잔뜩 집어먹은 작자라면 쪼그라들 대로 쪼그라들어서, 결국에는 버티는 일조차 제대로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 전에 나선 것이다. 그런 확신이 있었기에, 엔디게르는 항명을 하고서도 아무런 마음의 부담이 없었다. 그의 머릿속엔 오직 내일 이후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을 호타가르아의 표정이 그려질 뿐이었다.
*
다음날.
와아아아아아-!
둥! 둥! 둥!
전투가 시작됐다. 지난 나흘 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선공은 베이고르군이었다. 포진이 조금씩 바뀌기는 했지만 대체적으로 첫날과 같은 진형에, 크게 다르지 않은 공격 방식. 좌우와 중앙, 3군이 보조를 맞춰 세 개의 창이 되어 찌르는 공격.
"그간 가만히 참기만 하니까 이쪽을 아주 얼간이로 본 게지. 하지만 오늘은 다를 것이다."
엔디게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사냥을 개시하기 직전의 맹수처럼 가만히 숨죽이며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기다리던 때가 왔을 때,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외쳤다.
"가자! 추격한다!"
엔디게르와 그의 전사들, 그리고 그와 뜻을 같이 하는 부족의 무리가 일제히 뛰쳐나갔다. 호타가르아는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족장. 괜찮겠습니까?"
호타가르아의 휘하 전사가 찝찝한 표정으로 물었다.
"뭐가 말이냐."
"저들이 적을 쫓아가 전공을 세우게 되면 우리의 처지가 난처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럴 일은 없다. 그보다는 저들이 너무 호되게 당하고 돌아오지만 않았으면 좋겠군.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어찌 됐든 아군이고 전력의 일부니까."
지금 호타가르아의 유일한 걱정은 엔디게르와 그의 전사들이 너무 큰 손실을 입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그의 우려는 헛된 것이었다.
엔디게르와 그의 무리는 물러서는 적들을 추격하여 승리를 거뒀다. 열심히 쫓아간 것에 비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중요한 건 별다른 손실 없이 돌아왔다는 것이었다.
"아까웠소. 조금만 더 빨리 출진했다면 놈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었을 텐데…내 뷔아르 족장에게 들은 말이 걸려서 신중히 움직이다 보니 그만 호기를 놓쳤구려."
엔디게르는 찌푸린 표정의 호타가르아를 보며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적이 파놓은 함정 같은 것은 없었소이다."
호타가르아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열이 올라 당장이라도 뒤집어 엎고 싶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그는 틀렸고, 엔디게르는 옳았다.
'아니. 아니야.'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자꾸만 드는 후회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저 비겁한 변명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신나게 추격을 했지만, 결국 건진 것은 적병 수십의 목 정도다. 이는 성과라고도 할 수 없는 자그마한 것. 이것만으로는 적의 함정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비웃음만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놈들의 수준은 이 정도요.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소이다. 놈들이 오늘 전투로 잔뜩 겁을 집어먹었을 테니, 우리가 이제부터 놈들을 거칠게 압박하면 놈들은 알아서 자멸할 것이오."
엔디게르의 큰 목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지던 와중이었다. 막사 바깥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합니다! 적들이 물러나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물러나다니!"
엔디게르의 목을 비틀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시달리고 있던 호타가르아가 재빨리 외쳤다.
그러나 이어지는 전사의 보고는 그에게 있어 전혀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
베이고르군은 야음을 틈타 그들의 진영을 멀찍이 뒤로 물렸다. 초원 동맹군이 그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그들이 행동을 개시한 후였다.
이 야밤의 대이동으로 인해 초원 동맹군의 사기는 한층 더 올라갔다. 그들은 베이고르군이 자신들을 피해 도망쳤다고 생각했다. 조금 더 생각을 할 줄 아는 이들은 베이고르군의 군영이 더 높은 지대로 이동했음을 간파했지만, 그 역시 형세의 불리함을 느끼고 짜낸 궁리의 일환으로 비춰졌다.
"저기서 그냥 버틸 생각인가 보군."
엔디게르는 언덕 위에서 펄럭이는 베이고르의 깃발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너무 마음을 놓고 있었군. 쥐새끼들이 꼬리를 말 줄이야."
그는 이제 베이고르군이 그들의 진지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 예상은 빗나갔다. 새롭게 진지를 구축한 베이고르군은 하루를 건너뛰고 그 다음날 아침, 다시 한 번 공세에 나섰다.
"무식한 놈이 그래도 고집은 있는 모양이군."
홀로 말을 몰고 나와 호타가르아를 부르짖을 때부터 알아보긴 했다. 그런데 아무래도 저쪽의 대장 놈은 그의 짐작보다도 더 무식하고 고집스런 놈인 것 같았다. 아니면 자존심이 쓸데없이 강하던지.
"싸우겠다면 이쪽이야 환영이지!"
이번에야말로 크게 전과를 올리리라. 엔디게르의 입가에 크게 미소가 번졌다.
*
"시작됐군."
아힌키우스군의 지휘관인 루비오는 북소리에 맞춰 울려 퍼지는 진군령과, 그에 따라 전진하기 시작한 병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몸을 낮춰라. 적의 눈에 띄면 그간의 모든 수고가 다 허사다."
"옛."
복명하는 병사들의 행태가 기괴했다. 뱀이라도 된 것처럼 사지를 다 땅에 닿게 엎드려 있었는데, 그 상태로 조금씩 앞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좋아. 정지. 이곳에서 대기한다."
병사들뿐 아니라 루비오의 호흡도 거칠었다. 불편한 자세에서의 이동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긴장감이 그들을 짓누른 탓이었다.
"알겠느냐. 신호에 맞춰 2인 1조로 창을 들어올리는 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실수하게 되면 실수한 당사자들뿐 아니라 뒤의 동료까지 다 같이 죽는다. 명심해라."
몸을 한껏 낮췄고, 수풀이 길게 자라 전방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를 볼 수 없었다. 다만 멀리서도 뚜렷하게 들리는 소리들을 들으며 대강 짐작할 뿐이었다.
'온다.'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또한 몸과 맞닿은 땅이 전하는 진동이 점점 커져옴을 느꼈다.
히히히힝!
두두두두!
일단의 기마가 그들이 숨은 곳을 지나쳐갔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지금이다-!"
쩌렁쩌렁한 고함소리에 루비오는 벌떡 몸을 일으키며 외쳤다.
"거창!"
엎드렸던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서며 옆에 둔 창을 들어올렸다. 일반적인 창의 세 배 길이는 되는 장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