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8화
붉은 도시에 하얀 눈이 내렸다.
불길은 여전히 성과 집, 도시 내의 갖은 것들을 태우고 있는데 그 위로 하얀 것들이 내려앉아 사라져갔다.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나, 아름다웠다. 어쩌면 그 아름답다는 생각은 눈이 아니라 가슴 속 깊은 곳에서 흘러나왔는지도 모른다.
'이제 시작이다.'
콰이렌은 자신의 감정을 조절했다. 들뜨면 안 된다. 이제 겨우 하나를 끝냈을 뿐이다. 아직 남은 것이 한참이다. 여전히 무수한 배신자들이 저 남쪽 어딘가에서 숨쉬고 있다. 그것들의 숨통을 모두 끊어놓기 전까지는 만족할 수 없고, 만족해서도 안 된다.
"구노르들은 어떻습니까?"
거대한 체구의 노인. 그러나 근육질의 우람한 몸하며 쩌렁쩌렁한 목소리까지, 주름진 얼굴과 눈 같은 백발을 빼고 보면 전혀 노인 같지 않은 설족의 족장 파그니타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아. 두 마리를 잃었어. 한 마리도 곧 더 잃게 될 것 같고."
"…그렇습니까."
안 좋은 소식이다. 얼어붙은 땅에서 끌고 내려온 구노르는 그들이 보유한 최고의 무기. 이제까지의 공성전은 모두 녀석들의 힘을 빌려 치러왔다.
끌고 내려온 구노르는 총 다섯 마리였는데, 그 중 세 두 마리가 브라노스를 함락시키는 과정에서 죽어버렸다. 그리고 크게 상처 입은 나머지 한 마리도 곧 잃게 될 거라고 한다.
"힘든 싸움이었어. 그리 강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정말 지독하게 싸우더군."
"그 또한 강함입니다. 놈들의 힘이지요."
"뭐, 그도 그렇군."
평생을 얼음과 눈으로 덮인 땅에서 살아온 그에겐 생소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가 살던 세상은 모든 것이 간단명료, 깔끔한 곳이니까. 이런 구질구질한 진흙탕 싸움을 해본 적은 없었을 터.
"적어도 배나시드를 치기 전까지는 구노르들이 버텨줬으면 좋겠군요."
"더위가 문제야. 이놈들이 점점 더 힘을 잃어가고 있어."
힘을 잃어간다라……. 콰이렌은 슬쩍 고개를 돌렸다.
세 마리 거대한 짐승이 수십 명이 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 모두가 설족으로, 구노르들을 전담하여 관리하는 이들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새하얀 털이 뭉친 것 같은 형상이다. 무척이나 거대한 눈덩이 같기도 하다. 굵은 네 발은 왕궁의 석조 기둥과 같고, 목이 거의 없이 몸과 가까이 달라 붙은 큼지막한 머리통은 둔기의 끝부분과 닮았다.
구노르들은 그들의 조심스럽고도 극진한 보살핌을 느긋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중 한 마리는 힘 없이 쓰러져서 끙끙거리고 있었는데, 파그니타의 말처럼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큰일이군요. 아직은 갈 길이 먼데, 한 마리를 더 잃는다면 두 마리만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그리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저기 저놈이 대장 놈이거든."
파그니타가 손가락을 뻗어 한 마리를 가리켰다. 구노르들 중에서도 덩치가 큰 편인 수놈이었다.
"구노르들 중에서도 저놈은 특별하지. 다른 놈은 몰라도, 저놈은 끝까지 버틸 것이야. 힘도 힘이지만, 명줄이 아주 질긴 놈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럼. 저 녀석을 포획하는 데 사내가 서른이 넘게 죽고 다쳤어. 더 기가 막힌 게 뭔 줄 아나? 그때 그리 흉포했던 녀석이 채 다 자라지도 않은 놈이었다는 거야."
"그렇군요."
"자네는 사람이 너무 재미가 없어. 뭐 맞장구 쳐주는 맛이 있어야지."
"죄송합니다."
"됐네 됐어. 말해봐야 뭐하겠나. 그나저나 이제부터의 계획은 뭐지? 이대로 남하하나?"
"그러고 싶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당장은 힘들 것 같습니다."
"내 애초에 그 어중이떠중이들을 믿지 말라 하지 않았나."
믿어서 남긴 게 아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놈들이라 시간이라도 끌라고 남긴 것이었다. 설마 그런 간단한 일조차도 제대로 못할 줄은 몰랐지만. 그런 면에서 본다면 파그니타의 말처럼 그들을 믿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쓸모 없는 놈들 같으니.'
