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0화
왕도로 향하며 해가 떠 있는 동안에는 쉬지 않고 이동했다. 그리고 해가 지면 곧바로 병사들에게 휴식을 주는 한편, 지휘관들을 불러모아 군사회의를 진행했다.
7천이나 되는 대병력을 이끌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천 명을 이끌 때와는 해야 할 일도, 짊어져야 하는 책임감도 비할 수 없었다.
때문에 군터는 매일 같이, 매 순간 고민했다. 그리고 그 고민을 휘하 지휘관들과 공유했다.
"이미 다들 들어서 알고 있겠지만 전황이 그리 좋지 않은 것 같소. 최악을 가정한다면, 우리가 당도하기 전에 칸디시아렌 각하의 군세가 패퇴해버릴지도 모르지."
"으음."
"설마 그러기야 하겠습니까?"
침음을 흘리면서도 설마 그러기야 하겠냐는 반응이다. 하도 들려오는 소식들이 우중충한 것들 뿐이라 전황이 상당히 안 좋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접 본 것이 아니기에 '설마'하는 희망적인 기대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전과는 다르오. 놈들은 공성을 위한 준비를 해왔소. 그리고 그것이 안타깝게도 현재까지 잘 먹히고 있는 것 같고."
군터는 비관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일관되게 담담한 목소리와 기색을 유지했다. 그 덕에 그의 이야기를 듣는 지휘관들은 조금 더 침착하게 그의 말을 경청할 수 있었다.
"이전까지 사용하던 전술로는 힘들다는 게 내 생각이오. 진지를 구축하고 버틴다거나, 성 안으로 들어가 성벽을 방패 삼는다거나 하는 것 말이오."
"그럼 어찌 해야겠습니까?"
"모르겠소."
"예?"
헛바람 빠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뭔가 대단한 대답을 기대라도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군터는 정말로 그들에게 내줄 답이 없었다.
이제껏 계속 머리를 굴려왔지만 이렇다 할 답은 나오지 않았다. 위글로우에서 떠나기 전에도 수하들과 머리를 맞대고 궁리를 했지만 딱히 그럴듯한 생각은 나오지 않았다.
직접 적을 보지도 못하고 얼핏 들은 정보만으로 대응을 구상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럼에도 현재까지 들은 것만을 토대로 이런저런 생각을 거듭했으나, 그저 막막함만이 더해질 뿐이었다.
'수성도 힘들고, 야전도 힘들다.'
기병 전력은 건재할 터였다. 초원인들에게 있어 병사는 곧 기병이니까. 설인이라는, 정체 모를 놈들이 더해졌다고는 해도 대다수 병력은 기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병력에서 압도하지 못하는 이상, 동수에서 야전을 벌이는 것은 힘들다.
게다가 이쪽은 병력 구성부터가 보병 위주였다. 기병이라고는 고작해야 2천도 되지 않았다. 그마저도 반절은 위글로우에서 이끌고 온 군터의 직속 병력이었다.
거기에 더해서, 이 7천 병력은 본래 소속이 다른 여섯 무리가 합쳐진 연합군이다. 이는 군의 기강부터 시작해 여러 면에서 삐걱거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에 전투라도 벌어지면 바로 그걸 알 수 있을 것이다.
'가장 급한 건 이거로군.'
왕도로 가는 동안. 그리고 왕도에서 다시 북부의 전선으로 가는 동안 최대한 이 중구난방인 군대를 하나의 군대로 만들어놔야 했다. 일단 이쪽이 갖출 수 있는 준비는 다 갖춘 다음에야 적을 상대해도 상대할 수 있을 것이다.
군터는 이 점에 대해 휘하 지휘관들에게 이야기했다.
"옳은 말씀입니다."
"허나 이동하는 데만도 시일이 촉박한데, 그 사이에 뭔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단 열흘이라도 시간이 있었다면 간단한 훈련이라도 진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시간조차 없었다.
