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화
해가 떨어진 초저녁에 첫 번째 전투가 시작됐다. 지스에른이 이끄는 사보스군이 좌측에서 나아가며 개시를 알렸고, 적군은 곧바로 맞대응을 해왔다.
그러나 팽팽한 긴장감을 끊으며 시작된 첫 전투는 싱겁게 끝이 났다. 기세 좋게 달려나가던 사보스군의 머리 위로 화살비가 쏟아지자 그들의 기가 꺾였고, 주춤한 사보스군에게 적의 일제 공세가 가해지자 아모트 지휘관 오로보르가 병력을 이끌고 지원에 나섰다.
"물러나는군요."
목을 길게 빼고 지켜보던 할렌이 중얼거렸다.
"어째서 빠지는 건지 모르겠군요."
오로보르의 아모트군이 지원을 가고 있었다지만,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한 번 부딪치고 빠져나올 수 있을 만한 시간이 있었다. 물론 발을 묶인 채로 아모트군까지 상대해야 했을 수도 있지만, 그 상태에서 전면전까지 이어가도 크게 나쁜 그림이 될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할렌은 그리 생각했다.
"적장이 소심한 놈이군요. 그게 아니면……."
"제대로 싸울 생각이 없거나."
군터가 나지막이 말을 받았다. 그리고 물러나고 있는 양측 병사들을 지켜보았다.
"장군."
시어문드가 말을 달려왔다.
"적의 진형이 단단해 보이는군."
"예. 저 또한 그리 보았습니다."
얼핏 보면 정말 간단한 모양이다. 똑바로 길게 늘어선 형태였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그 두터움과 늘어선 정도를 보면, 언제든 전군이 진퇴를 용이하게 할 수 있게끔 적절히 포진해 있다. 잘못 들어갔다가는 일제히 튀어나오는 기병들에 둘러싸여 순식간에 낭패를 보고 말 것이다.
"저대로 버티기에 들어가면 어려워질 것 같은데."
"바로 보셨습니다. 적이 마음먹고 웅크리면 우리는 어찌 할 방도가 없지요."
군터는 시어문드의 뒷말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적이 웅크린다 해도 길이 없을 것 같지는 않았다.
휘하 친위대에 기병을 좀 더 충원하여 적절한 시기에 뛰쳐나간다면 적장이 머물고 있는 적 진영 중앙까지 뚫어낼 수 있으리라. 물론 그럴 경우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겠지만, 아무튼 적이 어찌나오든 승리할 자신은 있다는 거다.
다만 군터는 그런 자신감을 시어문드에게 내비치지는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전쟁에서의 큰 승리지, 눈앞에 있는 전투에서의 작은 승리가 아니었으니까.
"그대의 계획대로 되려면, 일단 놈들을 끌어내야 하지 않나?"
"예. 놈들을 유인 해서, 전장을 보다 크게 가져가야 합니다."
구상한 전략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호타가르아의 군을 적 본군과 떼어놓을 필요가 있다. 지금 이 전장에서부터 적 본군이 위치한 곳까지는 대략 이틀에서 사흘 거리. 둘로 나뉘었다고는 하나, 사실은 한 곳에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가까운 거리다.
이 거리부터 벌려야 한다. 즉, 전장을 옮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부터…거짓으로 패퇴해야 합니다."
"적이 따라오지 않는다면 어찌 하나?"
"그렇다면 적장은 전사장이라는 자로부터 의심을 사게 될 겁니다. 패하여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는 것이야말로 적에게 피해를 입힐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인데, 그를 행하지 않음은 시각에 따라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들 수 있을 겁니다."
시어문드는 여전히 여유로웠지만, 이전과는 달리 눈에 독기가 어려 있었다. 아마 이전에 있었던 한 차례의 판단 실수가 그에게 자극이 된 모양이었다.
"해서 장군의 역할이 막중합니다. 장군은 초장부터 적장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주셨습니다. 그가 의심하지 않게끔 만들기 위해서는, 장군께서 최선을 다해 주셔야 합니다."
