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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81화 (381/1,064)

381화

호타가르아아아아-!

사람의 목소리인가 싶었다. 천둥소리도 이보다는 작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주변의 전사들이 쓰러지는 것이 귀가 찢어져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싱거운 생각도 들었지만, 허공에 떠오르는 잘린 목들을 보면 그런 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혹시나 했지만 역시 적의 돌진은 막아낼 수 없었다. 천 기의 기병도 기병이지만, 앞에서 길을 여는 선봉의 파괴력이 상상 이상이었다. 양 손에 창과 검을 들고 피를 뿌리는 적장의 모습은 적이지만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이곳이 전장이 아니었다면 호타가르아는 그의 무공에 박수를 쳐주었을 것이다.

허나 이곳은 전장이다. 저 흉포한 자는 자신의 목을 노리고 달려오고 있으며, 그가 베어 넘기고 있는 것은 아군의 전사들이다.

"쏴라! 말을 노려라!"

정면에서 막아서는 것은 힘들다면, 막지 않으면 그만이다. 꼭 정면에서 들이받아야만 멈출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슈슈슝!

초원의 전사들은 모두 말을 타면서 활을 쏠 줄 안다. 숙련된 전사들의 기사 정확도는 궁병이 땅에 발을 딛고 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정도다.

히히히힝!

"크악!"

거침 없이 달리던 기병들이 측면에서부터 조금씩 허물어져갔다. 방패로 가려도 말의 다리며 목에 화살이 박히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전속력으로 달리던 말이 거꾸러지면 기수도 함께 엉키며 뼈가 부러지고 살이 터졌다퍽!

군터의 팔뚝에도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이 꽂혔다. 갑옷이 없었더라면 깊숙이 박혔을지도 모르겠지만 갑옷이 있고, 그 아래는 돌덩이 같은 근육이 단단히 자리잡고 있었기에 화살촉은 살가죽을 파고드는 정도에서 멈췄다.

"장주님!"

상황이 급하니 할렌의 입에서 불러야 하는 '장군' 대신 익숙한 '장주'라는 호칭이 튀어나왔다.

"이대로 계속 갑니까?!"

계속해서 달리고는 있지만 병사들의 피해가 생기고 있는 상황. 여기서 더 들어간다면 피해가 점점 크게 쌓이게 될 터였다. 지금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는 병사들은 하나하나가 모두 정예인 만큼, 이렇게 잃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군터도 같은 생각이었다. 호기를 부려보았으나 이 이상 들어가면 호기가 아니라 무리가 된다.

"받아라!"

군터는 들고 검을 칼집에 넣고 칸젤을 던졌다. 할렌이 다급히 칸젤을 받으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그는 안장에 걸어두었던 활을 꺼냈다.

슈웅!

활을 꺼내자마자 화살 한 대가 머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군터가 손을 뻗어 화살이 코 앞 즈음 날아들었을 때 번개처럼 낚아챘다. 어떤 나무로 만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의 질이 좋았고, 낚아채는 힘의 조절이 절묘했기에 화살은 그의 손 안에서 멀쩡히 멈췄다.

"우회한다!"

시위를 놓으며 외쳤다. 쏘아진 화살은 시커멓고 거대한 물결 속으로 사라졌다. 전혀 의미 없이, 화살 한 대가 한 순간에 사라져버린 것 같았다.

그러나 군터의 눈에는 뚜렷하게 보였다. 그가 쏜 화살은 원했던 대로 날아가 정확히 목표에게 닿았다.

"장주님의 창은 만지고 싶지 않습니다!"

"전장이다! 장군이라 불러라!"

"아! 옛!"

할렌에게서 칸젤을 받아든 군터가 코웃음 치며 고삐를 당겼다. 정면으로만 달리던 말이 우측으로 방향을 틀었다.

*

"적들이 빠져나가려 하고 있소! 추격해야 하오!"

"추격?"

"그렇소! 놈들이 꽁무니를 빼고 있지 않소이까! 지금 추격을 가한다면 적장을 잡지 못한다 해도 크게 전과를 낼 수 있소!"

"……."

호타가르아는 시끄럽게 떠드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쪼개진 방패를 집어 던졌다. 팔뚝에 살짝 박혀 있던 화살이 쪼개진 방패와 함께 떨어졌다.

