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373화 (373/1,064)

373화

사연은 기구하다면 기구했다. 카엘의 변명은 어느 정도는 먹혀 들었다. 사실 군터는 버림 받은 그들의 사연보다는 그들이 앞으로 명령에 복종할 거라는 카엘의 말에 더 이끌렸다.

'완전히 믿을 수는 없겠지만…….'

코누다이안에서 어설프게나마 권력자 노릇을 하며 한 가지 배운 건, 사람을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믿더라도 부분적인 믿음만이 가능할 뿐, 완전한 믿음이라는 것은 가족이라 해도 가지기 어렵다는 것을 군터는 코누다이안에서 적지 않게 보며 배웠다.

카엘의 비통한 목소리를 토하며 이야기한 것도, 얼마나 거짓이 섞여있을지 모르는 것이다.

'가까이서 두고 지켜봐야겠군.'

용인에 있어 군터의 방식은 믿음 없이는 쓰지 않는 것이었다. 카엘과 그의 수하들처럼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는 자들은 여느 때였다면 가까이 두지도,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손 하나가 아쉬운 상황. 이런 상황에서 여느 때와 같은 방식을 고집할 수는 없다.

"좋아. 하지만 자네들이 다른 병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나는 지휘관으로서 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그 어떤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 그러니 자네들은 이제부터 내 친위대에 소속된다."

최대한 다른 병사들과 얽히는 일을 피하는 한편, 그들을 가까이서 살피기 위한 방법이었다.

"장군의 은혜에 감사 드립니다. 이 은혜, 반드시 전공으로 보은하겠습니다."

당장 혼자서 천 명의 적과 싸우러 나가라 해도 나갈 것 같은 기세다. 과연 저 모습이 전장 앞에서도 똑같이 이어질 수 있을까? 두고 보면 알 일이다.

*

이번 전쟁에서 군터의 부장은 할렌이었고, 그의 친위대 역시 할렌이 통솔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카엘과 그의 수하들이 합류하게 되니, 할렌이 자극을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본래 수인병단은 독립된 부대로서, 그 부대의 지휘관은 카엘은 그 지위가 꽤나 모호했다. 한 영지의 군을 이끌고 나온 다섯 지휘관들보다는 아래지만, 그 휘하의 장교들보다는 윗줄이다. 어쨌거나 한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총지휘관이라는 군터의 특수성과, 그 휘하에서 코누다이안 군을 이끌다시피 하고 있는 할렌과 지위를 비교해보면 답을 내기가 어려워진다. 부관이라지만 군터의 친위대장으로서, 다섯 영지의 지휘관들에게도 반 존대를 들으며 어느 정도 대우를 받는 할렌이었다.

"재미있는 놈들이군요."

군터가 카엘과 수인병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었을 때, 할렌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동시에 뜨겁게 눈을 빛냈다.

"놈들이 친위대로 배속 된다면…한 번은 부딪치겠군요."

"그렇겠지."

"강합니까?"

"쓸만하긴 한 것 같더군."

"그렇습니까. 저와 비교한다면 어떻습니까?"

"글쎄. 붙어보면 알지 않겠느냐. 내 생각엔, 네게 좋은 경험이 될 것 같다."

"기대 되는군요.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면, 얼마 안 있어 먼저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아마도."

그 말 그대로 되었다. 수인부대가 친위대에 배속되고서 채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기존 친위대 병사들과 새로 합류한 수인병들이 소리 없는 기 싸움을 벌이는 가운데, 카엘이 도전적인 눈을 하고서 할렌에게 다가왔다.

"친위대장."

검을 천으로 닦고 있던 할렌이 쳐다보지도 않고 짤막하게 대꾸했다.

"경칭을 빼먹었군."

"나 또한 한 부대를 이끄는 대장이오."

"지금은 친위대 소속 장교에 불과하지. 내 휘하의 장교. 안 그런가? 그렇다면 마땅히 대장에게 예우를 갖춰야 하지 않겠나."

"이해하시오 대장. 나는 물론이고, 내 휘하의 녀석들은 자격 없는 대장을 모시지 않는다오."

