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군터-367화 (367/1,064)

367화

어쩌면 조금은 가볍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미 한 번 멸렬하여 도주한 패잔 세력이기에, 따뜻한 땅에 대한 미련을 이기지 못하고 없는 힘을 짜내 덤벼드는 것이라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베이고르가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초장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해 넘어갔다고 생각한 영지가 두 개에서 네 개로 늘어나고, 칸디시아렌 공작이 규합한 북부의 군대가 적들을 밀어내지 못하고서야 베이고르의 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었다.

부랴부랴 2차 지원군을 파병하고, 동부와 남부, 서부의 영주들에게 다시금 병력을 보낼 것을 명했다. 상대적으로 북부와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영지들에서는 어느 정도 적극적으로 반응을 했으나, 상대적으로 북부에서 멀리 떨어진 영지들 같은 경우는 아직까지도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는 곳이 적지 않았다.

코누다이안은 바로 그런 미온적인 곳들 중 하나였다.

"각하! 국난의 위기입니다!"

사신으로 온 남작이 언성을 높였다. 분노와 절박함, 기타 뜨거운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목소리에 막시밀리언은 난처하다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알고 있네. 알고 있어. 북부의 전황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음을 내 어찌 모르겠나. 하지만 보게. 이곳에서 병력을 대거 빼낸다면 왕국의 동문이 빗장을 푸는 것과 다르지 않아."

"7황자와는 화친의 맹약을 맺지 않았습니까."

되도 않는 변명 말라는 듯 단호하게 말하는 남작. 그러자 이번에는 막시밀리언이 언성을 높였다.

"말 뿐인 약속이지! 화친이니 동맹이니 하는 것이 얼마나 부질 없는지 그대는 모르는가? 당장 이곳에서 열흘 거리에 적포장군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네. 파헨델에서 빠르게 말을 달린다면 이곳까지 고작 열흘이란 말이네! 코누다이안이 뚫리면 동부가 위태로워지고, 동부가 위태로워지면 그때는 왕국 전역이 창칼 위에 등을 기대게 되는 것이야! 왜 내가 이렇게 곤혹스러워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나?"

서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사신으로 온 남작은 왕명이란 말을 되풀이 했고, 막시밀리언은 7황자의 군세가 언제든 동부를 들이칠 수 있음을 피력했다.

서로가 서로의 말을 듣지 않으며 자기 할 말만 계속 밀어붙이니 대화에 진전이 이루어질 리 없었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것은 사신이었다. 이 영양가 없는 대화가 늘어지고 시간이 늘어질수록 곤란한 것은 그였기 때문이다.

"살펴주십시오 각하. 전하께서는 얼마 전에도 각하의 사정을 봐주셨습니다. 이번에는 각하께서 왕명을 받드시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말을 재미있게 하는군. 내가 언제 왕명을 받들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 이전 번에는 전하께서 이 부족한 신하의 의견을 헤아려주시어 명을 거두어주신 것이네. 그러니 난 단 한 번도 왕명을 거스른 적이 없는 것이지."

"좋습니다. 이제 이런 소모적인 논쟁은 그만두고 우리 둘 모두 솔직해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전 번에는 전하께서 왕명을 거두어주셨다고 하나, 이번에는 아닙니다. 그렇다면 왕명을 따르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네가 왕도로 돌아가 전하께 이 몸의 뜻을 전해주시게. 그러고서도 전하께서 명을 거두어주시지 않는다면, 그때는 나도 따르겠네."

기어이 사신은 이를 갈았다.

'이 자가 어찌 이리도 무도하단 말인가!'

마음 같아서는 불충의 죄를 물어 당장이라도 무릎을 꿇리고 싶었으나, 그것은 불가능했다. 당장 그가 섬기는 왕조차도 무작정 병사를 보내기를 강권할 수 없어 그를 사신으로 보내지 않았던가.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자작은 비록 자작 위에 머물러 있으나, 동부를 다스리는 맹주나 마찬가지인 위치였다. 국왕을 제외하고 베이고르의 최고 권력자 3인을 뽑는다면 능히 이름을 올릴 수 있는 이인 것이다.