"백인대 단위로, 불침번과 정찰 임무를 영지 별로 섞어 운용하겠소."
부족하다. 생각 같아서는 행군까지도 백인대 단위로 쪼개어 섞어버리고 싶었지만,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로 숨가쁜 행군이 이어지고 있는 와중에 당장 그랬다가는 화합은커녕 불화만 잔뜩 생길 것이 분명하니 참았다.
'쉽지 않군.'
천 명을 이끌던 때와는 전혀 다르다. 일군(一軍)을 이끄는 위치에 있는다는 것이 이리도 버거운 일일 줄은 몰랐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없고 신경 쓰지 않아야 하는 것이 없다.
전투가 아니라 전쟁을 생각해야 한다. 이는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시야를 가져야 함을 의미했다.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그러고 나면 그 다음이 있겠지.'
여러 가지 생각들로 머리가 지끈거리는 와중에 군터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무언가를 깨달았다기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전장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왕도 배나시드에 도착했다. 벌써부터 지친 기색이 역력한 병사들을 뒤로 하고 군터는 곧장 왕궁으로 가 왕을 알현했다.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군. 다시 본다면 무투회에서일 줄 알았는데 말이지."
반가움이 담긴 목소리는 아니었다.
"코누디스 자작이 경을 어지간히 믿는 모양이네. 7천 병사를 휘하 기사에게 일임하다니 말이야."
얼핏 듣기에는 감탄하는 것 같았으나 그 안에 내재된 것은 노기(怒氣)였다. 군터는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왕과 영주 간의 신경전에 끼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다행스럽게도 왕은 이제 막 싸우러 나가는 장수에게 화풀이를 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왕도에 머물며 피로를 풀라 하고 싶지만, 상황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음이 애석하도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를 하는 왕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있으면서, 군터는 문득 드는 생각에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출세를 하긴 했군. '
십 수 년 전. 출세욕에 불타던 애송이가 지금은 왕의 앞에 홀로 자리하고 있다. 일군을 이끄는 장수가 되어서 말이다.
'생각보다는…….'
별 거 없다. 출세도, 왕이라는 이도.
"…그날 수천 명 앞에서 그러했듯, 전장에 나아가서도 용맹하게 싸워 승전보를 들려주기 바라네."
"전하와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우겠나이다."
하나마나 한 이야기들을 마치고, 군터는 왕궁을 나섰다. 들어갔을 때와 달라진 거라고는 허리춤에 왕이 하사한 검 한 자루가 덜렁거리며 달려 있다는 것뿐이었다.
"대…아니, 장군!"
아직 장군이라는 말이 입에 익지 않은 할렌이 그를 보자마자 달려왔다.
"급보입니다!"
"급보라니?"
"오테론에 일이 생긴 모양입니다!"
그 말에 군터의 얼굴이 얼음처럼 변했다.
"무슨 소리냐? 방금 궁에서 전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이다.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다."
"방금 넝마가 된 깃발을 든 전령이 남문으로 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전령이 수문병들에게 밝히길, 오테론 소속이라 했습니다! 지금쯤 궁에도 소식이……."
군터는 할렌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돌려 궁으로 향했다. 부름이 있기 전까지는 들어갈 수 없는 곳이 왕궁이나, 사안이 사안인 만큼 무례이더라도 직접 가서 확인을 해야 했다.
'오테론이라고?'
설마 함락을 당한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큰일이다. 적이 오테론을 점령했다면, 왕도까지도 사정권 안에 놓이는 것이다. 더 이상 북부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부름도 없이 입궁을 청했지만 받아들여졌다. 들어가는 길에 바삐 뛰어다니는 이들이 몇 보였다. 왕궁 내에서는 보폭까지 신경 써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저런 다급한 움직임은 뭔가 사단이 벌어져도 크게 벌어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가뜩이나 굳어져 있던 군터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변했다.
*
"오테론 함락이라."
프롱기우스 후작이 혀를 찼다. 그의 눈은 계속해서 탁자 위의 지도를 향했다.
