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6화
전후에서 적을 상대하게 된 적군은 쉽게 무너져 내렸다. 군터가 적들이 혼란에 빠진 틈을 타 단기로 돌진하여 적 지휘관의 목을 베어버린 순간, 사기가 바닥을 찍은 적들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다.
그들의 우수한 기동력이 이번에는 독이 되었다. 한 번 흩어지고, 대열이 무너지기 시작하니 그 속도가 겉잡을 수 없이 빨랐다.
"추격하라!"
그렇게 흩어지는 적들을 군터는 그냥 보내지 않았다. 추격을 명하고서 그부터 말을 달려 적을 쫓으니, 친위대 병사들도 사기가 충만하여 적들의 꼬리를 물었다. 그렇게 붙잡아 죽이 적의 수가 근 사백에 이르렀다.
"대승! 대승입니다 장군!"
칼리온의 들뜬 목소리가 아니더라도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그것을 알고, 아니 느끼고 있었다. 주변을 돌아보니 보이는 것이 전부 아군이고 바닥에 누운 것이 대부분 적군인데, 대승임을 알지 못한다면 그 자는 필시 장님이거나 그에 준하는 눈을 가진 이일 것이다.
"시기 적절하게 와 주었소."
"하하. 별 말씀을. 제게 내려온 지시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렇다 해도 그대의 칼이 나와 내 병사들을 크게 도운 건 사실이지. 이곳의 수급 중 삼분지 일을 내어주겠소."
"저, 정말이십니까?"
놀라서 눈이 크게 뜨일 만하다. 이 자리에서 전사한 적군의 수가 못해도 천은 되어 보이는데 그 중 삼분지 일이니 삼백 이상이다. 전투에서 거둘 수 있는 것 중 전공보다 가치 있는 것은 없고, 전공의 상징은 바로 적의 수급이다.
"허언은 하지 않소."
군터는 눈이 동그래져서 연신 감사를 외치는 칼리온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전투는 끝났으나 병사들의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살아남은 적들을 끌어내고, 죽지 않은 채 누워 있는 적들의 숨을 끊는다. 근 수 년간 보지 못했으나 그럼에도 익숙한 광경의 반복이다.
"장군."
주변을 걸으며 병사들의 어깨라도 두드려주고 있는데, 시어문드가 말을 몰고 다가왔다. 피투성이가 된 군터에 비해 비교적 말끔한 모습이었다. 이번 전투에서 그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싸우지는 않았으리라.
허나 그렇다고 해서 이번 전투에서 그의 공이 작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어쩌면 그의 공이 가장 클지도 모른다.
"고생했소."
"고생은요. 장군에 비하면 놀고 먹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그가 한 일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세 개의 기습부대와 군영에 머물던 미끼부대까지. 전투가 일어나는 동안 동시에 네 개의 부대를 살피면서 지시를 내려야 했으니까. 단적으로, 마지막에 칼리온의 부대를 움직여 적의 배후를 치지 않았다면 군터의 부대는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겸손이 지나치군. 이곳에서 거둔 수급 중 삼분지 일은 그대의 것이오."
"제가 사양할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십니다."
역시 여유가 있다. 어쩌면 저 여유로움은 침착함보다 윗줄에 자리한 마음의 경지인지도 모른다.
"그보다, 곧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추격을 말하는 거요? 이미 늦었소. 잡을 수 있는 놈들은 다 잡았으니까. 거기서도 도망친 놈들은 이미 따라잡기에는 너무 멀리 가 있겠지."
"아니요. 추격을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음?"
"적들의 본거지 말입니다."
"산성을 말하는 건가."
"그곳에는 잔당은 물론, 비축되어 있는 물자가 있을 겁니다. 취하는 편이 좋지 않겠습니까."
"물론 그렇겠지."
"바로 가야 합니다. 도망친 적들이 소식을 전하면 어떤 식으로든 움직임을 보일 겁니다. 각오를 단단히 하고 방비를 굳히든지, 아니면 산성을 버리고 퇴각을 하든지. 어느 쪽이든 우리 쪽의 입장에서는 좋지 않지요."
"옳은 말이오. 허면 바로 출발해야겠군."
"예? 설마 직접 가려 하십니까?"
"당연히."
쉬라고 풀어두었던 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시어문드가 따라 붙으며 그를 만류했다.
