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시어문드의 말처럼, 산성에는 군량을 비롯한 물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리 많은 양은 아니었는데, 이로 미루어 보아 이들은 이곳에서 그리 오래 머물 생각은 아니었던 듯했다. 심문한 포로들도 그런 이야기를 했다.
"아는 것이 별로 없더군요. 잔챙이들이었습니다. 시간벌이용 밖에 되지 않는……."
약간 손을 쓰기만 했는데 술술 불었다고 했다. 너무 쉬워서 거짓 진술은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였는데 그런 것은 아니었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정보랍시고 분 것들이 그리 대단치 않았다. 정보다운 정보라 할 만한 것은 공성병기의 정체. 거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미지의 적이었던 설족들에 대한 자질구레한 몇 가지 정도. 그나마 이것들을 제외하면 들으나 마나 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무튼 이게 첫 번째 이유고 두 번째 이유는.
"이놈들, 대부분은 억지로 끌려온 놈들이었습니다."
복수전을 외치며 들고 일어섰다지만, 모두가 그 뜻에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콰이렌'이라는 이름의, 전사한 대족장의 심복 출신 전사가 설족을 끌어들여 전쟁에 동참할 것을 거의 강제했다고 한다.
따르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따른 자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곳에 남은 이들 중 상당수도 거기에 속했던 것이고.
"말 그대로 시간벌이용이군."
"주 전력은 북부군을 치는 쪽으로 빠졌던 거지요."
남쪽에서 오는 원군을 막을 수 있으면 좋고, 그러지 못해도 시간은 벌 수 있으니 되었다는 거다.
포로들을 심문하여 얻은 정보를 취합하는 중에 본대가 당도했다. 군터는 피로 물든 산성에서 곧장 지휘관 회의를 열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입은 피해부터 말씀 올리겠습니다. 전사자가 칠백 육십. 경상을 뺀 부상자가 사백 서른 일곱입니다. 이 중에 삼분지 일 가량은 제때 복귀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담담하게 보고를 듣지만, 속으로는 꽤나 입맛이 썼다. 대충 천 정도의 병력을 잃은 것이다. 대승을 거뒀다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대승이 맞기는 하지만 피해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군영에 남아 미끼 역할을 했던 병사들이 많이 상했다. 그들의 피를 대가로 승리를 거머쥘 수 있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지만, 손실은 뼈아프군."
"말씀하신 것처럼, 어쩔 수 없는 손실이었습니다. 육천의 적을 섬멸하는 대가로는 싸게 먹힌 것이지요."
오천인 줄 알았던 적은 육천이 조금 넘는 수였다. 야습을 가해왔던 적이 사천에다가 산성에 남아있던 적이 이천 가량이었다.
"산성은 보잘것없으나 지대가 좋아 공략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정말 대단하십니다."
"되었소. 싸울 의지도 없는 오합지졸들에 불과했으니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오. 그보다…내 포로를 심문하여 알아낸 것이 몇 가지 있소."
군터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포로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공유했다.
"… 얻을 수 있었던 정보는 대강 이 정도요."
반응은 상당했다.
"이거 큰일이군요."
"이럴 것이 아니라, 속히 브라노스로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안 됩니다."
슬슬 회의장에 열이 오르려던 순간에 시어문드가 찬물을 뿌렸다. 지휘관들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지금 여기서 바로 움직이는 것은 무리입니다. 병사들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더 이상은 행군도 어렵습니다. 병사들에게는 휴식이 필요합니다. 게다가…브라노스의 상황이 그리 나쁘지만은 않을 겁니다."
"그건 상당히 위험한 추측 아니오? 자칫 북부군이 무너지거나,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는다면 전쟁은 지금보다 더욱 힘들어질 거요."
아모트의 지휘관, 오로보르가 시어문드의 말을 반박했다.
