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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68화 (368/1,064)

368화

영주가 동부의 영주들과 회합을 가졌다. 대리인을 보내 의견을 조율하는 것이 아니라 영주들이 직접 몸을 움직인 것이다. 이번에 내려온 왕명에 대해 논하기 위함이었다.

"여섯 개 영지에서 병력 오천. 적은 수는 아니지만, 조정에서 불만이 많겠군요."

영주는 수하들을 불러모은 자리에서 사신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알려주었다. 그가 사신에게 약조한 것은 동부의 이름으로 파병하는 병력 오천. 그러나 살라스의 말처럼, 이는 조정이나 왕실에서 만족할 만한 수는 아니었다.

"여섯 영지에서 오천이면 한 영지당 천도 되지 않는데, 조정에서 납득하겠습니까?"

할렌의 의구심은 야스메티가 곧바로 풀어주었다.

"물론 납득하지 못하겠지요. 영주께서도 그걸 아실 겁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먹히지 않을 제안을 던진 것이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본래 협상이란 서로가 던진 것을 조금씩 깎아가며 타협점을 찾아가는 것 아니겠습니까. 일단 들은 것으로만 판단하자면, 조정에서는 아무것도 내주지 않은 채로 병력을 내놓으라 했습니다. 이건 말이 좋아 왕명이지, 실은 강탈이 아닙니까? 이래서야 돌려받을 수 있다 보장도 하지 못하지요."

"협상을 하기 위해 일부러 조정을 자극했다 이 말인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조정에서는 5천으로 만족하지 못할 테고, 거기서 더 요구하기 위해서는 이쪽의 조건을 어느 정도는 들어줘야겠지요."

이야기를 들으며 든 생각은, '영주답다'라는 것이다. 그는 상인의 자식이며, 본인 역시 그러한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기질뿐 아니라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줄다리기를 할 줄 알았고, 그리하여 끝내 원하는 것을 얻어낸다.

이번에도 그럴까? 장담할 수는 없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일이 흘러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파병은 확정적입니다."

"그런가."

"이렇게 되면, 장주님께서 나서시게 되는 게 아닙니까? 설마 영주님이 직접 움직이지는 않으실 테고, 미트라스는 폴사도에 나가 있으니 결국 장주님 밖에는……."

다른 이를 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동부의 이름으로 군사를 보내게 된다면 지휘관의 지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또한 그 지휘관은 코누다이안에서 나와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들을 여러모로 따져보면 가장 유력한 후보는 군터일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조금 불안하군요. 영주님은 장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틈을 타 그 여자를 부인으로 들이셨습니다. 영주님이 장주님을 의식하고 계시는 것이 분명해졌는데, 장주님께서 전장으로 나가게 되신다면……."

살라스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이는 군터 역시 생각하던 바였다.

"그렇다 해도 달리 방법이 없지 않겠나. 명이 떨어지면 따르는 것이 군인이다."

"그렇습니다. 달리 방법이 없지요. 허나 살라스님께서 우려하신 것처럼 별 다른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전에도 몇 번 말씀을 드렸으나, 명분 없이는 어떤 일도 벌일 수 없는 법이니까요. 특히 수하가 주인을 위해 전장으로 나가 있는 사이에 무슨 일을 벌인다는 건…다른 이들의 섬김을 받아야 하는 입장에서는 치명적이지요."

할렌이 불퉁하게 말했다.

"그 명분이라는 것 하나만 믿어야 한단 말인가?"

"명분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어떤 이들은 그 보이지도 않는 것을 천금보다 더 귀히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게 말해도 난 모르겠지만,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군터가 자리를 비웠던 사이에 야스메티는 그를 고깝게 보던 이들로부터 어느 정도의 신뢰를 얻는 데 성공했다. 군터의 부재로 인해 몇몇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그가 머리를 써서 상황을 타개한 것이 주효했다.

나이도 어리고 타고난 외관 때문에 여러모로 불이익을 얻을 수밖에 없는 그가 자신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방법은 능력을 보이는 것뿐이었다. 야스메티는 그것을 훌륭히 해냈고, 지금은 아무도 그의 말을 가벼이 여기지 않았다.

이전에는 군터의 말이나, 그가 보이는 신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따랐다며 지금은 자발적으로 그를 신뢰하고 존중했다.

"그럼 네 말은, 가만히 출병을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냐?"

바오룸이 말했다. 그는 동생이 보다 번뜩이는 묘책을 내주길 바라는 듯했다.

"형님. 대개의 경우에, 조급함은 일을 망칩니다. 달갑지 않은 일이 닥칠 때마다 뭔가 돌파구를 내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합니다. 때때로 마음에 들지 않는 흐름에도 순응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바로 그럴 때이군요."

야스메티가 이번에는 군터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장주님. 영주님께서 명을 내리시거든 망설임 없이 따르십시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입니다. 영주님께서 장주님에게 품고 있는 불신을 조금이라도 희석시키십시오."

"이전에 한 말과는 조금 다른 것 같은데."

"군주가 권신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하나, 경계와 적대는 다릅니다. 장주님께서는 영주님께서 장주님을 적대한다면 감당할 수 있다 여기십니까?"

감당이라. 군터는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간단히 답을 냈다.

"어렵겠지."

지금 그가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영주로부터 나왔다. 기사의 작위도, 그의 관직도, 녹봉도 영주로부터 나온다.

심지어 그가 거느리고 있는 수하들조차 영주에게서 녹봉을 받는다. 극단적으로, 지금 당장이라도 영주가 그에게 어떤 죄든 씌워서 하옥시킨다면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다.