물론 그 자리는 세 번째이며 앞선 두 명과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가 왕국의 손 꼽히는 권력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지금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 그의 힘은 더욱 그 위상이 커질 수밖에 없다. 만약 전쟁이 일어난 곳이 북부가 아닌 동부였다면 지금쯤 그들의 상황은 반대가 되었겠으나, 현실은 이렇다.

실질적인 '힘'이 절실한 상황에 동부의 맹주인 그의 힘은 왕조차도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할 정도다. 그렇기에 그가 이런 오만한 태도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충이니 불경이니 하는 말을 속 시원히 입에 담을 수 없는 것이고.

"전하께서는 제게 확답을 받아오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다. 막중한 책임감이 그의 등을 받쳤다. 이 간사한 자의 말에 휘둘리기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흠."

사신이 병력을 내어주거나, 아니면 목을 치라는 듯이 결연한 태도를 보이니 막시밀리언도 교묘하게 말을 돌리는 것을 그만두었다. 머리를 짚었던 손을 떼고, 일부러 찡그렸던 표정도 풀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지. 각자의 사정이 있는 법이야. 그렇지 않나? 내겐 나의 사정이, 자네에겐 자네의 사정이 있지."

"……."

"이렇게 하지. 자네는 우선 내가 말한 대로 왕도로 돌아가 전하를 뵙고 내 말을 전해주시게."

"각하!"

"자네가 그리 해주는 동안, 나는 동부의 영주들과 모여 앉아 출병을 논하겠네."

막시밀리언이 직접 출병을 입에 담자 일그러졌던 사신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그 말씀은?"

"나도 아네. 여기서는 보다 대국적인 시야와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을. 그러니 결국 문제는 규모겠지. 전하께서는 이 몸에게 2천 병력을 보내라 하시지만, 그것은 무리야. 대관절 일개 자작령에서 2천 병력이 빠지게 되면 영지는 어찌 지킨단 말인가? 하물며 코누다이안은 제국과 맞닿는 곳이네. 이 점은 전하께서도 다시 고려를 해주셔야 하는 부분이야."

분명히, 그의 말처럼 2천 병력은 일개 자작령에 요구하기에는 과한 규모가 맞다. 그러나 코누다이안은 '일개' 자작령이 아니었다. 왕과 조정은 바보가 아니다.

그들은 코누다이안이, 코누디스 자작이 가진 저력을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애당초 그가 정말 '일개' 자작령을 보유한 '일개' 자작이었다면 어찌 리에론에 맞설 생각을 할 수 있었겠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면서도, 사신은 일단 이어지는 가만히 말을 들었다. 왕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는 것은 불가하다는 걸 이미 확인했다. 그렇다면 이제 필요한 것은 협상이다.

"말씀하신 동부의 영주들이란, 각하와 함께 하는 다섯 분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렇네."

"모여 앉아 담소만 나누다가 끝난다면 의미가 없습니다."

"확실하게 출병에 대해 논하고, 결론까지 내겠네."

"그 결론을 미리 들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확언을 하겠는가. 허나 그럼에도 약조를 한다면, 동부의 이름으로 오천 병력을 약속하겠네."

"너무 적습니다. 말씀하신 대로라면 여섯 영지에서 오천인 셈인데, 나라가 위기에 처했거늘 어찌 그리 몸을 사리십니까."

"몸을 사리다니! 말 조심하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인 이후 처음으로 터진 막시밀리언의 노성에 사신은 자연스레 움찔했다.

"몸을 사린다? 허면 내 묻고 싶군! 중앙에 계신 높으신 분들께서는 이 난국의 타개를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는가? 정병 수만이라도 내어놓으셨던가? 그게 아니라면 수만 병력을 움직일 군자금이라도? 내 알기로는, 이 나라를 움직인다는 분들께서 하신 일이라고는 왕도의 대전에서 목소리만 열심히 내신 걸로 아는데? 혹 내가 잘못 알고 있는 점이 있다면 얼마든지 말해주시게."

