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화
'이건 좀 뜻밖이군.'
콰이렌은 적들의 동향을 보고받자마자 그리 생각했다.
그는 두 무리의 적이 합류하여 맞서올 줄 알았다. 상식적으로 흩어져 있는 것보다는 뭉쳐있는 것이 더 싸우는 데 유리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적은 그런 뻔한 방법을 택하지 않았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군. 두 놈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기라도 한 건가?"
"그러게 말입니다. 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어찌 됐든, 놈들이 이렇게 나온다면 우리도 맞춰서 대응해야겠지요."
"전사장!"
콰이렌과 파그니타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막사 마깥에서 전사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전사장. 타칸 연합이라는 국가가 서기 전부터 맡고 있던 그의 직책이다. 콰이렌은 타칸 연합이 무너진 후에도 그리 불리길 원했고, 복수를 위해 군사를 규합했을 때도 다른 호칭 대신 전사장이라 불리길 원했다.
그렇기에, 군영 내에 있는 모든 이들은 그를 전사장이라 불렀다.
"무슨 일이냐."
"적이 움직이고 있습니다. 큰 쪽입니다."
서쪽의 적이 큰 쪽, 남쪽의 적이 작은 쪽이다. 각기 사흘과 나흘 거리에 떨어져 있었는데, 그 중에 큰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보고였다.
'서쪽에 만 삼사천. 남쪽에 오천 가량.'
어떻게 봐도 서쪽의 적에 집중하는 것이 맞다. 거기에 서쪽의 적장은 그 프롱기우스 후작. 반면에 남쪽의 적장은 본 적도 없는 깃발을 달고 있다 했다.
"호타가르아!"
"예 전사장."
"자네에게 오천을 맡기겠다. 내가 전사들을 이끌고 서쪽의 적을 격퇴할 때까지 남쪽의 적을 상대하라."
"예."
단단한 체구와 인상의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
"프롱기우스 각하의 군대가 움직이니 적들 역시 그에 맞추어 병력을 나누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자네가 예측한 대로군."
군터의 시선이 시어문드에게 향했다.
"예. 적장은 오만합니다. 최근의 승리가 그에게 자신감을 안겨준 것일 수도 있겠지요. 아니며 본래 성미가 그런 것일 수도 있겠고 말입니다. 아무튼 중요한 건, 적장의 생각을 알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서 끝을 볼 생각이겠지."
"예. 이미 승리가 손 위로 올라왔다고 여기고 있겠지요."
프롱기우스 후작과 파르네토 후작의 군대가 병력 구성이 어찌 되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아마 보군의 비율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적군은 대다수가 기병.
이미 마주친 이상 떨쳐낼 수는 없다. 일전을 벌이고 결과를 내기 전까지, 등을 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을 적장도 알고 있다. 이쪽이 물러설 생각이 없다는 것도 역시 알고 있을 것이고.
"프롱기우스 각하께서 적장의 시선을 붙잡아주실 겁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의 일을 해내야 합니다."
"확신하나? 아직 아무것도 확실해진 건 없네."
"확신합니다."
"어떻게?"
"프롱기우스 각하의 병력이 우리의 세 배입니다. 적의 대장은 당연히 그쪽으로 움직이겠지요. 그는 서쪽의 군대만 정리하면 우리는 쉽게 치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할 겁니다. 즉, 대수롭지 않게 여길 거라는 거지요."
자존심이 상하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겉으로 보이는 병력의 규모만 세 배라면, 누구라도 이쪽을 젖혀두고 볼 테니까.
"전력을 집중시켜서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승부를 보려 할 겁니다. 그러니 자연히, 그 동안 우리를 붙잡아 둘 병력은 그의 입장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이들일 가능성이 매우 크지요. 우리를 이길 필요도 없고, 그저 대치나 하면서 시간만 벌기를 바랄 겁니다."
"두고 보면 알겠지. 혹 자네의 추측이 빗나간다면, 그때는……."
삼킨 뒷말이 무엇인지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 모두가 다 알았다. 시어문드도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적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포로들을 미리 대기시키게."
"옛."
앞선 두 번의 전투에서 군터는 포로를 거의 잡지 않았다. 직접 적을 모두 죽이라 몇 번이나 명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운 좋게 목숨을 부지한 이들이 없지는 않았다. 정말로 운이 좋아서든, 필요에 의해서든 죽음을 피한 수십 명의 포로들이 군영 내에 존재했다.
군터는 그들을 불렀고, 그들은 군터의 기대대로 적들이 다가왔을 때 흔들리는 깃발을 보며 적의 지휘관이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
"뷔아르 부족의 깃발입니다. 군대를 이끌고 있는 건 뷔아의 족장 호타가르아일 겁니다."
살려둔 보람이 있었다. 적장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쓸만한 정보가 술술 흘러나왔다.
그 중에서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뷔아르라는 부족이 연합군(적들은 자신들을 그리 부른다고 했다) 내에서 그리 인정 받는 이들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전사장을 중심으로 한, 구 타칸 연합의 핵심 부족에 포함이 되지 않는 이들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 전사장이 군대를 모을 때도 뒤늦게 합류했다고 했다.
"어떤가?"
군터는 포로로부터 정보를 들은 뒤, 시어문드에게 물었다.
"자네가 바라던 자인가?"
"예.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상대입니다. 조금 전 그 놈은 뒤늦게 합류했다 했지만, 아마 실상은 그게 아니겠지요. 합류를 한 게 아니라, 당한 걸 겁니다."
자발적으로 합류할 동기가 있었다면 굳이 뒤늦게 합류할 이유가 없다. 빨리 달려가면 달려갈수록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크게 낼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고 시간만 죽이다 뒤늦게 합류했다면…콰이렌이라는 놈의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억지로 끌려왔다고 추측해볼 수 있지 않겠는가.
