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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65화 (365/1,064)

365화

대놓고 조소하는 세레온 우슈무르에 분노할 겨를도 없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를 알아야 했으니.

하여 사미르 자작은 자존심을 접고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세레온 우슈무르는 삐딱한 말투이기는 해도 순순히 이야기 해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베이고르의 사신단이 파헨델에 닿기 거의 직전에 당도한 소식이었다.

"북부 갈색초원의 야만인들이 대거 남하했다더군. 궁핍을 면키 위한 약탈의 수준이 아니라 전쟁의 수준이라 들었지."

"야만인……? 설마 그럴 리가. 놈들에게 그럴 여력이 있을 리 없소."

"그건 내 알 바가 아니지. 확실한 건 놈들이 남하했고, 그대 나라의 북방은 이미 끔찍한 혼란에 빠졌다는 것이오."

세레온 우슈무르가 빈정대며 말했다. 그런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과는 달리 사뭇 으스스했다.

*

데이븐랏지의 수도 테리브란.

테리브란에 있는 모든 주요 인사들이 대전에 집결했다. 그들은 지금 막 당도한 세레온 우슈무르의 전령이 전한 급보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7황자는 옥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말을 꺼낸 신하를 보았다.

"기회? 무슨 기회를 말하나."

"듣자 하니 남하한 야만인들의 규모가 상당하다 합니다. 국경은 단번에 쓸려나갔고, 속절없이 밀리고 있다 하더군요. 물론 나름대로 대처를 하겠지만, 상당히 거친 전쟁이 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요점만 말하라."

"우리가 남진을 하기 전에, 이번 기회를 통해 후방의 불씨를 완전히 밟아놓고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당연한 생각이다. 남하한 야만인들의 규모나 기세가 예사롭지 않고, 아직도 힘이 빠져 있을 베이고르는 그들에 맞서 힘겨운 싸움을 하게 될 확률이 크다. 그렇다면 배후에서 그들을 침으로써 쉬이 도모할 수 있지 않겠는가?

"난 이미 놈들에게 약조를 했다. 잠자코 죽어 지낸다면 살려주겠노라고 직접 말을 했지."

"하오나 전하. 바크렌을 되찾을 수 있는 호기가 아닙니까."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약조를 했다는 거지. 아직도 이해가 안 되나?"

"……."

길게 늘이는 말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말을 꺼낸 신하가 입을 다물었다. 당당하게 들었던 고개가 아래로 내려가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를 보며 많은 이들이 비웃었다. 결정을 내리기 전이면 모를까, 이미 결정을 내린 상태에서 베이고르의 소식이 들려왔을 때. 7황자를 아는 많은 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이미 그들과는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만약 이 소식이 조금만 더 빨리 당도했다면. 북부 야만인들의 남하가 대략 한 달 정도만 더 일찍 일어났더라면 상황은 지금과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그들이 모시는 주인은 이 '호기'를 놓치지 않고 망설임 없이 군사를 일으켜 베이고르를 쳤겠지. 하지만 지금은 북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다 허사다.

이미 그들의 주인이, 7황자가 본인의 입으로 '약조'를 했기 때문이다.

"왕의 말 한 마디는 천금보다도 더 무겁지. 하물며 황제의 한 마디라면…말할 필요도 없다."

"소신이 실언을 했나이다. 용서해 주소서."

"실수였으니, 용서하마."

7황자는 한때 한 번 한 말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던 적이 있었다.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내키는 대로 살던 시절에 말이다.

하지만 황좌에 뜻을 든 뒤로, 그는 달라졌다. 말을 가볍게 내지 않았고, 한 번 입 밖에 낸 말은 반드시 지켰다. 그럼으로써 주변의 신뢰를 얻었고, 그의 이름을 무겁게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등 뒤를 편안케 할 수 있는 호기였지만, 이번에도 그는 자신의 말을 지켰다.

"자그마한 일에 신경 쓰지 말고, 큰 일에 집중하도록 하지. 내 멍청한 형제는 상대가 못 되지만, 그의 밑으로 모여든 세력은 얕볼 수 없다."

"옛!"

무거워졌던 대전의 공기가 뜨거운 전의로 달아올랐다.

*

초원인들이 대거 남하하며 난리가 났다고 들었건만, 코누다이안은 평온했다. 뭔가 부산하다거나, 경직된 분위기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혹 일반 백성들에게 정보를 통제하고 있는 것인가 싶었지만, 지나며 만난 관리들도 북쪽의 문제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먼저 가보겠네. 상황이 어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지만, 전하께서 내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고 계심은 분명하니."

"살펴가십시오."

군터는 코누다이안에 들어선 지 이틀 째 되던 날에 사미르 자작과 헤어졌다. 그는 수도로 향할 것이고, 그의 말처럼 길을 서둘러야 하니 군터와는 가는 길이 달랐다.

"어째서 이렇게나 조용한 것일까요?"

사미르 자작 일행과 헤어지고 난 후, 보리스는 참았던 질문을 던졌다.

"글쎄……."

말을 아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짐작이 가지 않았다. 백성들이야 모를 수도 있다고 하지만, 관리들까지 별로 걱정하지 않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가 했던 말이 과장이었을 수도 있겠지.'

생각해 보면 소식을 전했던 이는 파헨델의 사령관인 세레온 우슈무르였다. 그는 베이고르에 감정이 좋지 않아 보였고, 그렇다면 아예 없는 사실을 지어내지는 않았더라도 악의적으로 과장을 하여 전했을 수는 있다. 이쪽이 당황하는 모습을 즐기려고 말이다.

'아니. 이건 너무 유치한 생각인가.'