"말씀이 과하십니다. 지난 두 차례의 전쟁으로 중부와 서부가 피폐해졌음을 각하께서도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내게 전쟁에 대해 논하지 말게. 이 몸은 자네가 말한 그 전쟁에서 직접 군을 이끌고 종군한 사람일세. 타칸의 대군과도 싸웠고, 제국의 흑포장군과도 싸웠지. 지난 전쟁에서 나와 내 병사들이 뿌린 피가 적지 않으니, 다시 말하건대 내 앞에서 전쟁을 논하지는 말게나."

피를 흘린 것은 병사들이요, 백성들이다. 무거운 엉덩이를 지닌 체면 차리게 좋아하는 조정의 권신들이 아니라.

막시밀리언은 그 점을 둘러서 강조했고, 사신은 입을 다물었다.

"비단 그것은 나 뿐만이 아니지. 자네가 묶어서 이야기하는 영주들 역시 지난 전쟁에 어떤 식으로든 참여한 이들일세.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을 풍요로움이라 보았다면, 그 풍요의 밑바닥에 지나간 시간에 흘린 우리의 피가 베어있음을 알아야 할 것이야."

말렸다.

사신은 입술을 씹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다.

"돌아가 전하께 말씀 올리겠습니다만, 조금은 더 성의를 보이셔야 할 겁니다."

"그러길 원하신다면 적어도 몇 가지 편의 정도는 봐 주셔야 할 걸세. 전하께 그 점도 말씀 올리게."

"…그리하겠습니다."

*

사신을 돌려보내고, 막시밀리언은 라일라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녀와 함께 있는 그의 아들을 보러 간 것이다.

'피곤하군.'

사신을 대하는 일은 겉으로 보기에는 여유로워 보일지 몰라도, 실은 매우 주의를 기울인 것이었다. 아무리 허술하고 어리석은 자가 상대라 할지라도, 그가 전하는 것은 왕도에 있는 왕의 뜻이며 조정의 뜻이니까 말이다.

까딱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하는 날에는 크게 손해를 입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을 잃거나 부담을 얻을 수 있으니 말 한 마디를 내기 전에도 몇 번의 검토가 필요했다.

"영주님."

"코르넬."

시종들 몇과 함께 걷고 있는데 코르넬이 다가왔다. 허리춤에 검을 차고는 있으나, 주름진 얼굴이며 이제는 흰색이 거의 대부분인 머리카락 등이 그가 더 이상 현역이 아님을 말해주었다.

"3부인을 뵈러 가십니까."

"그래. 아들 놈의 얼굴이 보고 싶군. 아는가? 그 놈이 요즘 들어 부쩍 재롱이 늘었다네."

갈라진 입술이 흐릿하게 미소를 머금었다.

"지쳐 보이십니다."

"쉬운 일은 아니었지 않은가."

왕의 사신을 상대하는 일이다. 아무리 상대가 만만한 자였다고 해도, 준비하는 과정부터 시작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나 코르넬의 말도 맞다. 확실히 지쳤다.

요즘 들어 부쩍 그렇다. 그는 자신의 몸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단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타고난 체질이라는 것은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몸에 흐르는 피는 강건한 무인의 것이 아니라 상인의 것이었으니까. 노력만으로는 안 되는 것도 있는 법이다.

거기에 귀여운 아들 놈의 존재도 한 몫 했다. 그 자그마한 놈을 보고 있자면, 종종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없던 잡생각이 생기고 마음이 흐트러진다. 생각 없이 앞으로 내딛던 발이 무거워지고,피로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코르넬."

"예."

"자네는 어떤가?"

"예? 무슨 말씀이신지."

"만족하나? 지금의 자네 모습 말이야. 나를 따르기 전의 자네가 지금의 자네를 보았다면, 만족스러워 했겠는가?"

코르넬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만족스러워 했을 것입니다."

"…그런가."

느릿하게 옮기는 발걸음이 상념을 밟았다.

어제 저녁에 온 비가 자아낸 눅눅한 공기가 걸어가는 두 사람의 곁을 적막하게 흘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