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6화
"음. 솔직히 말씀 드려, 전혀 예상치 못한 움직임이었습니다."
야스메티는 깔끔하게 인정부터 했다. 군터는 그를 책망하고픈 마음은 전혀 없었다. 야스메티의 눈이 하늘에 달린 것도 아닌데, 이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이었으니까.
단순히 의아했을 뿐이다. 그의 생각으로는, 초원의 민족이 베이고르를 상대로 대대적인 군사적 움직임을 전개할 만한 여력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만약 그럴 힘이 있었다면 조금 더 일찍 나섰을 것이다.
야스메티도 그와 같은 생각이었던 듯싶었다.
"저는 그들은 베이고르를 상대로 칼을 빼 들 만한 상황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병력도 병력이지만, 무엇보다도 그들을 한데 묶을 구심점이 사라졌으니까 말입니다."
초원의 민족은 본래 한데 뭉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그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이었고.
하지만 그 유일했던 초원의 왕은 죽었다. 구심점이 사라진 이상 초원은 전처럼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다.
"엄밀히 말해, 지금 난리를 피우고 있는 이들은 갈색초원의 부족들이 아닙니다. 더 정확하게는, 타르가이 베르겐을 충실히 따르던 몇몇 부족들과 '그 외'라고 해야겠지요."
"'그 외'라고?"
"이전부터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입니다. 타르가이 베르겐이 설원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다는, 다소 허무맹랑한 소문이 돌았었지요."
"눈의 여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혹시 들어본 적 있으십니까? 초원의 북쪽으로 계속 말을 달리다 보면 칼날 같은 바람이 몰아치는 혹한의 땅이 펼쳐진다는……."
"듣지 못했다."
초원의 민족이 정처 없이 유랑을 한다고는 하지만, 사실 그들도 움직이는 반경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었다. 선대로부터 이어져오는 지혜랄까. 어느 시기에 어디로 가면 말들을 먹일 풀이 자라는지, 사냥할 짐승들이 많은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런 것을 알지 못하고 주먹구구식으로 아무렇게나 떠돌아다녔다면 부족이 온전히 유지되기가 힘들다.
그렇기에 떠돌이가 아닌 이름과 나름의 전통이 있는 초원 부족들은 그들이 생활하는 '땅'이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완전히 한 곳에 머무르며 농사를 짓는 초원 밖의 인간들에 비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이런 연유로, 초원인들은 그들의 부족 밖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는 다소 무지한 편이었다. 물론 건너건너 바람을 타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있기는 하나, 그런 것들에도 크게 관심을 두지는 않았다.
"혹한의 땅이라."
"희지 않은 곳이 없다 합니다. 열흘에 엿새 이상은 눈이 내린다고도 하더군요. 물론 과장이 섞였을 거라고 보기는 합니다만."
"그런데 그런 이야기는 왜 하는 거지?"
"그 설원에서 살아가는 일족이…정확히는 그렇게 추측이 되는 이들이 이번 전쟁을 일으킨 주축이기 때문입니다. 타칸 연합의 잔당들과 손을 잡고서 말이지요."
전쟁이라고 했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짧게 언급하고 지나갔던 영주, 막시밀리언과는 다른 반응이다.
"상황이 심각한가?"
"초원에 맞닿은 북부 경계 지역은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영지 두 곳이 함락 되었으며, 칸디시아렌 공작의 휘하에 북부 영주들이 속속들이 합류하고 있다 합니다."
"영지 두 곳이 함락이라고? 그게 가능한가?"
소식을 들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영지 두 곳이라면 그 두 곳이 모두 남작령이라고 해도 상비군과 비상시에 끌어 모을 수 있는 민병을 합쳐 수천이다.
성벽을 방패 삼아 버티기만 해도 수만 병력이 아닌 이상 그리 쉽게 뚫어낼 수는 없다. 가까운 거리에 다른 영지들도 있을 테니 지원 병력이 온다면 버티는 것 자체는 가능할 것인데, 함락이라?