팔뚝에서 굵은 핏줄기가 흘렀다. 조금만 더 깊게 박혔으면 뼈까지 상할 뻔했다.

"이상하지 않나?"

"이상하다니. 뭐가 말이오?"

따지는 것 같은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엄연히 이곳의 우두머리는 자신인데, 아무리 같은 족장이라 하나 저런 태도라니.

불쾌한 마음을 억누르고, 호타가르아는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무모하고 어설픈 공격이었다. 내 목을 노리고 나선 거라면 차라리 도중에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밀고 들어와야 했어."

"그거야 상황이 여의치 않다고 판단했으니까 그런 것 아니오?"

"글쎄. 내 눈에는 저게 퇴각으로 보이지 않고, 유인으로 보이는군."

"유인?"

사내가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호타가르아의 비틀린 입매가 꿈틀거렸다.

"저걸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시오?"

사내가 손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중앙에서 치고 나오는 적을 위해 보조를 맞추며 받쳐줘야 할 양 측면의 적들이 굼뜨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탓에 중앙의 적이 고립될 위험에 처한 것이다.

'저쪽이 굼뜬 것인가, 저놈이 서두른 것인가.'

전날 자신을 따로 불러냈던 것부터, 제압을 하고서도 생각을 해보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살려준 것 등을 보면 적장은 과격하고 오만한 성미를 지녔음에 틀림 없다. 하지만.

'꺼림칙하단 말이지.'

선택 한 번에 무수한 이들의 생사가 결정된다. 때문에 그 결정은 머리가 쪼개지도록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것이어야 한다.

허나 때때로, 그런 치밀한 계산보다 비교적 즉흥적인 본능적 판단에 기대고 싶어질 때가 있다. 특히 자신의 '감'이 뛰어나다고 자부하는 이들의 경우는 그런 경향이 더했다.

호타가르아가 바로 그런 부류의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제껏 수십 차례의 전투를 치르며 자신의 감에 의존한 결정으로 여러 번 승리를 거머쥔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그때처럼 그 감이라는 녀석이 속삭인다.

가지 말라고. 가면 위험하다고.

갈등하던 그는 결정을 내렸다.

"추격하지 않는다."

"아니 그게 무슨……."

"대장은 나야!"

호타가르아는 불신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을 사납게 훑어보았다. 그는 낮게 으르렁거리며 그들을 위협했다.

"명심하시오. 나는 전사장에게 이 군대를 이끌 것을 명 받았고, 나는 내 의무에 충실할 거요. 따라서 이 군영에서 내 명을 거스르는 자들은 용납ㅇ할 수 없소. 내가 내린 결정에 왈가왈부 하는 자들 역시 가만두지 않을 것이오."

불만은 있어도 대놓고 호타가르아와 맞설 정도까지는 아니었는지, 처음 추격을 종용했던 사내를 비롯한 몇몇 족장들은 못마땅한 표정을 하고서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는 않았다.

'후우.'

호타가르아는 치미는 분기를 가라앉혔다.

일단 강압적으로 누르긴 눌렀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인 봉합일 뿐이다. 또 한 번 빌미를 주게 된다면 그때 이들은 지금보다 더 강하게 튀어 오르리라. 그때는 지금처럼 고함 한 번 지르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빌어먹을,'

원래도 그랬지만, 다시금 전사장 콰이렌이 원망스러웠다. 손발이 맞기는커녕, 틈만 나면 대들려고 하는 자들과 한 데 묶어 전장에 나가게 하다니.

'대군을 이끌 역량도 없으면서 의심만 많은 작자.'

입버릇처럼 동맹이라는 말을 반복하지만 그것은 말뿐이다. 전사장 콰이렌은 희생을 필요로 하는 자리가 있을 때는 언제나 그의 '동맹'들을 밀어 넣었다. 바르바피들을 비롯하여 구 타칸 연합의 중추 부족들은 제 새끼처럼 애지중지하면서, 그의 '동맹'들에게는 놀라우리만치 냉혈한 모습을 보인다.

'아, 그 털북숭이들도 포함이군.'