"장군. 거듭 말씀 드리지만, 자중하셔야 합니다. 장군께 일이 생기는 순간 아군은……."
"난 변하지 못하니, 그대가 적응하시오. 그리고, 힘이 남는 이들이 움직이는 게 맞지 않겠소?"
군터와 그의 친위대는 가장 크게 싸웠음에도 가장 힘이 넘쳤다. 사상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그 수 또한 다른 부대들에 비하면 적었고.
"장군……."
시어문드는 군터가 고집을 꺾지 않을 것을 알아차렸는지 더 설득하길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면 하나만 명심해주십시오. 아닐 것이라 생각하지만, 뜻밖에 산성에 남은 적들의 규모가 클 경우에는 지체 없이 돌아오셔야 합니다."
"그리 하리다."
군터는 곧장 부상자를 제외한 친위대 천 여 명을 이끌고 엉망이 된 군영을 나섰다.
"장군. 정말 거침이 없으시군요."
한창 말을 달리는 중에 카엘이 말을 걸었다. 들뜬 목소리였다.
"그래서 불만인가?"
"아니요! 무슨 말씀을! 더없이 기쁩니다! 모시기로 한 주인이 마음에 쏙 들어서 말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할렌이 버럭 소리질렀다.
"예를 갖춰라!"
카엘은 단순히 들뜬 것을 넘어, 술에 취하기라도 한 것처럼 잔뜩 흥이 올라 있었다. 전투 중이 아님에도 눈이 노르스름하게 번들거렸고, 입가에는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전투를 마친 직후부터 줄곧 저런 상태였던 것 같다.
"죄송합니다 장군. 대장. 뭔가…제 스스로 잘 주체가 안 되는군요. 간만에 전장이라 그런지 너무 흥분한 것 같습니다."
고개를 숙이면서도 입 꼬리는 여전히 올라가 있다. 그를 본 할렌이 뭐라 더 하려는 순간, 군터가 입을 열었다.
"이해는 한다. 너희의 몸에 깃든 그 힘 때문이겠지. 하지만 힘에 휘둘리지 마라. 끝없이 다스리려고 노력해라. 그러지 않으면 그 힘이 되어 독이 되는 날이 올 거다."
은근히 기세를 실어 말하니 카엘도 허투루 듣지 못하고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명심하겠습니다."
*
군터의 친위병력은 일찍부터 그의 휘하였던, 그가 열과 성을 다해 키운 정예병이었다. 고된 훈련을 수 년간 해온 덕에 그들에게 어지간한 강행군은 강행군 축에도 까지 못했다.
거기에 새로 합류한 수인병들도 신체 능력 하나만은 범인을 상회하는 수준이었으니, 그들은 군영을 떠난 이후로 말들이 지쳐 혀를 빼물 때까지 쉬지 않고 달렸다.
그들은 그렇게 달리고 달려, 정찰병이 이틀 거리라 했던 것을 거의 하루 만에 주파했다. 그러는 도중에 패잔병과 몇 차례 조우해 모두 쓸어버리기까지 했다.
"저건가 보군."
"보이십니까?"
카엘이 물었다. 인간이 아니게 된 이후, 힘과 체력뿐 아니라 눈도 좋아진 그였다. 그런 그의 눈에도 군터가 말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다.
"산성이다. 문이 열려 있는 것으로 보아…아직 패잔병들이 당도하지 못한 모양이군."
정말 그런 거라면 황당한 일이다. 하지만 확실히 나무로 어정쩡하게 세워 놓은 산성의 문은 열려 있었고, 경계병들의 모습에 긴장감 또한 없었다. 아직 패전 소식을 접하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곧장 친다."
어느 정도까지 천천히 이동한 그들은 적의 시야에 들어갈 즈음부터 전속력으로 질주했다.
"적이…컥!"
가장 먼저 발견하고 외치던 적병의 머리에 화살이 박혔다.
피잉!
군터는 연달아 세 번 더 활을 쏘았고, 목조 성벽 위 적병 셋이 쓰러졌다. 그로 인해 조금이지만 적들의 대응이 늦어졌고, 경사 진 언덕을 오르며 속도가 느려진 동안 화살비를 덜 맞을 수 있었다.
"성문이 닫힙니다!"
할렌이 다급하게 외쳤다.
아무리 볼품없는, 차라리 산채에 가깝다지만 어쨌든 성은 성이었다. 성벽이 있고, 성문이 있다. 문을 닫아걸고 필사적으로 버티기에 들어간다면 변변찮은 공성 장비도 없는 그들로서는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당황하지 말고 계속 달려라!"