"한 번 설득을 해볼만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글쎄. 직접 봐야 알겠군."
군터는 말에 올라 대열을 빠져 나왔다. 그리고 홀로, 천천히 앞으로 말을 몰았다. 길게 늘어선 적군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왔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큼지막한 깃발과, 그 아래 정오의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한 사내의 모습도.
'호타가르아.'
직감했다. 저 사내가 바로 적장, 호타가르아일 것이다.
"뷔아르의 호타가르아-! 거기에 있나?!"
사람의 목에서 나왔다고 믿기 힘든 쩌렁쩌렁한 소리가 긴장감 가득한 전장을 흔들었다. 외침과 동시에, 군터가 보고 있던 사내의 표정이 급변했다. 얼핏 보기에 조금 당황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싸워야 할 상대의 얼굴 정도는 볼 수 있지 않겠나! 어떤가?! 난 혼자다! 해도 뜨거운데 잠깐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나 나누어 봄이 어떠한가-!"
당연히, 이것은 때 아닌 친선의 의미가 아니었다. 전투를 앞에 두고 대장들끼리 한가롭게 이야기나 나눈다? 그런 웃기지도 않은 이야기는 허무맹랑한 영웅담에서나 나올 법한 것이다.
이건 도발이다. 군터는 홀로 앞에 나섰다. 여기에는 그 어떤 함정도 없다. 양측 각각 수천 쌍의 눈이 그것을 확인했다.
"설마 겁을 먹었나?! 그렇다면 호위를 대동해도 좋다! 한 스무 명 정도면 되겠군! 부족하다면 백 명을 데리고 와도 좋다!"
여기까지였다.
호타가르아의 인상이 일그러졌고, 그는 군터가 그랬듯 말을 타고 홀로 달려 나왔다.
그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멈춰 섰다. 두 사람은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마주보았다.
"초원인인가?"
"그래. 초원에서 태어났다."
"난 네 이름을 모르는데, 너는 내 이름을 어찌 알지?"
"내 군영에 있는 네 동료들이 네 깃발을 알아보았다. 그들이 내게 알려주더군."
"…내 동료라고?"
호타가르아는 잠깐 생각에 잠긴 듯했다. 그 사이 군터는 그를 훑어보았다. 멀리서 볼 때와는 달리, 가까이서 보니 그에 대한 느낌이 확실히 뚜렷해졌다.
쓸만한 무인이다. 눈에 확 들어올 정도는 아니지만, 나름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질 만하다 느껴졌다. 나이는 서른 후반 정도? 무공 뿐 아니라, 은은하게 느껴지는 완숙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다.
"배신자가 있었군."
"배신?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애초에 전쟁에 끼고 싶어서 낀 것도 아니던데 말이지."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나."
"잘 생각하란 말이다. 원치 않는 전쟁에서 목숨을 잃는다면 그건 개죽음이다."
"네놈들이 이길 것 같나?"
"물론."
호타가르아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오만하기 짝이 없군. 내일이면 네놈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하고 있을 거다."
"그럴 일은 없다. 겁쟁이 앞에서 무릎을 꿇을 일은 더더욱 없지."
"겁쟁이라고?"
"그래.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놈을 두려워해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는데, 그게 겁쟁이가 아니면 뭔가?"
"미친놈이었군."
"조금은 솔직해져 보는 게 어떤가. 지금은 살려 보내줄 테니, 돌아가서 잘 생각해보도록. 강제로 내 앞에 무릎을 꿇게 된 뒤에는 뒤늦게 말을 바꾼다 해도 소용이 없으니."
"말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배신자. 지금 이 자리에서 네 목을 베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오. 그럼 한 번 해보지 그러나. 겁쟁이 자식아."
군터는 어쩌면 자신에게 숨겨진 재능이 있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가 덤덤하게 한 마디를 뱉자마자 호타가르아가 칼을 뽑아 덤벼들었다.
휘잉!
베어오는 칼을 간단히 피하고 칼을 쥔 손을 움켜잡았다. 호타가르아가 빠져나가려 힘을 줬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밑에서는 말들끼리 몸을 부딪치며 힘 싸움을 했으나 한 쪽으로 우위가 넘어가지 않았고, 그 위에서 군터는 여유롭게 호타가르아를 보았다.
"으윽!"
군터의 우악스런 힘은 호타가르아의 입에서 신음이 흐르게 만들었다. 손목을 으스러뜨릴 듯이 쥐고 있으니 호타가르아는 꼼짝도 못하고 몸을 떨었다.
"이제 알겠나? 난 지금 당장 네 목을 꺾어버릴 수도 있다."
"크으! 그렇다면 왜 당장 내 목을 꺾어버리지 않나?"
제압당한 와중에도 호타가르아의 눈에 붙은 불은 꺼지지 않았다. 군터는 그의 눈빛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흘러나오는 신음이 한층 더 굵어졌다.
"너와 네 부족 전사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함이다. 너희가 원해서 이 전쟁에 끼어든 게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고."
"으음……!"
"무의미한 피는 흘리고 싶지 않다. 이 전쟁에서 빠져라. 원한다면 베이고르의 관직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고, 원치 않는다면 몸 성히 초원으로 돌려보내주마."
"……."
양측에서 병사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멀리서 보기에는 한바탕 붙은 것으로 보였을 테니까.
"시간을 주마. 한 번 잘 생각해봐라."
군터가 대뜸 손목을 쥔 채로 호타가르아를 휘둘렀다. 조약돌처럼 날아간 호타가르아가 위태롭게 땅을 뒹굴었다.
슈슝!
달려오던 초원 전사들이 활을 쏴댔다. 군터는 그에 못 이기는 척 말머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