설족들. 그들의 오만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어떤 일이든 그들과 얽히기만 하면 좋은 꼴을 못 본다.

전사장도 그들의 일이라면 무조건 한 수 접고 들어가니 말 다한 셈이다. 그들의 전력이 막강하고, 그 전력이 이번 전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의 안하무인 격의 태도는 참아주기가 힘들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이 전쟁에 몸을 담갔고, 담근 이상 승전만을 바랄 수밖에 없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다소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럴 수밖에…….

'제기랄. 이러다가 로베 꼴이 나면 참전한 것이 무슨 소용인가.'

친분이 있던 부족장 로베는 얼마 전 북상하는 베이고르군을 막기 위해 병사들을 이끌고 나섰다가 전사했다. 그가 이끌고 간 것은 작은 부족들의 전사들로, 하나의 군대라고 보기 힘든 잡스러운 병력이었다. 처음부터 이길 것을 기대한 싸움이 아닌 것이다. 호타가르아는 죽으라고 보낸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처음 전쟁에 동원될 때부터 끌려오다시피 했다. 그렇게 끌려온 전장에서는 괄시의 시선과 소모품 취급을 받고 있고.

'답답하군.'

모든 것은 타르가이 베르겐이 초원을 휘어잡으면서 시작됐다. 그저 바람 따라 흐르는 삶을 누리던 이들이 강제로 전장에 내몰려야 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역사라 하겠지만, 어떤 이들은 비극이라 한다. 그리고 호타가르아는 후자였다. 그는 따뜻한 땅을 바라지 않았고, 바라지 않은 전쟁에서의 개죽음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허나 어쩌겠는가.'

거스르려 했다면 초원에서 그랬어야 했다. 그러지 못한 이상, 여기서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겠나. 그저 죽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부족의 전사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는 데 주력하는 수밖에 없다.

답답한 가슴에서 깊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

"오늘도 꿈쩍 않는군."

아모트군의 지휘관, 오로보르는 활만 쏘다가 속도를 줄이는 적을 보며 입맛을 다셨다. 벌써 며칠째 이런 소모적인 전투가 이어지고 있다. 이쪽에서 불협화음을 내며 허술한 부분을 드러내고 있는데도 적은 맞붙을 생각 자체가 없는 듯 소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신중하다고 해야 할지 겁이 많다고 해야 할지…어느 쪽이든 대단하긴 하구만.'

적어도 싸울 생각이 있어 전장에 나왔다면, 이런 호기를 놓치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적장은 벌써 몇 번이나 그런 기회를 보고서도 못 본 척 넘기고 있었다.

'이걸 참아 넘기는 적장도 대단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건 센트리올의 젊은 무장이로군.'

시어문드는 적장이 이렇게 나올 것이라 예견했었다. 아니, 아예 적장이 이렇게 나올 것을 전제로 하고 세운 작전이었다. 그리고 그 작전은 현재까지는 보란 듯 맞아떨어져가고 있었다.

'이제 슬슬 답답한 자들이 가슴을 치기 시작할 터.'

병사들마저도 북을 치며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고 싶을 것이다. 하물며 지휘관들이야 오죽할까. 저쪽의 모든 지휘관들이 인내심 많은 적장과 같지는 않을 테니, 이제 슬슬 반응이 올 때가 됐다.

둥! 둥! 둥!

"퇴각 신호입니다!"

부관이 목소리를 높이자 오로보르는 미련 없이 말머리를 돌렸다.

"퇴각한다."

"옛!"

또 다시 퇴각이다. 그제와 어제, 어제와 오늘이 다르지 않다. 벌써 나흘째 같은 장면의 반복이다.

"헌데 장군. 어째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매번 퇴각만 합니까?"

불만의 목소리가 새어나올 때가 된 것은 저쪽만의 일이 아니었다. 이쪽도 그렇다. 제대로 된 전투 한 번 없이 나흘 동안이나 변죽만 울린다면, 병사들은 출진 명령에 긴장보다는 짜증을 느끼게 된다.

"때가 되면 싸울 것이다. 아직은 때가 아닐 뿐이지."

슬슬 의구심을 갖기 시작하는 수하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라는 것이 그도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밀을 요해야 하는 작전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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