"나쁜 예감은 항상 들어맞는군."
오테론이 함락됐다. 전령이 전하길, 채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고 했다. 예의 그 '괴물'이 이번에도 언급됐다. 도대체 어떤 괴물이기에 성문을 들이받아서 깬단 말인가? 들리는 말이 다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그야말로 살아 움직이는 공성병기다. 그것도 아주 파괴적인.
"각하. 이제 어찌합니까?"
그는 수하의 물음에 답하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을 떠올리고 연결 짓느라 그의 귀는 이미 오래 전에 닫힌 상태였다.
'왕도를 치지 않고 우회했다.'
불행 중 다행인 소식이다. 오테론을 함락시킨 적들은 그대로 남하하지 않고 돌아서서 칸디시아렌 공작이 버티고 있는 브라노스 쪽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베이고르에 더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길을 마다한 것이다. 적이 브라노스로 향했다는 건 배후의 위협을 남겨두지 않겠다는 뜻이며, 착실히 전쟁을 전개시키겠다는 의미다.
'오테론이 무너진 이상, 합류는 물 건너 갔다. 뭐, 이곳을 뚫는 일도 지난할 것 같지만…….'
지금 산 아래에 주둔하며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적들도 보통이 아니다. 그들을 뚫어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미리 남하를 했다면 좋았겠지만…….'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던 것이다. 영주가 영지를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브라노스를 중심으로 한 방어선은 칸디시아렌 공작을 중심으로 한 북부 영주들의 목숨 줄이나 다름 없다. 그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버텨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는가.'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었다.
'기대할 수 있는 건 셋.'
동부의 원군. 서남부의 원군. 그리고 왕도에서 끌어 모아줄 나머지.
지금쯤이면 오테론이 함락당했다는 소식도 왕도에 전해졌을 터. 그로 인해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테니 이전과는 달리 적극적으로 힘을 보태줄 것이다.
'더 내려올 적은 없을 거라는 것이 그나마 위안 거리군.'
베이고르도 여력이 없지만, 초원 쪽도 더 이상은 여력이 없을 것이다. 이러고도 더 남은 힘이 있다면 일찍이 타칸 연합이 무너졌겠는가.
'서부의 병력은 곧 도착한다.'
지도 위에 손으로 선을 그었다. 지지부진한 전투에서 눈을 떼고 전국을 머릿속에 그렸다.
'이곳에서 진득하게 있는 것도 나쁘지 않아. 지세의 우위를 점하고서야 균형을 맞췄으니, 동일하게 발이 묶인다면 저쪽이 손해를 지고 가는 셈이다.'
적도 마음이 급하지는 않다. 이쪽의 합류를 막아서는 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모양새다. 본군이 움직인다면 칸디시아렌 공작이 이끄는 북부군을 능히 깨부술 수 있을 거라 믿고 있는 것이다.
'서부의 원군이 합류한다면 적을 밀어낼 수 있다. 허면 문제는 동부인가? 지휘관이 바보가 아니길 기대하는 수밖에 없겠군.'
이상적인 경로는 곧장 바이로스로 향하는 것이다. 허나 적들이 오테론에 일부 병력을 주둔시켰다면 발이 묶일 수도 있다.
"장군. 어찌 해야……."
"하던 대로 하면 된다. 올라서려는 기미가 보이면 화살을 듬뿍 먹여주고, 목책을 이중 삼중으로 덧대라. 식수의 공급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상류 쪽에 감시병들을 4교대로 빈 틈 없이 돌리도록."
'북부군이 무너진다면 끝장이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무너지면 북부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더 이상 거리낄 것이 없게 된 적들이 거침 없이 남하를 시작하게 되면, 설령 전쟁에서 이긴다 한들 베이고르는 다시 일어서기 힘들 만큼 망가져버리고 말 것이다.
'결국은 시간 싸움인 것이야.'
전쟁은 북부에서 끝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이 나라에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