"수하가 상관의 자격을 논하나? 재미있군."

할렌이 검에서 눈을 뗐다. 그리고 바라보는 도전적인 눈을 조소로 받아 쳤다.

"그래서, 자격이라 함은?"

"당연히 실력 아니겠소. 한 번 겨뤄봅시다."

"하극상인 건 아나? 장군께 하극상을 범해 죽다 산 주제에 다시 또 같은 잘못을 되풀이 하는군."

"하극상이 아니오. 그래서 이렇게 정중하게 요청하고 있지 않소. 대장은 장군을 따라 숱한 전장을 누볐다 들었소. 그런 분께서 설마 겁쟁이처럼 피하지는 않으시겠지?"

"도발 솜씨는 괜찮군. 칼 솜씨가 그 반만 따라갔으면 좋겠는데. 좋아. 이번 한 번만큼은, 그 유치한 수작에 놀아나주지."

판은 금방 만들어졌다.

사실 이런 상황이 늦든 빠르든 벌어질 거라고 친위대를 비롯해 그들의 사정을 아는 이들이 모두 예상하고 있었다. 다만 그들은 병사들끼리 문제를 일으킬 거라고 예상했지, 지휘관들끼리 부딪칠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할렌은 친위대장이었고, 그런 그에게 맞선다는 것은 그 자체로 하극상이 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할렌은 하극상이 아니라 수하의 정당한 도전 신청을 받아들였다. 나설 필요 없는 일에 스스로 나선 것이다. 그런 그의 결정은 카엘 뿐 아니라 다른 수인병들에게도 꽤나 색다르게 비쳐졌다.

"새로운 대장 나리는 꽤 시원시원하구만."

"실력도 시원시원했으면 좋겠는데. 난 약골을 머리 위에 올려두기는 싫거든."

이 소식은 곧바로 군터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는 바깥에서 작게 소란이 이는 것을 느끼자마자 막사 밖으로 나왔다.

"장군. 할렌 대장이 수인대장과……."

"수인대는 이제 없다. "

"아, 옛! 카엘과 붙는다고 합니다. 때문에 병사들이 벌써부터 흥분해서는……."

"그렇겠지. 좋은 구경거리가 아니냐."

"어찌 하올까요? 소관의 소견으로는, 통제를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럴 필요 없다. 그냥 두어라."

"옛? 아…알겠습니다."

사실 이는 할렌의 의견이었다. 군터는 할렌에게 주변을 통제해주겠다고 제안했지만 할렌은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실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되도록 떠들썩하게 많은 병사들이 지켜보게 하십시오. 그래야 결과가 어찌 나오든 이득일 것입니다."

"그게 무슨 뜻이냐?"

"제가 이긴다면 그간 수인병들 때문에 쌓인 병사들의 화가 누그러질 것이고, 만에 하나 카엘이 이긴다면 그들의 실력을 병사들이 보게 되니, 쌓인 화가 다 가라앉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그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군터는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겼다. 하여 할렌의 뜻대로 병사들이 우르르 몰리는 것을 방관했다. 다섯 영지의 지휘관들이 와서 괜찮겠냐고 물었을 때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꾸했다.

"좋은 구경거리가 될 테니, 그대들도 잘 보이는 자리를 잡는 게 어떻소?"

모두가 당황스러워하는 와중에 센트리올군의 지휘관, 시어문드만이 크게 웃었다.

"하하핫! 그러지요. 지친 병사들에게도 위무가 되겠습니다."

"그러길 바라오."

다섯 영지의 지휘관들 중 군터가 눈 여겨 본 유일한 자가 바로 시어문드였다. 이십 대 후반에 불과한 젊은 나이였고, 다섯 지휘관들 중 가장 어렸지만 그는 항상 여유가 있었다. 바로 그 여유가 군터의 눈길을 끌었다.

'저 여유가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면 좋겠군.'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조만간 확인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전장에 당도해 적과 마주하게 되면 말이다.