영주를 거스르는 것조차 감수하고 그를 따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수하들과 함께 영주관저로 침입해 칼부림을 한다 해도, 그뿐이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모르겠군.'

갑자기 씁쓸해졌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종종 영주와 단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던 때가 떠올랐다.

그는 영주가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시절부터 믿고 따랐었다. 그의 명을 거스른 적이 없었고, 실망시킨 적 또한 없었다.

그런 그를 영주 또한 신뢰했었다. 주인과 신하가 아니라 인간 대 인간으로서.

그런데 지금. 그들은 서로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심지어 이렇게 극단적인 상상까지 하고 있다. 영주 역시 그러할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돌이킬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결국 야스메티가 말했던 대로다. 이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는 잃을 것을 염려할 필요가 없으니 눈을 날카롭게 뜰 필요가 없다. 하지만 가진 것이 많아 잃을 것도 많은 자는 자연히 다가오는 모든 것에 눈을 부릅뜨게 되는 것이다.

"그리 하지."

마음이 복잡해졌다.

수하들이 돌아가고 난 후, 군터는 연무장에서 몸이 삐걱거릴 때까지 수련을 거듭했다. 보리스가 멀찍이 떨어져 그와 함께 했으나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가 떨어졌다.

*

쿵! 쿵!

네 번 굉음이 울리고, 두터운 성문이 깨져나갔다. 성벽 위에서 외치는 병사들의 처절한 목소리는 뻥 뚫린 성문으로 밀어닥치는 적들을 막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미 병사들은 지쳐 있었고, 두려움에 젖어 있었다. 그들이 하는 것은 저항이 아닌 발악이었다. 죽기 싫어 치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한 놈도 살려두지 마라. 병사든 백성이든, 모조리 죽여라."

몰아치는 한기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전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명을 받은 전사들은 지시를 충실히 이행했다. 도시 전체에 비명이 가득 차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리고 그 찢어지는 비명들이 사그라지는 것도 역시 순식간이었다.

"덥군. 더워."

"앞으로는 더 더워질 겁니다."

홀로 서 있던 사내도 거한이었으나, 그의 등 뒤로 다가온 자는 그보다 더한 거구였다. 머리 세 개는 차이가 나는, 그야말로 거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자였다. 덥수룩한 수염이 가슴 한복판까지 내려왔고, 부리부리한 눈은 반쯤 감겨 있음에도 형형했다.

사내, 콰이렌은 하늘을 보고 있는 거인에게 몸을 돌렸다.

"제가 기억하기로, 이 도시는 대족장과 함께 가장 먼저 무너뜨린 제국의 도시였습니다. 초원을 벗어나 첫 번째로 전투다운 전투를 치른 곳이었지요."

"오. 그런가?"

아마 이름이 오테론이었을 것이다. 바르바피들과 함께 이 도시의 성벽을 넘었었다. 이 도시를 무너뜨렸을 때, 그는 진정 할 수 있겠다는 믿음을 얻었다.

"어르신께 이런 부탁을 드려 죄송할 뿐입니다."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 나도 내가 끼고 싶어서 낀 것일 뿐이야. 자네는 내게 모든 것을 잃었다 말했지만, 나야말로 모든 것을 잃었어. 그 아이는 내게 있어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걸걸한 목소리에 짙은 회한이 어렸다. 그의 목소리가 거칠어질수록 한기는 더욱 짙어졌다. 콰이렌은 그의 드러난 팔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물끄러미 보았다.

"사위 녀석에게 그 아이를 보낸 것을 많이 후회했네. 처음 그 아이가 초원으로 가고 얼마간 그러했고, 그 아이가 사위를 따라 남쪽 땅으로 간다고 했을 때도 그랬어. 그리고 그 아이가…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로 크게 후회했지."

"…면목이 없습니다."

"이것은 거창한 싸움이 아니야. 그저 복수전일 뿐이지. 우리 둘 모두, 모든 것을 잃었으니 이 땅에 사는 놈들에게도 그리 해줄 것이야."

"예. 그리 될 것입니다."

"그러니 감상에 젖는 건 집어치우게. 그런 사치스런 생각은 마음 속의 분노를 좀먹는 법이거든."

"유념하겠습니다."

구오오오오오-!

귀를 먹먹하게 만드는 포효가 울렸다. 거인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성벽 아래 쪽을 내려다보며 고함을 질렀다.

"뭣들 하는 게야!"

"아니, 족장! 녀석이 짜증이 난 모양이오!"

"그럼 먹이를 주면 되지 않나! 배라도 채우면 덜하겠지!"

사납게 쏘아붙인 그가 투덜거렸다.

"젠장! 이곳은 너무 덥단 말이야!"

갑옷도 걸치지 않고 상체는 맨몸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음에도 그는 덥다는 말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의 몸을 거의 통째로 가리다시피 난 수북한 체모 때문은 아닌 듯했다.

"걱정이군요. 말씀 드렸다시피, 이제부터는 지금보다 더 더워질 겁니다."

"그때는 지금 놀고 있는 식충이들이 일을 하면 되니 신경 쓸 필요 없네. 자네는 어떤 놈들과 어디서 싸울지나 생각하면 돼."

"곧장 놈들의 수도로 갈 겁니다."

"모여있는 잡놈들을 먼저 박살낸 후에 말이지?"

"예."

구오오오오오-!

"먹이를 먹이란 말이야 이 얼간이 자식들아!"

"아니, 이 놈이 지금 잔뜩 흥분해 있어서……."

"에잇! 멍청한 놈들!"

거인이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콰이렌은 구름이 깔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감았다.

'대족장. 반드시 복수하겠습니다.'

처절했던 그날의 전장이 감은 눈에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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