그리 외치며, 군터는 한층 더 속도를 높였다.
"쏴!"
양 옆에서 화살이 날아들었다. 군터는 달리는 말 위에서, 보지도 않고 고개만 까딱이며 두 대의 화살을 피해냈다. 그리고.
쾅!
있는 힘껏, 막 닫힌 성문을 후려쳤다. 성문이라 해봐야 나무 여러 개를 한 데 묶어 만든, 뗏목 같은 형상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렇다 해도 성문은 성문. 이렇다 할 공성병기 없이, 사람의 힘만으로 후려쳐서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었어야 했다.
쾅! 콰쾅! 쾅쾅!
그런데, 연달아 터지는 굉음에 굳건해 보였던 성문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직! 콰지직!
"마, 말도 안 돼!"
순식간이었다.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빠르게 성문이 연달아 흔들린다 싶더니.
콰아아앙!
굵직한 나뭇조각이 튀며, 성문이 터져나갔다.
"돌입한다!"
창대를 타고 핏물이 흘렀다. 반동을 무시하고 무식하게 연달아 성문을 후려친 대가였다. 손아귀가 다 찢어지고, 어깨마저 삐걱거리는 듯했다. 그러나 그 상태에서도 군터는 가장 먼저 박살 난 성문을 넘었고, 우왕좌왕하는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와아아아아!
믿기지 않는 광경에 적들은 움츠러들었고, 아군은 기세가 하늘을 찌를 만큼 올랐다.
결과는 뻔했다. 일방적인 승리. 거의 학살에 가까운 승리였다. 산성은 피로 물들었고, 전의를 상실한 적들은 급기야 성 밖으로 도망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들 중 살아서 도망친 이들은 극소수였다. 군터는 눈에 보이는 모든 적을 섬멸할 것을 명했고, 그의 부하들은 명을 충실히 이행했다.
"장군. 살아남은 놈들이 있습니다."
"심문해라."
그 후에 어찌할지는 말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 아는 이야기니까.
"몸은 괜찮으십니까?"
할렌은 아직도 조금 전에 본 광경이 믿기지가 않았다. 사람이, 창을 휘둘러서 성문을 박살내다니? 그런 게 가능할 것이라고는 꿈에서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 믿기지 않는 광경을 조금 전 직접 목도했다. 꿈을 꾼 게 아니다.
"괜찮다. 손이 조금 찢어졌을 뿐이다."
실은 조금 찢어진 정도가 아니라 아예 너덜너덜해졌다. 돌덩이처럼 박혀 있던 굳은살이 죄다 갈려나갔다. 그 정도로 막대한 충격이었다. 그것을 제자리에서 무식하게 버텨냈으니, 이 정도쯤은 당연하다.
"제가 그래도 제법 오래 모셨습니다만, 아직도 장군님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긴 하신 겁니까? 하하."
감탄을 넘어서 뭔가 포기했다는 투다. 군터는 손에 감던 붕대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고갯짓으로 물러가라 명했다.
붕대로 양 손을 칭칭 감은 후, 군터는 홀로 생각에 잠겼다.
'인긴이긴 하냐라…….'
글쎄. 잘 모르겠다. 할렌이 그를 잘 모르겠다 했지만, 군터 스스로도 자신을 알지 못했다. 인간이 창 한 자루로 성문을 깨부수지는 않으니까, 어떤 면에선 할렌의 말마따나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
'애당초…그런 기준조차 모호하지만.'
기준이라는 것은 상대적이다. 어떤 이들의 눈에는 저기 밖에 있는 병사 하나하나가 인간 같지 않게 보일지도 모른다. 또 어떤 이의 눈에는, 군터 자신도 그저 그런 무인에 지나지 않게 비칠지도 모르고.
'또 다시 넘었군.'
조금 전 성문을 연타하여 박살낸 것은 스스로 돌이켜봐도 무모한 일이었다. 평소 같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했다 한들 실패했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급박한 상황에서의 일념은 한계라 규정지었던 선을 한 발자국 넘어선다. 군터는 성문을 깨뜨리던 그 순간, 자신의 그릇 또한 깨졌음을 느꼈다. 이제 그의 '선'은 종전의 것보다 어느 정도 더 멀리 나아갔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