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화
오테론이 함락 됐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터는 곧장 왕도를 떠났다. 병사들에게 제대로 휴식 한 번 주지 못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사태가 위중했다. 왕과 조정이 받아들이는 인식은 그보다 더 심각했고.
보급 부대 천 명과 수인병이라 불리는 오백을 지원받았다.
정규 부대라고 하기에는 어딘지 모르게 풀어져 있는 것 같은 오백 명을 보는 순간, 군터는 알아차렸다.
'바르바피와 닮았다.'
직접 맞서 싸우고, 수십이 넘는 수를 베었기에 바로 느낄 수 있었다. 이들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난폭한 기운을.
군터는 그들이 타칸 연합의 전력이었던 바르바피들과 모종의 관계가 있거나, 하다 못해 비슷한 부류는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대체로, 품고 있는 기운은 대체로 그들의 기질을 반영한다. 어떤 사람을 보며 느낌이 좋다 나쁘다, 분위기가 어떻다고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사람의 외관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 풍기는 '기운'을 어렴풋이 느끼는 것이다.
무인이라면 무인 특유의 칼날 같은 날카로운 기운이, 상인이라면 사람을 살피고 계산하는 은근하면서도 면밀한 기운이 비치는 거다. 얼굴로, 말로는 거짓을 말할 수 있어도 자신이 풍기는 기운 만큼은 어쩔 수 없다. 그것은 타고난 체취보다도 더 진하여, 결코 지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본성'보다도 그 사람을 더 정확히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본성은 그저 타고난 기질일 뿐이나, 안에서부터 풍기는 기운은 타고난 기질에 더해 그 사람이 이제껏 살아오며 쌓은 경험까지 얹어지는 것이니까 말이다.
'길들여지지 않은 들개.'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그 느낌이 완전히 들어맞았다는 것을 무척이나 빠르게 확인할 수 있었다.
"어이. 저리 꺼져. 더워 죽겠는데 왜 자꾸 몸을 비벼대는 건데? 앙?"
긴 행군. 대열을 맞춰 이동하다 보면 가끔씩 지친 몸이 기우뚱 댈 수도 있다. 그러면서 옆 사람과 어깨가 부딪칠 수도 있고, 앞뒤 사람과 닿거나 뒤꿈치가 밟힐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위협적으로 으르렁 거리는 것은 괜한 시비밖에 되지 않는다.
그것을 알고 있기에, 날 선 목소리를 들은 병사는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흉험하게 이글거리는 눈을 본 순간, 한 마디 시원하게 내지르려고 떼었던 입은 다시 얌전히 닫히고 말았다.
"한 번 더 들이대. 그때는 그 덜렁거리는 팔을 고기조각처럼 뜯어버릴 테니까."
같은 깃발 아래 뭉친 아군임에도 그들은 주변의 다른 병사들을 적군 대하듯 대했다. 군터는 그들의 존재가 군의 사기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고, 조치를 취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조치를 취하기 전, 묘한 움직임이 감지 되었다.
새롭게 합류한 500명의 수인병들을 제외한 나머지 병사들이 저들끼리 뭉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치 이전까지는 서로 헐뜯던 이들이 강대한 외적에 맞서 합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데면데면하던 이들이 갑자기 진한 전우애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전에 없던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한 것은 확실했다.
'조금 더 놔둬볼까.'
군중의 분위기를 흐린다고 생각해서 바로 손을 쓸 생각이었는데, 조금 더 두고 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 군터는 휘하 지휘관들에게 어느 정도 선까지는 수인병들에 대해 방조하라는 명을 은밀히 내렸다.
그러나 곧,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수인병들 중 몇몇이 사소한 일로 시비가 붙어 아힌키우스의 병사들을 구타한 것이다. 처음에는 몇몇 병사들 간의 다툼이었을 뿐이나, 다른 병사들까지 가세하여 수십 명 규모의 패싸움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쉰 네 명의 병사들이……."
보고를 하는 목소리가 기어들어갔다. 보고를 듣는 상관에게서 숨도 쉬기 힘들 정도의 흉악한 기운이 넘실거렸기 때문이다. 무공의 수준이 높지 않더라도, 목을 옥죄어오는 압박감은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인병들은 몇 명이라고?