하도 생각나는 것이 없다 보니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아직은 일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위글로우에 도착하면 알기 싫어도 알게 될 것이다.

"속도를 높이겠다."

그러고 보면 사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베이고르 왕뿐만이 아니었다. 막시밀리언 역시 그러하리라. 이미 코누다이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텐데, 느릿하게 움직였다가는 안 좋은 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

며칠 길을 앞당겨 위글로우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영주관저에서 테리브란에서의 일을 보고하고, 현재 북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설명을 들었다.

"완전히 반대쪽에서 일어난 일 아닌가. 게다가 우리는 제국과 맞닿고 있지. 우리까지 움직이면 저들이 어찌 나오겠는가."

막시밀리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고 넘겼으나, 충분한 설명이 되지는 못했다.

군터는 보고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곧바로 수하들을 만났다. 불러모을 필요도 없었다. 군터가 자택에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이 알아서 먼저 모여들었기 때문이다.

"장주님께서 자리를 비우신 동안 있었던 일을 말씀 드리겠습니다."

군터의 눈길을 받은 야스메티가 입을 열었다.

군터가 자리를 비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했던 대로 폴사도에서의 일이 불거졌다. 장남과 삼남의 후계다툼 말이다. 후계자의 권리를 행사하려는 장남과, 그것을 지켜볼 수 없는 삼남 간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그리고 그 신경전은 커닐레이 백작이 숨을 거두는 순간 전면전으로 치달았다.

삼남이 선수를 쳤다. 그들은 커닐레이 백작이 죽기 전에 작성했다는 유서를 들이밀며, 커닐레이 백작가의 정당한 계승권은 삼남에게 있음을 주장했다.

당연히 장남 쪽에서는 헛소리라며 반박했는데, 이런 다툼 자체가 벌어질 수 있었던 건 커닐레이 백작이 죽기 전까지 끝내 공개적으로 후계자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태가 위중한 것은 분명했으나, 그렇다 해도 너무 갑작스러운 죽음이었지요."

야스메티가 말했다.

"무언가 달리 짐작하는 바가 있나?"

"듣자 하니 커닐레이 백작의 친위대까지 삼남 측의 손이 닿아 있다고 하더군요. 그렇다면 얼마든지 은밀한 일을 진행할 수 있었겠지요."

"장남은 그걸 몰랐나?"

"알았다 해도 막을 수 없었을 겁니다. 말씀 드렸듯, 명분은 장남에게 있으나 실질적인 힘은 삼남 측이 더 강했으니까요. 장남 쪽에서 판을 뒤집기 위해서는 외부의 조력을 끌어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늦었고?"

"예. 그들이 일을 벌이기도 전에 미트라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폴사도로 향했습니다. 사전에 교감이 있었다는 증거지요."

유서를 들먹이는 삼남 측에 맞서 장남 측이 뭔가를 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대세가 기운 뒤였다. 그들은 외조부인 비세트 자작을 통해 리에론 공작 가의 힘을 끌어올려 했지만, 뭘 어떻게 해보기도 전에 미트라스가 폴사도에 당도해버렸다.

"그렇게 끝난 건가?"

"장남은 영지를 탈출했습니다. 측근들만을 거느리고 외조부에게로 갔지요. 비세트 자작은 공개적으로 새로이 커닐레이 백작이 된 삼남과 코누디스 자작님을 비난했습니다.

전자에 대해서는 유서를 날조하여 정당한 계승자를 몰아냈다고 비난했으며 후자에 대해서는 남의 집안에서 벌어진 일에, 그것도 불의한 일에 힘을 보탰다고 강하게 목소리를 높였지요. 대체적인 여론도 그의 말에 동조하는 편이라, 중앙 정계에서는 특히 코누디스 자작님의 이름이 안 좋은 쪽으로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리하여 현재 폴사도의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서거한 전대를 이어 새로운 커닐레이 백작이 영지를 다스리게 되었음에도 아직까지 안정이라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관리들 중에도 암암리에 새로운 영주를 비판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정당한 후계자가 돌아와야 한다고 말을 흘리고 다니기도 했다. 그 중 일부는 비세트 자작 쪽에서 흘린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여론이 폴사도 내부에 일부나마 흐르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트라스는 여전히 폴사도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코누디스와 리에론이 폴사도를 두고 기 싸움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지요. 리에론이 동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테니, 미트라스는 당분간만이라도 발을 뺄 수는 없을 겁니다."

아무리 코누디스 자작이 자작 위에 어울리지 않는 세력을 갖추었다고는 하나, 그렇다 해도 리에론 공작에 비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지금처럼 맞설 수 있는 것은, 첫째로 리에론 공작의 영향력이 동부에까지 뻗기 힘들다는 것이며 둘째로 폴사도가 다 무너진 울타리가 아니라 굳건한 성벽이라는 점 때문이다.

아무리 내부에서 불온한 기류가 흐른다 해도 어찌 되었든 새로운 커닐레이 백작은 공식적으로 폴사도의 주인이 되었다. 그가 코누다이안과 손을 잡고 버티니 리에론도 그들을 쉽게 어찌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유리한 건 이쪽입니다. 명분이란 땔감 같은 것입니다. 던져 넣으면 불을 더 크게 키워주지요. 하지만 키워야 할 불이 다 꺼져버린다면, 그때 가서 땔감을 아무리 던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불이 꺼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의 형세가 굳어진다면 그때 가서 리에론이 무슨 말을 하든, 비세트 자작이 얼마나 뜨거운 목소리로 호소를 하든 세상은 관심을 갖지 않게 될 테니까.

군터는 이로써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벌어진 큰 일 두 가지 중 하나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제 남은 건 하나다.

"북쪽의 일은 어찌 된 것인가."

야스메티가 다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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