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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69화 (369/1,064)

369화

군터는 영주의 부름을 받고 영주관저로 향했다. 수하들과 논의한 지 고작 이틀 후였다.

"어서 오게. 얼굴은 매일 보았는데 어째 소원했던 것 같군."

"그렇습니까."

"자네가 돌아오고 나서 말이야. 따로 자리를 가진 적이 없지 않았나? 전에는 자주 불러 술도 하고 그랬었는데 말이지. 여러모로 바쁘다 보니 시간이 잘 나지 않는군."

군터는 그런 말을 하는 막시밀리언을 보았다.

눈 밑으로 전에는 짙은 그늘이 져 있었다. 전에도 없지는 않았지만 전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밤에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짐작했겠지만, 전처럼 아무 일 없이 그저 이야기나 나누자고 부른 건 아닐세."

그가 흐릿하게 웃었다. 군터는 무표정한 얼굴로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우리를 포함해 동부의 여섯 영지가 힘을 합치기로 했네. 사신이 돌아와야 정해지겠으나, 의논하여 대략적으로 나온 규모는 7천 가량이야. 결코 적지 않은 병력이지. 자네가 이들을 이끌어줬으면 하네."

7천. 그의 말처럼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다. 중앙 조정에서는 어찌 생각할지 몰라도, 이 정도면 동부에서도 보일 수 있는 성의는 다 보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관은 그런 대병력을 이끌어 본 경험이 없습니다."

"처음부터 경험이 있는 이가 어디에 있겠나. 지휘관으로서 1군을 이끌어본 경험은 없다 하나, 자네는 전장의 경험이 풍부하지. 어리석은 지휘관과도 함께 했었고, 뛰어난 지휘관과도 함께 했었어. 보고 겪으며 쌓은 것이 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자네는 신중한 사람이야. 그것을 알기에 내 믿고 맡길 수 있는 것이야."

믿고 맡긴다라. 듣기에 좋은 말인데, 어째 조금도 기쁘지가 않을까. 그가 말하는 '믿음'이라는 말이 공허하게 느껴져서일까?

"그리 말씀해주시니, 부족한 몸이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군터는 고분고분한 태도를 보이라는 야스메티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어차피 이 일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니, 말이 길어질 필요는 없다.

"북부의 전황이 아무래도 썩 좋지 않은 것 같네. 일전에는 별 것 아니라는 듯이 이야기를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게 아닌 것 같아."

"칸디시아렌 공작이 북부의 군세를 집결시켰다 들었습니다."

"적을 패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무너지지 않기 위한 것이었네. 끌어 모을 수 있을 만큼 끌어 모았는데도 버티는 것이 고작인 모양이더군."

"프롱기우스 후작도 있지 않습니까."

그는 타칸 연합과의 전쟁에서 제1공을 세웠던, 능력만큼은 의심할 바 없는 유능한 군인이다. 프롱기우스 후작의 영지는 동부와 북부에 걸쳐져 있었는데, 이렇게까지 난리가 났다면 그도 분명 참전했을 터.

"그는 조금 늦게 참전한 모양이더군. 허나 그 역시 뚜렷한 수를 내지는 못하고 있던 것 같네. 자잘한 승전보 몇 개는 들어온 것 같지만, 적의 주력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인 모양이야."

"그 정도 입니까……."

얼핏 들었던 것 이상으로 상당히 심각한 상황인 것 같았다.

"듣기로는 적들이 거대한 괴물을 부린다더군. 화살도 소용 없고, 성문도 으깨버린다는데……. 과장이 어느 정도 섞였다 해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무기를 손에 쥔 것은 분명해 보이네."

"……."

괴물이라. 성문을 으깨버린다는 이야기가 나온 걸로 봐서는 아무래도 공성병기로 이용이 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이는 적들이 이전과는 다른 전술을 들고 나왔음을 의미한다.

예전 타칸 연합의 군대는 기병 전력을 활용한 야전을 주 전술로 삼았었다. 그렇기에 그들을 상대할 때는 단단하게 진지를 구축한 상태에서 싸우거나, 그게 아니면 아예 성벽을 방패 삼아 버티는 식으로 대응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들어온 정보들을 놓고 보면, 이제 그런 식으로는 상대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바로 이 같은 이유로 칸디시아렌 공작이 이끄는 북부군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겠지.