"다, 다섯입니다."
보고를 한 아힌키우스군의 지휘관 루비오는 군터가 굉장히 화가 났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착각으로, 사실 군터는 화보다는 호기심을 더 느끼고 있었다.
'다섯이서 쉰이 넘는 병사들을 두들겼다? 제법이군.'
아무리 병기도 없고 진형을 갖추지도 않고 일어난, 말 그대로 막싸움이었다지만 고작 다섯이서 열 배가 훌쩍 넘는 수를 상대로 승리를 거뒀다. 이전에도 수인병들이 보통의 병사들과는 다름을 인지하고 있었지만…생각보다 훨씬 잘 싸우지 않는가.
'그래 봐야…결국은 고삐 풀린 망아지 새끼들에 불과하지.'
그 동안에는 놈들이 생각지도 않은 긍정적인 현상을 만들어내었기에 손을 대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냥 넘길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싸움의 원인은 수인병들 쪽에 있었다.
"할 말은 없나?"
"모두 사실입니다."
오백 수인병들의 지휘관, 카엘도 인정했다. 다만 그 태도가 굽힘 없이 당당했다. 휘하 병사들의 잘못은 곧 지휘관인 그의 잘못이라 볼 수 있는데도,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처벌을 하려면 얼마든지 하라는 투다.
"…그래? 허면 벌을 내려야겠군."
"……."
벌을 이야기했음에도 여전히 태도에 변화가 없다. 뭘 믿고 저러는 걸까? 왕이 보낸 병사들이니 벌을 내리더라도 크게 일을 벌리지는 못할 거라 생각한 걸까? 아니면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
그간 군터가 이들을 살펴보며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자신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귀중한 전력임을 알았고, 그를 은근히 이용했다. 하여 수인병들은 말단 병사조차 장교들 앞에서 고개를 뻣뻣하게 들었다. 지금 앞에 있는 카엘처럼 말이다.
"군중에서, 그것도 전시에 사사로이 아군과 싸움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몸이 상한 병사들도 적지 않고. 처벌은 당연히 참형이겠지."
"…참형?"
말이 짧다. 카엘은 순간 당황했다가, 이제는 사납게 눈을 치켜 떴다.
"과한 벌입니다. 고된 행군 중에 신경이 곤두선 병사들끼리 벌어진, 사소한 다툼이었을 뿐입니다."
"사소한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한다. 고된 행군을 견디는 것이 자기들만인 것도 아닌데 군중에서 소요를 일으켜? 당연히 참형이다. 더한 벌을 내리지 않는 것을 감사히 여기도록."
군터가 단호하게 나오자 카엘이 이를 악 물었다.
"…병사들이 불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불만? 그럴 테면 그러라지. 헌데…내 보기엔 병사들보다 자네가 더 불만이 있는 것 같군."
"……."
"불만이 있으면 어쩔 텐가? 덤벼들기라도 할 건가? 자네의 부하들처럼?"
"어찌 소관을 도발하시는 겁니까?"
카엘은 그의 부하들과 마찬가지로 평범한 인간 이상의 난폭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나움에 잡아 먹히지는 않았다. 그는 분노를 느끼는 와중에도 생각이란 것을 할 줄 알았다. 어쩌면 그것이 그가 수인병들의 지휘관이 된 이유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자네들의 방종을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앞으로 수인병들이 어떠한 소란이라도 일으킨다면 즉각 참형으로 다스리겠다. 그러니 자네가 나서서 부하들을 잘 관리하도록 하게."
"그렇게 하겠습니다만, 제 수하들이 워낙 거친 놈들이라 잘 따라줄지 모르겠군요. 분명 이 일로 장군께 불만을 품게 될 것입니다."
"상관 없다. 최악의 경우에는 오백 모두 목을 베어버리면 그만이니."
"……."
"자네, 뭔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나는 전장에 나가 싸울 수 있는 병사들이 필요하지 무뢰배들이 필요한 게 아니야. 무뢰배들의 목 따위는 오백이든 오천이든 얼마든지 베어버릴 수 있네. 잘 알아뒀으면 좋겠군."