"물론 나는 최선을 다할 것이오. 허나 그대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는 다른 것 같군."
"예. 아마 그럴 것입니다."
두 사람의 의미심장한 시선이 마주쳤다.
*
다음날 아침.
"출진이다! 북을 울려라!"
군터는 직접 천 기의 기병을 이끌고 나섰다. 그의 기병이 앞장을 서고 나머지 병력이 그 뒤를 받치는 모양새였다. 대장기가 앞에서 흩날리는 것을 적들도 보았는지, 그들도 어제와는 달리 전군이 대응을 해왔다. 길게 늘어선 병력이 일제히 출렁거리더니 가뜩이나 긴 대형이 더욱 길어졌다.
"우리도 좌우로 넓게 벌려라!"
명에 맞추어 기수가 깃발을 들었고, 그를 본 고수가 북을 쳤다. 앞으로 나아가던 병사들이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천의 병력이 움직이니, 그 모습은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초원 전사들에 비해도 눈이 좋은 편인 호타가르아가 그것을 놓칠 리 없었다.
"으음."
베이고르군의 움직임을 지켜보던 그가 침음을 흘렸다.
군의 일부만이 나섰던 전날에 비해, 지금은 전군이 한꺼번에 움직이고 있었다. 이쪽의 움직임에 맞추어 대응하는 형태를 보아하니 물러설 생각은 없어 보였고, 그렇다는 것은 한 가지만을 의미한다.
"전면전이로군."
가장 앞으로 나온 기병 무리. 그 가장 앞에서 휘날리는 깃발이 눈에 들어왔다.
대장기다.
'무모하군. '
초원의 전사들은 개인의 용맹을 높게 쳐준다. 전장에서 용맹을 떨쳐 전공을 세우는 것은 더할 수 없는 명예다. 그렇기에 어떤 전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전장의 일선으로 스스로 나아가 싸우기도 한다. 그야말로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개 전사들의 경우다. 그들이 전투에서 공헌 할 수 있는 것이 몸바쳐 싸우는 것밖에 없으니,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개 전사의 수준을 넘어, 그들을 지휘하는 입장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네놈이 강하다는 것은 인정 하겠다만.'
아직도 목이 시큰거리는 듯하다. 설마 그렇게 제압을 당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자신은 그 자리에서 이미 한 번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살아서 숨을 쉬고, 전투를 치를 수 있는 것은 모두 적장의 변덕 덕분이었다.
'너의 그 오만함이 이번엔 너의 목을 조를 것이다.'
단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굴욕적인 경험이었다. 고스란히 되갚아주지 않고서는 마음에 진 응어리가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들어라! 천천히 물러나면서 화살 맛을 보여주……."
목에 힘을 주며 명령을 내리던 중이었다. 적의 선두에 나와 있던 기병 무리가 갑작스레 달리기 시작했다. 정면으로, 거의 전속질주나 다름 없이 빠르게.
"미친!"
호타가르아는 저도 모르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명령을 내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그는 당황하고 말았다. 적 기병의 돌진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선두에서 선명하게 휘날리는 대장기의 존재가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미친 건가?'
어떤 생명체든 머리가 따이면 죽는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지휘하는 우두머리가 사라지면 아무리 강대한 군대라 해도 주저앉을 수밖에 없다.
그걸 모르는가? 아니, 그것도 모르는 자가 수천 군세를 이끌 수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알면서도 저렇게 나오는가?
"오만하기 짝이 없구나!"
치고 나오는 기병을 필두로 해서 적군이 일제히 밀고 들어왔다.
"족장! 어찌 하오리까!"
"선두에서 치고 나오는 놈들을 잡는다! 놈들이 들어오는 순간에 맞춰 좌우의 병력으로 중앙을 조여!"
대장기가 꺾이면 그 순간 전투 승리다. 호타가르아의 눈에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기병과 그 선두에서 말을 달리는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
"장군! 옆에서!"