"왕도로 돌아간 사신은 곧 돌아올 것이야. 위급한 상황이니 만큼 밤낮으로 달려 오겠지. 그가 왕명을 가지고 오면 곧바로 출병해야 하네. 그러니 그 전까지 할 수 있는 준비는 다 해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말하도록 하고. 내 할 수 있는 지원은 다 해주겠네."

무거운 이야기를 마치고서는 가볍게 술 몇 잔을 마셨다. 제국의 어디 먼 곳에서 가져온 귀한 술이라 하는데, 그런 술을 마시면서도 술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7천 병력을 이끌라는 명을 받은 순간부터, 군터의 머릿속에는 어찌 군을 이끌고 어찌 적과 싸워야 할지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

급한 놈이 뛰게 되어 있다. 왕도로 돌아갔던 사신이 그러했다. 만족스럽지 못한 결과를 가지고 도망치듯 왕도로 돌아갔던 사신은 다시 도망치듯 위글로우로 말을 달려왔다.

"정병 7천. 동부가 내어놓을 수 있는 최대네. 전하께서는 피를 짜낸 동부에게 무엇을 허락하셨는가?"

"독자적인 지휘권과 수인병 오백입니다. 더불어 왕도에 도착하였을 때 보급물자 또한 풍족히 지원할 것입니다."

"좋군. 수인병이라 함은…일전에 왕궁 술사들이 연구한다던 그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렇다 한들, 고작 오백으로 무엇을 할 수 있겠나?"

"장담컨대 천 명 이상의 역할을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호오. 그래?"

"다만 군율을 따르기는 하나 시술의 부작용으로 원체 성미들이 거칠어져 어지간한 지휘관이 아니고서는 그들을 제대로 통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휘하의 군터 경이 나설 것이네. 그가 휘어잡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병사라 할 수 없겠지."

"군터 경이라면 그……."

"왕도 무투회에서 이름을 알렸었지."

"아아. 기억이 나는군요."

"그래. 어떤가? 이만하면 전하의 기대에 부응했다 할 수 있지 않겠나?"

"…좋습니다. 병력은 언제쯤 출발할 수 있습니까?"

"이미 다섯 영지의 병사들이 위글로우로 오고 있네. 사흘 안에 집결할 것이고, 하루를 쉰 뒤에 곧바로 출병할 것이야."

"더 서두를 수는 없겠습니까?"

"북부까지 가는 길이 결코 짧지 않은데, 싸우기도 전에 병사들이 퍼지면 어쩌겠는가?"

"제가 왕도에서 다시 출발하기 전에 급보가 당도했습니다. 카베루그 요새가 함락당했다더군요."

막시밀리언의 표정이 말을 하는 사신처럼 굳어졌다.

"…빠르군."

"하루를 버티지 못했다 합니다. 아무리 새로 쌓은 성벽이 전처럼 튼튼하지는 못하다 해도, 초원을 바라보며 건설한 요새가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그 '괴물'인가?"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에 중요하겠습니까. 중요한 건 오테론이 하루를 버티지 못했고, 칸디시아렌 각하께서도 얼마나 더 버티실지 모른다는 거지요."

"그렇다 해도, 서두른다고 해서 나아질 것은 하나 없네."

"재촉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제가 군문의 일에 대해 무엇을 알겠습니까. 제가 잘 하는 것은 빈 종이에 글을 쓰는 일이지, 칼을 들고 전장에 나가 싸우는 일이 아닙니다. 다만 저는, 작금의 전황이 정말로 심상치 않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을 뿐입니다.

어쩌면 지난 타칸 연합과의 일전 때보다도 더 심각한 상황인지도 모릅니다. 아국의 전력은 그때보다 반절은 줄었는데, 밀고 내려오는 적들의 군세는 강성하기 그지없습니다."

"……."

