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5화
군터는 말에서 내려 걸었다. 병사들과 똑같이, 내리 쬐는 해 아래에서 두 발로 땅을 밟았다.
한 손에는 말의 고삐를 잡고, 한 손에는 칸젤을 길게 늘어뜨린 채 묵묵히 걸었다. 이는 병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총지휘관인 그조차 병사들과 똑같이, 그것도 더 무거운 무장을 하고서 걸으니 불만에 가득 찬 병사들도 다섯 화날 것이 셋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분간 밖에 먹히지 않는 미봉책이었다. 그러나 이마저도 간절했다. 병사들의 불만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고 그들을 계속 걷게 할 수 있다면 땀 좀 흘리는 게 대수일까.
"장군!"
그렇게 이틀. 유난히 쬐는 햇빛을 맞으며 걸음을 옮기던 때, 앞서 보냈던 정찰병들 중 일부가 빠르게 말을 달려왔다.
"장군! 적입니다!"
다급한 목소리가 퍼지자 소리를 들은 병사들이 당황하며 웅성거렸다. 군터는 목소리를 크게 내면서도 침착함을 드러냈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이.
"어느 쪽이냐."
"북쪽으로 곧장입니다. 이틀 거리이며, 야트막한 지대의 산성(山城)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휘날리는 깃발로 미루어 보아 적어도 오천 이상은 되는 것 같았습니다."
"산성?"
군터는 적의 수가 오천이 넘는다는 것보다 산성이라는 말에 반응했다.
"그렇습니다. 허나 성이라고는 해도 상당히 조약한 것이, 급조한 태가 났습니다."
"급조라……."
"이 부근에 산성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야기만 못 들어본 것이 아니라, 지도에도 나와 있지 않다. 살펴보고 온 정찰병이 급조한 태가 났다고 했으니 아마 급조한 것이 맞을 것이다. 왕도에서 올 군대를 맞이하기 위해서 말이다.
"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군요."
"……."
군터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적이 산성까지 만들어 대기하고 있었다면 분명히 이쪽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당연히, 칸디시아렌 공작 쪽으로 원군이 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일 터.
'본격적이군. 산성까지 만들고서 기다리다니. 헌데…….'
"설마 수성을 하려는 건 아니겠지."
"그것은 아닐 겁니다."
시어문드가 고개를 저었다.
"손에 쥔 무기를 스스로 버리고 싸움을 벌일 리 없습니다. 산성은 요새보다는 거점의 역할을 수행한다고 봐야 합니다. 아마도 군량 같은 것을 쌓아뒀겠지요. 겸해서 바람을 피하는 용도 정도. 그 이상의 의미는 없을 겁니다."
"그렇군. 허면 우리가 적들과 어찌 싸워야 하겠나?"
"우선은 휴식부터 취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상태로 적과 싸웠다가는 손도 써보지 못하고 패퇴할 것입니다."
이어서 아모트군의 지휘관 오로보르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적들이 눈치 채기 전에 우선은 뒤로 물러나 언덕 쪽에 진을 치고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이미 눈치 챘을 거요."
"옛?"
"초원인은 눈이 좋지. 그 중에서도 망을 보는 전사들은 까마득히 멀어 점으로 보이는 것들도 정체를 분간할 수 있소. 정찰병들이 아무리 은밀히 움직였다 한들, 십중팔구는 이미 적의 눈에 들었을 것이오."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됐습니다."
"잘 됐다니?"
군터가 반색하는 시어문드를 쳐다보았다.
"뒤로 물러날 것 없이, 그냥 이 자리에 진을 펴시지요."
그 말에 누구 할 것 없이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느닷없이 그게 무슨 소리요?"
"이곳의 지형을 보시오. 지형이 평평하지 않고 이곳 저곳 들어가고 나온 곳이 많아 진지를 펴기에는 적합하지 않소이다."
기본이며, 상식이다. 그러나 군터는 시어문드가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을 무시한 채 얼간이 같은 말을 하지는 않았으리라 믿었다.
"자세히 설명하시오."
"장군. 적들이 정찰병들을 눈치 챘다면 응당 그 뒤를 밟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적들은 우리에 대해 알아갈 것이고, 움직임을 보이겠지요. 타칸 연합의 전례를 보듯, 그들의 습성상 아마 먼저 치고 나올 가능성이 큽니다. 그들은 야전에 능숙하고, 우리는 먼 길을 오느라 지쳐 있는 상태이니 바로 맞붙으면 승리를 거둘 수 있으리라 생각했겠지요."
"계속해보시오."