"브라노스를 향해 진군한 적들도 이곳의 소식을 알게 될 겁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무너진 방어선에 어느 정도는 당황을 하겠지요. 후방의 위험을 신경을 쓸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브라노스를 향한 공세도……."
군터가 입을 열었다.
" 위축이 될 거란 뜻이군. 어느 정도는…말이지."
"그렇습니다. 지금부터 느릿느릿 움직여서 녹초가 되어 전장에 도착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지금이야말로 숨을 고를 때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는 전세가 뒤바뀝니다. 따라서 우리도 그에 맞게 움직여야 합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인가?"
전세가 뒤바뀌다니? 고개를 갸웃거리는 것은 군터만이 아니었다.
*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찌른다.
평야에는 시신이 즐비하고, 부러진 깃발과 쓰러진 말들이 구슬피 울부짖었다.
"파르네토 후작. 이렇게 반가울 때가."
프롱기우스 후작이 두 팔을 벌리며 한 사내를 맞이했다.
"내가 반가운 것이오 내가 이끌고 온 군대가 반가운 것이오?"
"둘이 다르지 않은데 구분이 필요하오?"
둘은 서로 마주칠 일이 없는 사이였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자신의 영지에서 두문불출하는 보기 드문 고위 귀족이었고, 파르네토 후작은 초원 부족장 출신 전향자로서 국왕이 자신의 정치적 입지 강화를 위해 조정에서 여러모로 써먹고 있는 패였으니.
이렇듯 둘은 속한 정치 세력도 다르고, 마주칠 기회도 없었기에 서로의 이름과 얼굴 정도만 아는 사이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래 전에 헤어진 절친한 친우를 만난 것처럼 서로에게 환한 웃음을 지었다.
"어려울 때 잘 와주셨소."
"더 일찍 오지 못해서 미안하오.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둘렀으나……."
"아니오. 딱 적절할 때 오셨소. 대치가 길어지면서 적들이 적당히 늘어져 있었지. 덕분에 이리 승리를 거두지 않았소이까."
"그대의 지시에 따랐을 뿐."
"지시라니. 부탁이라고 해둡시다."
무슨 말로 둘러대든 그를 보는 파르네토 후작의 눈은 변하지 않았다.
'익히 이름은 들었지만, 실로 대단한 자다.'
서신에 적힌 그의 말대로 움직였을 뿐이다. 잘못 되었을 때의 책임을 지겠다는 말에 기대어 그대로 따르면서도 의구심은 사라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그의 말대로 됐다. 적들은 그가 예측한 그대로 움직였고, 그가 예측한 곳에서 싸움이 벌어졌으며, 크게 승리했다. 그 모든 일들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게 일어났고, 파르네토 후작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느낌까지 받았다.
그 또한 베이고르의 영주가 되기 전에는 초원에서 하나의 부족을 이끌며 크고 작은 싸움을 여러 번 겪은 바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식의 싸움은 경험해 적이 없었다.
"이제 어찌해야 하겠소?"
그는 자연스럽게 그리 물었다. 왕명을 받들고 일군을 이끌고 나온 지휘관인 그가 동등한 지위에 있는 프롱기우스 후작에게 의견을 구한 것이다.
"브라노스로 가야지요. 북부군이 공격을 받고 있소. 자잘한 병력으로 원군을 묶어두고 본대는 브라노스를 공략하고 있지."
"자잘한?"
그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파르네토 후작. 프롱기우스 후작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고작 이 정도의 적에게 북부가 흔들렸을 리 없지 않겠소? 적의 본대는 북부군과 대전을 벌이고 있는 중이오. 서둘러 움직이지 않는다면 북부군은 결국 패할 것이고, 그리 되면 저들의 창 끝은 더 아래를 향하게 되겠지.."
그리하여 두 후작의 군대는 브라노스를 향해 동진을 개시했다. 그런데 그렇게 움직이기 시작한 지 사흘 째 되던 날에 급보가 날아들었다.
"장군! 동부군이 빌닝스 부근에서 적의 6천 군세를 격파하였다 합니다!"