*

할렌과 카엘은 각자 검 한 자루를 쥐고 마주 섰다. 자그마한 공터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은 그들 둘 뿐이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병사들이 빙 둘러 앉아 곧 벌어질 흥미진진한 구경거리를 기다렸다. 그간의 고된 행군 탓에 지칠 대로 지친 와중에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은 그들에게 큰 즐거움이었다.

"혹 오해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소. 대장에게 별 감정은 없소. 다만 나와 내 부하들은, 몸이 납득하지 않으면 머리에서 자꾸만 열이 올라서 말이오."

"강한 놈만을 우두머리로 인정한다? 짐승들의 방식이 아닌가."

할렌이 조소했으나, 카엘은 반박하지 않았다. 그저 쓰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맞는 말이오. 미쳤다고 해도 할 말이 없소. 우리도 우리가…크게 망가져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하지만 어쩌겠소? 우리는 이렇게 되어버렸고, 이런 야만적인 방식만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것이오."

"신세한탄은 됐다. 길게 끌 것 없이, 바로 시작하지."

"그럽시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시오."

"네놈이야말로. 전장에 가서 살라야 할 목숨, 엄한 곳에서 날리지 말고 위험하다 싶으면 바로 검을 버리도록."

"하하하! 어디 한 번 봅시…다!"

카엘이 먼저 달려들면서 대결이 시작됐다.

카카캉!

쉴 새 없이 검이 부딪쳤고, 두 사람은 한 순간도 한 자리에 머물지 않으며 연신 바쁘게 몸을 비틀었다. 날카로운 검격이 지켜보는 이들의 눈을 현혹했고, 입에서 헛바람을 자아냈다.

"허어…대단하군."

이 얼빠진 감탄사는 뭉쳐 앉은 병사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젠탄테르군의 지휘관, 칼리온이 낸 소리였다.

그의 주변에 모여 앉은 다른 지휘관들도 그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름대로 짧지 않은 세월 동안 군문의 녹을 받아먹으며 이런저런 것들을 봐왔을 그들의 눈에도 저기서 부딪치고 있는 두 사람의 솜씨가 대단해 보인 것이다.

"우열을 가리기 힘든 솜씨요."

솜씨?

군터는 그리 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승부를 내지 못한 채 치열하게 맞붙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대등한 솜씨 때문은 아니었다. 솜씨라는 것이 순수하게 무공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그쪽에서는 할렌이 한 수는 더 위였다. 다만 카엘의 신체능력이 더 빠르고 강했기에 쉽게 우세를 점하지 못하고 있을 뿐.

맹수가 사람보다 더 날래고 강하다 하여 그것을 두고 솜씨가 좋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말하자면 카엘은 맹수고, 할렌은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도 실제 그 정도로 차이가 심하지는 않지만, 카엘이 인간의 범주를 넘어선 육체적 능력을 소유했음은 분명하다.

보통이라면 피할 수 없는 공격을 어떻게든 피해내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할렌의 계산이 조금씩 어그러지고 있다.

그마저도 점차 적응을 해나가고 있는 것 같지만…그래도 결판을 내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수백 합이 지났다. 직접 무기를 부딪친 횟수가 그러하니, 칼날이 허공을 가른 것까지 더하면 족히 그 배 이상이다. 두 사람은 이미 땀으로 목욕을 했고, 날랜 짐승 같았던 움직임도 상당히 무뎌졌다.

할렌은 체력적인 한계를 서서히 보이고 있었으나, 동시에 카엘의 움직임에 적응을 마쳐가고 있었다. 몸은 지쳤는데 검은 더 날카로워지니, 검 끝이 카엘의 살을 아슬아슬하게 스치는 횟수가 늘어났다.

반대로 카엘은 체력적으로는 아직 문제가 없어 보이나, 점점 더 날카로워지는 할렌의 검에 얕은 자상을 십 여 개 이상 입은 상태였다. 지금도 그 수는 조금씩 더 늘어가고 있었고.

"여기까지다."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나 옆에 세워 두었던 칸젤을 집어 던졌다. 빛살처럼 날아간 창은 다시금 부딪치려던 두 사람의 사이에 내리 꽂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