이건 둘 중 하나다. 영주들이 전쟁을 모르는 겁쟁이에 머저리들이었거나, 공격해온 적이 상식 이상으로 강력했거나.
"말씀 드린 자들, 설인(雪人)이라 이름 붙은 자들이 문제인 듯합니다. 거대한 짐승들을 이용해 성문을 부숴버렸다고 하더군요. 별로 믿음이 가지는 않는 이야기입니다만, 그것들에는 화살도 통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들려오는 이야기의 신빙성은 둘째 치고, 북쪽의 상황이 심각한 것은 사실인 듯했다. 특히 칸디시아렌 공작 아래로 북부의 영주들이 집결한다는 것은 그만큼 밀려온 적들이 강력하다는 뜻이니, 응당 왕국 차원에서 움직임을 보여야 할 것이다.
"조정에서는?"
"군대를 조직해 보내려 하고 있습니다. 그를 위해 이쪽에도 사신이 왔었습니다만……."
"어째서 말을 하다 말지?"
"영주님께서는, 병사를 내실 의향이 전혀 없으십니다."
"……."
짐작은 했다. 북쪽의 일을 축소시켜 간략히 전해준 것을 보면, 영주는 북쪽의 일에 관여하고 싶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이해도 갔다. 왕국 북부가 전란에 휩싸였다고는 하나, 일단은 이쪽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 하지만 문제는 명분이다.
왕명이 내려온다면 영주의 의향이 어떻든 간에 따를 수밖에 없으니, 나서지 않고자 한다면 왕을 설득할 만한 명분이 있어야 한다.
"명분은?"
"영주님께서는 일단 표면적으로 제국을 내세우셨지요. 이번에 사신들이 오가며 분위기가 유해졌다고는 하나, 언제 그들이 마음을 달리 먹고 창 끝을 이쪽에 겨눌지 모르니까요."
"표면적으로는, 이란 건 뭔가."
"리에론이지요."
"리에론?"
"최근에 벌어진 폴사도의 일도 있지 않습니까. 리에론과 한창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때, 동부에 전력의 공백이 생긴다면 그들이 필히 손을 뻗을 거라는 식으로 조정을 설득하셨겠지요."
"왕명을 받든다면 그것은 리에론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
"리에론은 이쪽과 다르지요. 찻잔을 채운 물은 찻잔에게는 전부이나, 대야에게는 일부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이쪽과는 달리, 왕명을 받들면서도 동시에 손을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 치고, 조정에서는 납득 했나?"
"그런 것 같습니다. 단순히 들이민 명분만으로 납득하지는 않았겠지요. 물밑에서 어떤 거래가 오갔을 것으로 추측이 됩니다만…그 내용까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군터는 몸을 뒤로 젖혔다. 의자에 덧댄 푹신한 등받이 가죽의 감촉이 목에 닿으니 단단히 뭉쳤던 생각의 실타래가 풀렸다.
자리를 비운 동안, 확실히 굵직한 일들이 일어났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것들이 별로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다. 멀리서 일어난 일이고, 자신과는 상관 없는 일이 될 공산이 커 보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 내가 알아야 할 것이 있나?"
"예. 한 가지 더 있습니다."
"뭐지?"
"장주님과 인연이 있다 하셨던 소영주의 생모 말입니다."
왠지 싸한 느낌이 들어, 군터는 기댔던 몸을 다시 일으켰다.
"영주님께서 그 여자를 부인으로 맞으셨습니다. 그러니까…정식으로 말입니다."
군터는 그제야, 어째서 자리에 앉은 수하들이 다소 긴장된 모습을 보였는지 이해했다.
"…반대는 없었나? 명분을 좋아하는 이들이 반겼을 리 없는데."