"알고 있다! 신경 쓰지 마라! 길은 옆이 아니라 앞에 있으니!"
할렌의 외침은 그의 마음이 아니라 뒤따르는 병사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들의 두려움 말이다.
그들도 눈이 있으니 새의 날개가 접히듯 좁혀오는 양 측면의 적군을 보았으리라. 그 모습은 마치 거대한 물결이 몰아치는 것 같았다.
적군의 대형이 대열을 얇고 길게 펼친 모양새였기에 더 그렇게 보였다. 멀리서 보기에는 적의 군세가 5천이 아니라 5만은 되는 것 같았다.
'약은 녀석이로군.'
대체로, 군사의 움직임은 은밀할수록 좋다. 상대가 대응하지 못하도록 최대한 움직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숨겨서 되도록 상대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하고, 설령 들키더라도 반응할 시간이 최대한 적어지도록 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러나 적장은 그러지 않았다. 우리가 너희를 둘러싸 가고 있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고 있다. 이건 위협이며, 동시에 시험이다. 이렇게 하는데도 들어올 거냐는 물음인 것이다.
이런 식의 도발은 처음이다. 작전은 작전이지만, 머리에서 열이 오르니 한 번 어울려주는 것도 괜찮겠다 싶었다.
"적 대장기를 향해 똑바로 달려간다!"
"장군!"
할렌이 소리쳤다. 안 된다는 뜻이다. 그는 시어문드의 계획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놈이 날 노리고 있다! 목을 코앞까지 들이대주면 더 안달이 나지 않겠느냐!"
"위험합니다!"
"전장에 위험하지 않은 곳이 어디에 있겠는가!"
이전에 벌인 두 차례 전투는 싱거웠다. 첫 번째는 적이 함정에 제대로 빠져버려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풀렸고, 두 번째는 적의 전의가 너무 일찍 꺾여 이렇다 할 싸움도 하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
반면에 지금 이 전투는 군터를 흥분시켰다. 적의 사기는 높고, 지휘관은 어리석지 않다. 이 자리에서 결착을 보지는 않겠으나, 신경 써서 싸워야 할 적임에는 틀림 없다.
두두두!
천 여 기의 기병은 거침 없이 질주했다. 두 군대 사이에 펼쳐진 넓은 땅을 그들은 시원하게 내달렸다.
"옵니다!"
그들이 말을 달리는 사이, 넓게 펼쳐진 적군의 양 날개가 반 이상 접혀졌다. 후방에서 아군이 뒤따르고는 있으나, 기병인 적의 움직임이 조금 더 빨랐다.
"돌파한다."
조금 전처럼 크게 외치는 말이 아니었음에도 그 한 마디는 뒤따르던 이들의 귀에 뚜렷하게 박혔다. 군터의 바로 뒤에 붙어 따르던 기수가 침을 꿀꺽 삼켰다. 원래도 넓었던 상관의 등이 한 층 더 넓어진 듯했다. 착각일지도 모르나, 그의 몸에서 뭔지 모를 희미한 연기 같은 것이 피어 오르는 것 같았다.
'눈에 뭐가 들어갔나?'
때마침 바람이 눈을 할퀸 탓에,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보이던 연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옆으로 살짝 기운 상관의 몸과, 그 위로 피를 뿌리며 날아가는 물체가 보였다. 그것이 사람의 머리라는 것을, 그는 연달아 솟아오르기 시작한 핏줄기를 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호타가르아아아아-!"
천둥이 쳤다. 하마터면 손에 쥔 깃발을 놓칠 뻔한 그는, 조금도 속도를 줄이지 않는 상관의 뒤를 따르기 위해 이를 악 물었다.
크아아악!
사방에서 들려오는 비명. 튀는 피. 모든 것이 죽음을 노래하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그는 무기도 없이 오직 커다란 깃발 하나만을 들고 말을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