이글거리는 눈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상관 없다. 이 자리에서 바로 달려들지 못하는 것만 봐도, 카엘이라는 놈이 제대로 된 맹수가 아니라 비루먹은 들개새끼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두머리가 한 마리 들개에 불과하니, 그 휘하에 모인 놈들도 들개 이하에 불과하다.
*
한바탕 소란이 있은 후, 군터는 의도적으로 자주 사열을 나갔다. 여섯 영지의 병사들을 지날 때에는 상관을 보는 병사들의 긴장된 시선을 받았지만, 수인병들의 무리를 지날 때에는 적개심이 진하게 담긴 시선을 받았다.
그것이 어찌나 노골적이던지, 뒤따르던 할렌과 다른 수하들이 눈을 부라리며 허리춤의 검에 손을 가져갈 정도였다.
"아서라."
그럴 때면 군터가 작은 목소리로 수하들을 제지했다.
"장군. 저놈들의 눈을 보십시오. 저건 상관에 대한 예우는커녕, 숫제 적을 보는 눈이 아닙니까."
"덤벼들지는 않고 있지 않느냐."
태연한 대꾸에 할렌이 헛바람을 내쉬며 가슴을 쳤다.
"아니, 장군께서는 놈들이 덤벼들기라도 하길 원하십니까?"
"바로 그렇다."
"옛?!"
"나는 놈들이 덤벼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생각보다 꽤 버티는구나."
"대체 무슨 생각이신 겁니까? 빌미를 잡아 놈들의 목을 싹 쳐버리기라도 하실 생각이십니까?"
"어쩔 수 없다면 그래야겠지."
담담한 말에 표정이 확 변한 할렌이 입을 꾹 다물었다.
할렌이 비록 머리가 좋지는 않지만, 그래도 바보는 아니었다. 거기에 군문에 몸을 담은 세월이 적지 않고, 갖은 경험을 다 했다. 이렇게까지 대화가 오가면서, 그는 군터의 의도를 눈치 챘다.
"한 번 확 기를 죽이고 건져낼 놈들은 건져낸다…맞습니까?"
"정확하다."
들개는 쓸모가 없다. 개를 쓴다면 들개가 아닌 군견뿐이다. 헌데, 야성이 너무 강한 놈들은 길들이기가 어렵다.
아무리 몰리는 상황이라고 해도, 총대장에게 덤벼들 정도로 화를 다스리지 못하는 놈들은 필요가 없다. 그런 놈들은 안고 가는 것보다 목을 치는 것이 더 편하다.
필요한 건 본보기다. 한 번 제대로 본을 보여주면 그 다음부터는 쉽다. 들고 일어날 놈들은 일어나고, 엎드릴 놈들은 엎드릴 것이다.
'그런데 생각보다 반응이 늦군.'
카엘이 생각보다 통솔력이 있는 것 같았다. 대놓고 노려보는 놈들이 많은 와중에도 앞으로 나서는 놈은 없는 것을 보면 말이다. 마지막 선은 지킨다는 것 같지만, 이는 군터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사실 가장 좋은 것은 길게 보며 최대한 많은 수를 끌어안는 것이겠지만, 안타깝게도 시간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 곧 전장에 닿게 되면 그때부터는 군을 단속할 여유조차 없어진다. 때문에 군터는 한 발 더 나아가기로 했다.
수인병들의 막사 쪽을 지나가다가 마주친 수인병 하나. 간단한 목례만을 취한 병사에게 군터가 다가갔다.
"군례는 어디다 팔아먹었나?"
"…예?"
"군례 말이다. 귀가 먹기라도 했나?"
그 동안 군터는 수인병들이 목례 정도로 예를 간략히 하는 것에 대해 한 번도 뭐라 한 적이 없었다. 수인병들 뿐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거리가 떨어져 있는 병사들은 멀찍이서 상관을 보았더라도 가벼운 목례 정도만 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지금, 군터는 일부러 멀리 떨어진 수인병에게 다가와 왜 정식으로 군례를 취하지 않았느냐고 몰아붙였다. 당연히 고의적인 시비였다.
그것을 느낀 수인병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직도 손이 움직이지 않는군."
"이런……."
수인병이 인상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드러냈다. 그 순간, 순식간에 뻗어나간 군터의 손이 그의 목을 움켜 쥐었다.
"커, 커컥!"
반항 한 번 못하고 목을 잡힌 수인병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