"그러니 지친 병사들을 진영 외각에 세워두어 우리가 지쳤음을 알려주고, 그들로 하여금 기습을 가해오게 유도하는 겁니다. 적들이 그것을 보면 어찌 나오겠습니까? 이미 타기 시작한 불에 기름을 부어주는 격이 되지 않겠습니까?"
"적이 기습을 가해오면, 매복하고 있다가 도리어 친다?"
"어떻습니까?"
괜찮다. 그대로만 된다면 초장에 기세를 탈 수 있음은 물론이고, 잘하면 아예 적을 섬멸시켜버릴 수도 있으리라. 다만 문제는 이것이 도박이라는 것이다.
"적이 기습을 가해오리라 어찌 확신하시오?"
"확신은 없습니다. 모든 것은 선택이지요. 불확실 속에서 하나를 잡고 가는 것입니다. 보다 가능성이 높다고 여겨지는 쪽을 말입니다."
"…그렇군. 내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
"아닙니다."
모르고 있던 것이 아니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 칠천 오백의 병력 씩이나 되는, 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대군을 이끌다 보니 머릿속에 자욱하게 안개가 끼어버린 모양이다. 그것의 이름은 좋게 말하면 책임감, 나쁘게 말하면 겁이었다.
'신중함은 좋으나, 거기에 함몰되어서는 곤란하겠지.'
정신이 들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시어문드의 제안은 그럴듯했다. 가능성, 그로 인해 나올 수 있는 결과 모두 그 이상의 방안을 찾기 힘들다. 그렇다면, 그의 제안을 채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대로 시행하도록 하지."
시어문드가 씩 웃으며 군례를 취했다.
"추레한 몰골들을 선별하도록 하겠습니다."
*
땅거미가 지고 어둑해질 무렵. 군영 바깥 쪽에는 어깨가 쳐진 병사들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젠장. 이러다 죽는 건 아니겠지?"
"그냥 이렇게 있다가 적이 온다 싶을 때 도망치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걱정이야? 이번 전투만 끝나면 두둑이 포상해주겠다고 했잖아."
"흐아아암. 졸려 미치겠구만. 어이, 무슨 말이라도 계속 걸어봐."
창을 지팡이처럼 짚은 병사들 중 몇몇은 벌써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어이. 이봐들! 그렇게 자다가 어디서 화살이라도 날아오면 어쩔……."
푹!
반쯤 감긴 눈으로 말을 하던 병사가 그대로 굳었다. 그가 말을 걸던, 창에 기대어 고개를 까딱거리던 동료 병사의 머리에 기다란 화살 한 대가 박힘과 동시였다.
"으, 으아아아악!"
누군가 쓰러지고,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군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
푹 파인 지형에 몸을 숨긴 채 대기하고 있던 일단의 병력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시작됐군요."
시어문드가 불길이 피어오르는 군영을 보며 중얼거렸다.
"그대의 말이 다 들어맞았소."
"아직은 아닙니다."
"음?"
"아직 승리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지요. 이제 저들을 성공적으로 기습해, 유효한 타격을 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승리를 거둔다면, 그때는 제 말이 들어맞았다 할 수 있겠지요."
"그래. 그렇군."
군터가 몸을 일으키니 그의 몸에 묻어있던 흙먼지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럼 이제 출진하겠소."
"장군께서 직접 말입니까? 싸움은 병사들에게 맡기시고 장군께서는 후방에서 지휘를……."
"나는 항상, 어느 전투에서건 늘 병사들의 앞에서 싸워왔소. 이번에도 다르지 않지."
"장군께서는 7천 병사를 지휘하시는 몸입니다. 가벼이 움직이셔서는 안 됩니다."
이번에도 시어문드의 말은 옳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말이다.
"그대는 이곳에 남으시오. 지휘기를 두고 가지."
그러면서 군터는 하나의 깃발을 들었다. 시어문드가 기함하며 그를 만류했다.
"장군! 적들의 표적이 될 것입니다!"
"원하는 바요. 내가 미끼가 될 테니, 한 번 유용하게 써 보시오."
"무모하십니다. 이렇게 위험을 감수하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보다 완벽한 승리를 위해서라고 해둡시다."
군터가 훌쩍 뛰어 말에 올랐다. 붉고 하얀 장군기(旗)가 높이 들려 펄럭였다.
"충분히 쉬었지 않은가! 이제는 일을 할 시간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 몸에 흙을 묻힌 병사들이 일제히 일어섰다. 불편하게나마 충분히 휴식을 취한 병사들의 눈은 벌써부터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를 본 군터는 고개를 끄덕이며 외쳤다.
"좋다! 매복하고 있는 다른 두 쪽에 신호를 보내라! "
칼리온과 루비오, 각기 천 명의 병사를 데리고 매복해 있는 두 지휘관에게 신호를 보냄과 동시에 군터는 그의 휘하 친위대를 이끌고 매복지를 박차고 나섰다.