불편한 속내를 숨기며, 콰이렌은 짐짓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어르신의 말씀이 옳습니다. 허나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찌하겠습니까. 적들이 다가오고 있으니, 놈들을 먼저 상대한 후에 남하해야 할 것 같습니다."
"놈들이 감히 덤벼들겠나? 우리가 얼간이 놈들의 패전 소식을 들은 것처럼, 놈들도 북부군이라는 놈들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텐데. 겁이나 잔뜩 집어먹고 성벽 뒤에 숨어 성문을 걸어 잠그겠지."
"아니요. 놈들은 그러지 못할 겁니다."
"어째서?"
"놈들이 그리 나온다면 우리는 곧장 놈들의 수도를 칠 테니까요. 놈들이 성문을 닫아걸고 숨고 싶어도, 놈들의 왕이 그걸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흉터투성이의 얼굴에 살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
시어문드의 말은 맞았다. 그가 말한 것처럼 전세가 바뀌었다. 비록 그가 예측한 방향대로는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바뀌긴 바뀌었다.
"송구합니다. 설마 그새를 버티지 못할 줄은 몰랐습니다."
시어문드는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차라리 다른 분들의 말씀처럼 무리를 해서라도 브라노스로 진군했어야 했을지도……."
"아니. 그래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을 거네. 도리어 우리까지 북부군과 함께 무너졌을지도 모르지."
그도 짐작하는 것을 시어문드가 몰라서 이런 말을 했으리라고는 보지 않았다. 단지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지휘관들에게 면피를 하기 위해 꺼낸 말이었겠지. 그걸 알면서도 군터는 그와 어울려주었다.
한 번 빗나갔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에서는 여전히 시어문드가 가장 현명했다.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도 그의 입에 자물쇠가 채워져서는 곤란했다.
"북부군이 어느 정도로 타격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적어도 당분간은 없는 셈으로 쳐야겠지."
"그럴 겁니다. 듣자 하니 칸디시아렌 공작 각하의 행방은 물론, 생사마저 알 길이 없다고 하니……."
브라노스가 무너졌다고 해서 북부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아직 전란에 휩쓸리지 않은 몇 개 영지가 있었고, 그곳에는 얼마의 병력도 남아 있을 터였다.
허나 그들을 움직일 수 있는 영주들이 브라노스에 있다가 덩달아 행방이 묘연해졌고, 결정적으로 그들을 한 데 모을 수 있는 칸디시아렌 공작이 사라졌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적의 말발굽이 자신들의 땅에 찍히지 않기를 기도하며 성문을 닫아거는 것뿐이리라.
"다행스러운 점은 프롱기우스 각하와 파르네토 각하의 군대가 합류하였고, 승전을 거뒀다는 겁니다. 그쪽과 합류한다면 어떻게든 적을 막아 세울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힌키우스의 지휘관 루비오의 말이었다. 그의 말에 다른 지휘관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군터 역시 그런 생각을 했다. 현재 상황에서 가장 무난한 방법이다. 강대한 적에 맞서 흩어져 있는 것은 좋지 않다. 그렇다면 일단 삼군이 뭉쳐서 대응하는 편이 효과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시어문드는 생각이 다른 듯, 홀로 고개를 저었다.
"제 생각은 다릅니다. 물론 그쪽에 가서 합류를 한다면 적에 맞서 싸울 때 보다 낫겠지요. 허나, 지금 우리는 적과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싸워서는 안 된다? 그게 무슨 소리요? 우리는 저들과 싸우러 온 것이지 않소."
"제 말은, 지금 당장 적과 싸워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적들의 기세는 최고조에 이르러 있고, 아군의 기세는 꺾여 있습니다. 싸운다면 항상 만전의 상태여야 하는데, 지금의 상황을 놓고 보면 적은 만전인 반면 아군은 그렇지가 못합니다."
"어떻게 항상 만전인 상태에서 싸울 수 있겠소? 전황은 살아있는 생물처럼 시시각각 변하는데 말이오. 시기에 맞추려다가는 정작 싸워야 할 때를 놓치고 더 안 좋은 지경에 몰릴 수도 있소이다."
"그러니 늦지 않게, 그런 상황을 만들어야지요."
네 지휘관과 시어문드의 의견 대립이 격화될 것 같자 군터가 끼어들었다.
"그 상황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나?"
"먼저 북부 영지들의 군사를 끌어 모아 적의 후방을 노리도록 할 수 있겠지요."
"어렵지 않겠나. 그들은 이미 그들의 영주를 잃었고, 북부군이 패한 것을 보았으니 단단히 움츠러들 텐데."