승전보를 전하는 병사의 목소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프롱기우스 후작은 그 보고에 보고 있던 지도를 내려놓으며 턱수염을 긁었다.
"지금 소식이 닿았다면 못해도 엿새 전이라는 뜻인데…이건 생각한 것보다도 더 빠르군. 동부군의 지휘관은 누구라더냐?"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 경이라 합니다."
"기사?"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파르네토 후작이 코웃음 쳤다.
"코누디스 자작 그 자가 죽을병이라도 걸린 모양이군. 본인이 나서지 못하겠거든 다른 영주에게 맡길 것이지, 자기 휘하의 기사를 지휘관으로 삼아? 이거야 원."
사실 동부가 힘을 모아 군대를 마련했으니, 거기에 누구를 지휘관으로 삼든 그건 그들의 마음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의 격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기사라니? '장군'이라 불리는 이가 고작 일개 기사에 불과하다면, 똑같이 '장군'이라 불리는 이쪽은 뭐가 되겠는가?
"흐음."
"어찌 생각하시오?"
파르네토 후작이 프롱기우스 후작에게 물었다. 그는 뭘 생각하고 있는지 허공을 쳐다보며 연신 천천히 수염만 쓰다듬고 있었다.
"뭘 말이오?"
"다 듣지 않았소? 코누디스 자작의 기사가 장군 행세를 하고 있다는 말 말이지."
"아아. 그거 말인가. 나는 별 생각 없소."
"음?"
"기사가 장군이 되든 영주가 장군이 되든, 잘 싸우기만 하면 되는 일 아니겠소? 그가 뭐 무능한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고, 오히려 승전을 했다는데 못마땅할 것이 뭐요?"
"그건 그렇지만……."
옳은 말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이성으로는 이해를 하는데, 감정이 납득을 못했다. 코누디스 자작이, 동부가 너무 오만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내가 코누디스 자작을 조금 아는데, 멍청한 짓을 저지를 자는 아니오. 특히 지금같이 국가적으로 중차대한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는 더더욱."
"크음. 뭐 후작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내 더 뭐라 말을 하겠소이까."
"아무튼 이렇게 되면 전황이 바뀌겠군."
"전황이 바뀌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보시오. 짧게 잡아 닷새 전에 빌닝스에서 전투가 있었다면 동부군은 브라노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까지 나아갔을 것이오. 이리 되면 아직 브라노스가 무너지지 않았다는 전제 하에, 적들은 앞뒤로 적을 두게 되지. 거기에 우리까지 있으니……."
프롱기우스 후작은 브라노스를 중심으로 네 개의 나무조각을 올려놓았다. 파르네토 후작은 그 각각의 조각이 군대를 의미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보시오. 이리 보니 흡사 적이 아군에게 포위된 것 같지 않소?"
"…그렇구려."
"상황이 재미있어졌소이다."
프롱기우스 후작이 씩 웃으며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채 이틀을 가지 못했다. 이틀 후, 해가 뜨기도 전에 당도한 또 하나의 급보 때문이었다.
"장군! 장구운!"
"무슨 일이냐?!"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다급함에 프롱기우스 후작은 제대로 뜨지도 못한 눈을 비비며 전령을 맞았다.
사력을 다해 말을 달려온 티가 나는, 추레한 몰골의 전령은 그의 앞에서 쓰러지다시피 무릎을 꿇었다.
"브, 브라노스가…브라노스가 적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
"북부군은 크게 패하여 패퇴하였고, 영주성은 함락되었으며…칸디시아렌 공작 각하와 북부 영주님들의 소식은 모두 끊어져 알 길이 없습니다!"
비틀거리던 프롱기우스 후작이 그대로 주저앉았다.
전령의 울먹이는 소리와 여기저기서 급하게 들리는 고함소리. 그리고 프롱기우스 백작의 간헐적인 한숨만이 아무도 말하지 않는 막사를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