"여러모로 이해득실을 따지는 것도 좋지만, 그것도 나라가 온전해야 가능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부디 이 난국을 타개하는 데에 힘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내 어찌 자네와 마음이 다르겠나. 나 역시 이 나라의 신하고, 이 나라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할 것이네. 염려 말게. 한동안 쉬지도 못하고 계속 움직이느라 지쳤을 텐데 좀 쉬도록 하고. 닷새 안에 군대가 출병할 것이니 자네도 그때 함께 움직이면 되지 않겠나."

"허면 부탁 드리겠습니다."

*

센트리올, 젠탄테르, 아힌키우스, 사보스, 아모트.

다섯 영지에서 보낸 병력이 도합 사천 오백. 코누다이안의 이천 오백 병력을 합하여 도합 칠천.

군터는 7천 병력이 모이고 코누다이안에서 머무는 하룻동안 다섯 영지의 지휘관들과 면식을 익혔다.

"시어문드라 합니다."

"칼리온입니다. 명성이 자자하신 군터 경께서 이끌어주시니 안심이 되는군요."

유난히 말이 긴 칼리온이라는 사내는 젠탄테르에서 온 무관이었다. 코누디스 가문과 젠탄테르 가문은 통혼으로 연을 맺은 만큼, 그 수하들도 더 가까운 감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사실 군터는 그런 것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었지만 살갑게 다가오는 이를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다. 어찌 되었든 일단 일군을 이끌게 된 이상, 밑의 지휘관들과도 되도록이면 좋은 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니까.

"루비오입니다."

"지스에른입니다."

"오로보르입니다."

그들은 간략하게 통성명을 마쳤다.

"이미 영주님께 전해 들었겠지만, 내일 곧바로 출병을 하게 될 거요. 중간에 왕도를 들르긴 하겠으나 거기서도 시간을 지체하는 일 없이 계속해서움직이게 될 것이니 실상 이곳에서 머무는 오늘 하루가 당분간 취할 수 있는 휴식의 전부일 것이오."

군터는 그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마주치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 동안 충분히 쉬도록 하시오. 병사들도 술만 마시지 않는 선에서 풀어주시오. 앞으로는 숨이 막힐 정도로 고삐를 당겨야 할 테니."

그 말은 그들에게 전하는 말이었으나 군터 자신에게도 해당 되는 말이었다.

군터는 그날 하루를 모두 가족들과 함께 했다.

전장이 아니더라도 길게 떠날 때마다 항상 그랬듯, 벨리사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는 것이 고역이었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그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표정 관리를 한다고는 하지만, 억지로 짓는 밝은 표정 뒤의 그늘을 눈치채지 못할 군터가 아니었다.

게다가 이제는 전과 달리 어느 정도 머리가 굵은 자식들이 있어 더욱 떠나기가 힘들었다. 실비아는 대놓고 우울함을 드러냈고, 보리스는…….

"저도 따라가겠습니다."

"안 된다."

"아버지의 아들이나, 동시에 저 또한 코누다이안의 군인입니다. 군인이 전장에 나가는 것이 어찌……."

"싸우러 떠나는 자가 있으면 남아서 지키는 자도 있는 법이다. 너는 남아서 이곳을 지켜라. 살라스와 함께 말이다."

보리스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아 보였다. 그러나 듣지 않았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렇게 대화가 끊어진 후, 그들이 다시 마주보며 말을 나눈 것은 떠나기 직전이나 되어서였다.

둥! 둥! 둥!

도시 내 모든 시민들의 배웅을 받으며, 군터가 이끄는 동부의 7천 병력이 위글로우의 성문을 나섰다.

"불만스럽지 않으냐?"

"예? 뭐가 말씀입니까?"

"거의 항상 무장을 하고 나설 때마다 너를 데려가지 않느냐."

할렌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씀을. 오히려 살라스님이 저를 부러워하십니다. 맡은 직책이 직책이니 따라 나서지 못함이 당연한데, 당신은 칼에 녹만 슬어간다고 이번에도 푸념을 하셨습니다."

"그런가."

이번에는 군터가 흐릿하게 웃었다.

수천 병사의 가장 앞에서 말을 모는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막 떠오르는 태양의 빛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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