"돌격!"
전력으로 말을 달렸다. 군영에 불을 지르며 거짓 승리에 도취되어 있는 적들이 배후에서의 접근을 눈치챘을 때는 이미 어느 정도 거리가 좁혀진 후였다.
"흥!"
몇몇 전사들이 다급히 쏘아 보낸 화살을 창 한 번 휘둘러 튕겨냈다. 동시에 비스듬하게 들고 있던 깃발을 치켜 올렸다.
"적장이다!"
장군기를 알아본 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눈 좋은 한 전사의 외침은 오히려 혼란을 가중시켰다. 그 사이에 군터와 친위대는 군영의 코앞까지 접근해 들어갔다.
"돌입한다! 내 뒤를 바짝 따라 달려라!"
힘껏 내지른 고함은 소란스러운 전장 속에서도 천둥처럼 크게 울렸다. 적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리고, 개중 몇이 용감하게 말을 몰아왔다.
"막아라!"
재빠르게 반응하고, 천 명이 넘는 기병들을 향해 정면으로 말을 달릴 정도로 배짱이 두둑한 자들이었다. 풍기는 기세도 하나 같이 거칠고 강했다.
으득!
그들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고, 일순간 군터의 두 눈이 붉게 번뜩였다. 동시에 거구의 몸이 활짝 펴지며, 사나운 기운이 거세게 솟구쳤다.
콰쾅!
오른손에 쥔 칸젤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궤적에 걸린 모든 것이 잘리고 부서져 사방으로 흩날리고서야 선이 그어졌음을 알았다.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용맹한 전사 셋이 베였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정면의 적들은 물론, 뒤따라 달리던 친위대 병사들까지 경악하여 입을 벌렸다.
그러나 놀라움은 잠깐이었다. 전투는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으니.
"초원의 전사는 어디에 있는가-!"
군터를 태운 말은 멈추지 않았다. 고삐를 당겨 향하는 곳마다 피바람이 몰아쳤다. 한 손에 쥔 창으로 길을 뚫었고, 막아서는 자는 여지없이 목이든 몸통이든 절단 나 튕겨 나갔다.
"내 뒤로 따라 붙어라!"
간혹 대열의 허리가 물려 위태로워질 때면 지체 없이 말머리를 돌려 달라붙은 적들을 떨쳐냈다. 덕분에 간혹 움직임이 둔해질지언정, 군터가 이끄는 친위대는 단 한 번도 멈춰서지 않았다.
"장군! 불길이 번집니다!"
수하 중 누군가가 외쳤다. 그 말에 퍼뜩 고개를 돌리니 그 말처럼 몇몇 막사에 붙은 불길이 빠르게 번져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군영 전체가 전소될 것 같았다.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속히 빠져나간다!"
연기가 옅은 지점을 향해 말머리를 돌렸다. 불길이 번지고 있기 때문인지 적들도 별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 곧이다!"
서서히 짙어지기 시작한 연기를 뚫고 군영 밖으로 나왔을 때. 군터의 눈에 들어온 것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적병들이었다.
"장군!"
뒤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군터는 위급한 와중에도 적을 살폈다. 넓지는 않으나 두껍게 포진한 것이 쉽게 보내줄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설마 벌써 지친 녀석들은 없겠지?!"
그의 물음 만큼이나 우렁찬 대답은 곧바로 들려왔다.
"말이라고 하십니까!"
"이 손으로 끝낸 놈들만 열에 가깝습니다만, 그래도 아직 거뜬합니다!"
군터는 군데군데 찢기고 탄 대장기를 들어올려 어깨에 걸쳤다. 그리고 칸젤을 들어 에워싼 적의 중앙을 가리켰다.
"보아하니 이놈들이 마지막이다! 잠시 후에 이놈들의 식은 몸뚱어리 위에서 승전의 축배를 들 것이다!"
와아아아아-!
적들은 군터의 연설을 가만히 듣고 있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화살비를 쏘아내고, 동시에 포위망을 좁혀왔다.
첫 번째 화살비가 머리 위로 내려올 때쯤, 군터는 크게 포효하며 말의 배를 박찼다. 그의 병사들도 이제껏 그랬던 것처럼 그의 뒤를 바짝 따랐다.
"뭐, 뭐야!"
"적이다!"
그 순간. 견고하게만 보이던 적진에 균열이 일었다. 말을 달리면서도 뭔가 싶어 안력을 돋우니, 적의 뒤편에서 한 무리의 군세가 부딪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칼리온!"
젠탄테르군이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군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둠 속에 가렸지만, 지휘 깃발이 높게 휘날리고 있을 방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