"어렵겠지요. 하지만 그렇더라도 해야만 합니다."
"…좋아.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다음도 있나?"
"예. 일찍이 장군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저들은 하나의 군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음?"
"중심을 이루는 구 타칸 연합의 무리가 다른 초원 부족들을 반 강제적으로 끌고 나왔지요. 그들은 이번 전쟁에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그것을 타칸 연합의 무리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일찍이 시간을 벌기 위한 방패막이로 썼던 겁니다."
"그래. 그렇지. 그래서 자네의 말은……."
"그들의 사이를 벌리고, 나아가 갈라서게 해야 합니다. 그리 할 수만 있다면 적의 전력은 크게 줄어들 것이니, 상황이 지금보다 훨씬 더 나아지겠지요."
"자네의 말이 다 옳은 것 같네. 하지만 가능하겠나?"
모든 계획은 다 그럴듯하다. 문제는 그 그럴듯한 계획이 실현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북부의 영지들을 나서게 한다는 것도 그렇고, 적들을 분열시킨다는 것도 그렇고,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들 뿐이다.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군터는 시어문드를 물끄러미 보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동안 그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작은 고갯짓으로 허락을 표했다.
*
프롱기우스 후작은 북부군이 패퇴하고 브라노스가 무너졌다는 소식을 접한 순간부터 지끈거리는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가 그렸던 전황이 어그러지면서 모든 것을 새롭게 짜야 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의 눈 밑에는 짙은 그늘이 졌고, 원래도 희던 안색은 더욱 창백해졌다.
그러던 중에, 동부군으로부터 전령이 당도했다. 브라노스를 무너뜨린 적들이 서진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온 후였다.
"……."
그는 전령이 전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내용은 이미 읽었으나 그는 다 읽고 나서 한동안 서신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뭘 그리 뚫어져라 보고 있소? 나도 좀 봅시다."
"흐음. 흥미롭군."
"뭐가 말이오?"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신을 받아 든 파르네토 후작은 곧 인상을 찡그렸다.
"말은 좋은데, 이게 과연 가능하겠소? 내 생각엔 합류할 시기만 놓쳐서 더 어려움을 겪게 될 것 같은데?"
"물론 쉽지는 않을 거요."
"그대는 이 이야기에 찬성하는군. 어째서요? 이 서신의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하게 좋아 보이나, 조금만 생각을 해보면 허무맹랑한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소. "
"그대는 그리 생각하시오?"
"물론."
"초원 출신으로서의 생각인가?"
"그렇소. 듣자 하니 지금 적군의 대장은 콰이렌인 모양인데, 그 자는 대족장이 부리던 측근 중의 측근으로, 전사장의 지위에 있던 자요. 이쪽의 말로 풀자면 호위대장 같은 역할이라 보면 되겠지."
그 말에 프롱기우스 후작이 반색했다.
"호위대장? 호위를 맡던 이가 군대를 이끌고 있는 거요? 그거 잘됐군."
"…그게 무슨 소리요?"
"그 자가 호위대장이었다면 소규모의 호위대를 이끄는 데는 능할지 몰라도, 수천 이상의 대군을 이끄는 것은 아무래도 서툴지 않겠소? 그리고 군심(軍心)을 읽는 데는 그보다도 더 미숙하겠지. 이 허무맹랑한 계책이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더 올라간 것 같군."
"후작. 정말로……."
"내가 겪어본 바로는 말이오."
프롱기우스 후작은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한 파르네토 후작의 말을 잘랐다.
"싸움이란 건, 흐름이라는 게 있소. 그리고 이 흐름이라는 놈은 판을 따라 움직이지. 판이 놓여져 있는 대로 흐른다 이 말이오. 이 흐름에 한 번 휩쓸리면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소.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지."
이마에 닿아있던 손이 내려갔다. 요 며칠 동안 줄곧 그를 괴롭히던 두통이 지금 싹 가셨다.
"만약 놓여있는 상황이 좋다면, 그대로 흐름에 순응하면 되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흐름이라는 놈을 바꿔야 할 필요가 있소. 그러기 위해서는…먼저, 이 판이라는 놈부터 흔들어놓아야 하는 거지."
그가 손을 내밀었다. 파르네토 후작이 손에 쥐고 있던 서신을 도로 건넸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구겨진 서신을 펴며 말을 이었다.
"그를 위해서는 평범하고, 무난한 방법으로는 안 되오. 과감한 한 방이 필요하지. 소위 말하는 기책이라는 놈이 필요한 거요. 이를 테면 이런 거."
그가 손가락으로 서신을 툭툭 쳤다.
"이런 것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