"좋아하지는 않았지요. 그러나 장주님도, 미트라스도 자리를 비운 상황에서 반대 여론을 이끌 만한 인물이 없었습니다. 산발적으로 이는 반대야 영주님께서 마음만 먹으신다면 묵살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확실히 그렇다. 미트라스가 없다면 그쪽에서는 감히 영주를 마주보며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자가 없고, 그 외에 펜대나 굴리는 이들은 대세에 편승하기만 좋아하지 스스로 들고 일어서는 것은 할 줄 모르는 겁쟁이들이니.
"하하하하."
"어찌 웃으십니까……?"
할렌이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그로서는, 어쩌면 심각한 일일지도 모르는 사건에 이리 웃으니 이해가 가지 않았으리라.
허나 군터는 진심으로 웃고 있었다. 물론 즐거워서는 아니다. 그저 우스웠기 때문이다.
"아주 잘 들어맞는군. 내가, 미트라스가 자리를 비우기 무섭게 그리 일을 진행시켰다니 말이야. 그저 시기가 맞았다고 하기에는 너무 공교롭지 않나?"
야스메티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의도하신 것이겠지요."
"그래. 그렇겠지."
언제부터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의도적으로 그들 두 사람이 자리를 비웠을 때 일을 진행시킨 것은 분명하다.
'신하의 눈치를 보는 주인이라니.'
그 꼴이 우스웠다. 그래서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영주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그 전에도 가끔씩 회의를 느꼈던 적이 없지 않았지만, 이렇게 진하게 실망해보기는 아마도 처음이었다.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것은 또 무엇이고, 안 괜찮으면 또 어쩌겠느냐. 이미 그 계집은 영주 부인이 되었는데 말이다."
정확히는 영주 부인들 중 하나가 된 것이나, 소영주의 생모인 만큼 그 위세는 상당할 수밖에 없다. 거기에 영주의 총애까지 얻고 있으니.
"미겔에게서 달리 언질은 없었나?"
"예."
적어도 위글로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모르는 것이 없는 미겔이다. 그런 그가 몰라서 입을 다물고 있었을 리는 없으니, 일부러 알리지 않은 것이라고 봐야 했다.
"놈은 그쪽 편에 서기로 한 모양이군."
군터가 쓰게 웃었다. 그러자 할렌이 거칠게 목소리를 높였다.
"어차피 믿을 수 없는 박쥐 같은 작자였습니다. 믿을 수 없는 자의 힘을 빌어봐야 불안감만 쌓일 뿐입니다. 이제라도 태도를 명확히 하니 오히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할렌의 말이 옳습니다. 감찰대장은 이전부터 그 여자와 선을 대고 있지 않았습니까? 처음부터 신뢰할 수 없었습니다."
살라스가 침착한 목소리로 할렌을 거들었다. 알고는 있었으나, 둘 모두 미겔에게 안 좋은 감정이 꽤나 쌓였던 모양이다.
"이제 어찌 해야 하겠나?"
군터는 다시 몸을 기대며 야스메티에게 물었다.
"달라질 것은 없습니다. 어차피 그 여자가 장주님에게 악감정이 있다 한들, 영주께서 장주님을 견제하고자 한들 명분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요. 구실을 주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장주님께서 해야 하실 일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흠 잡힐 일을 만들지 않으시는 겁니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제가 일찍이 말씀 올린 바와 같이 명망을 얻어가시는 거지요. 장주님의 명망이 높이 쌓이면 쌓일수록, 영주께서는 장주님을 어려워하게 될 겁니다."
"어려워한다. 주인이 신하를 대한 태도로 적합한 표현은 아니군."
"장주님께서는 이미 권신이십니다. 일단 한 번 권신이 된 이상, 다른 선택지는 없습니다. 지금 있는 자리를 지키지 못한다면 경계 어린 칼날에 잘려나갈 뿐입니다."
한기가 흐르는 듯한 냉철한 말에, 군터는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