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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63화 (363/1,064)

363화

사이주 제레이스와 뱃놀이를 즐긴 다음날부터 군터를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지 않았나?"

시작은 검은 피부를 가진 거한, 카자쿠였다. 피부색과 뚜렷하게 대조되는 흰 이빨을 드러내며, 그는 군터를 찾아왔다.

"설마 피하진 않겠지?"

"사이주 공에게 말씀을 전해 듣고 찾아온 거 아니오?"

태연한 대꾸에 그가 다시 웃었다.

"그렇긴 하지. 그 말을 듣고 꽤나 기뻤다. "

몇 마디 말을 나누며 느낀 것은, 카자쿠가 굉장히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내라는 것이었다. 그는 말을 돌려 하지 않았고, 꾸미지도 않았다.

"붙어보자. 맨손으로는 승부를 내지 못했으니, 이번엔 무장을 갖추고 해보지."

"괜찮으시겠소?"

"위험하다 싶으면 멈춰주지."

자신만만함에 더불어 어설픈 도발까지.

이렇게 나온 이상 군터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침 객관에는 정원이 있었다. 비무를 하라고 만들어놓은 것은 아니겠지만, 정원에는 그럭저럭 자유롭게 움직여도 좋을 만한 공간이 있었다.

"호오."

카자쿠가 눈을 빛냈다. 그의 눈길이 군터가 쥔 칸젤에 머물렀다.

"어제부터 희미하게 느꼈었지. 그 이상하게 생긴 창. 범상치 않은 기운이 있다. 법구인가?"

손에 쥠으로써 잠잠하던 칸젤이 요동쳤다. 그 변화를 느낀 것이리라. 카자쿠의 감각은 그의 박투 실력만큼이나 예사롭지 않았다.

"법구라면 법구겠지."

"내 칼도 법구다. 명인이 만들고, 뛰어난 술사가 힘을 불어넣었지."

카자쿠의 무장은 대도였다. 손잡이 부분이 결코 작지 않음에도 도신이 너무 커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다. 저 정도 크기라면 마상에서 사용하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목은 날리지 않도록 신경 쓰겠다."

툭 던지는 오만한 말에 군터의 입술이 씰룩였다.

"아까부터 내가 할 말을 그쪽이 대신하는구려."

참관인은 단 넷이었다. 보리스와, 카자쿠가 데려온 수하들 셋.

단 네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두 사람은 맞붙었다.

카앙!

"으음!"

정면에서 맞붙은 일합. 들떠 있던 카자쿠의 표정이 한 순간에 진지해졌다. 칼날을 타고 느껴지는 힘을 느낀 것이다.

놀란 것은 군터 역시 마찬가지였다.

'밀리지 않는다.'

그들 모두 밀려나지 않았다. 맞붙은 자리에서 멈춰서 힘을 겨뤘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뒤로 물러났다. 적어도 힘에 있어서 두 사람 간의 차이는 없었다. 있다고 해도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짐작은 했지만.'

어째서 몰랐겠는가. 어제 맨손으로 겨루면서도 충분히 느꼈다. 그럼에도 놀라는 것은, 어제의 박투는 서로 간에 어느 정도 여력을 두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막아선 카자쿠나, 그걸 들이받은 군터나, 7황자의 앞에서 정말로 전력으로 드잡이질을 할 마음은 없었으니까.

허나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굳이 여력을 남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각이라.

카캉!

끝없이 세찬 철성이 울리고, 불똥이 튀었다. 두 사람 모두 상대의 거센 힘에 밀려나지 않으려 발에 힘을 준 탓에, 본래는 골랐던 땅이 여기저기 흉물스럽게 파였다.

퍼억!

제대로 창을 휘두를 수도 없을 정도로 달라붙은 지근거리. 군터는 팔꿈치를 휘둘러 카자쿠를 튕겨냈다. 그리고 황급히 고개를 뒤로 젖혔다. 아래로 내려갔던 대도의 칼날이 뒤로 젖힌 턱 끝 앞을 아슬아슬하게 지나갔다. 칼날이 일으킨 바람이 서늘하게 턱과 코끝을 스쳤다.

'읽히고 있군.'

하마터면 턱부터 시작해 얼굴이 반으로 갈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위기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피하는 것까지 예상하고 지른 공격임을 알기 때문이다.

카자쿠는 그의 움직임을 명확히 읽고 있었다. 반대로 그 역시 카자쿠의 움직임을 예측할 수 있었고.

육체가 발하는 힘은 비등. 머리가 헤아리는 무리(武理)역시 비슷한 수준이다. 그것을 알고, 어느 한쪽도 무리를 하지 않으니 두 사람의 공방은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침이 없이 흘러갔다.

채챙!

백합. 이백합. 사백합…….

멀찍이서 지켜보는 네 쌍의 눈은 경악과 불안함으로 얼룩졌지만, 막상 맞붙고 있는 당사자들은 거칠게 뛰는 심장과는 달리 마음이 차분했다.

서로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실력은 동등하며, 억지로 승부를 보려 하면 필히 피를 보게 되고, 그 결과 또한 알 수 없다는 것을.

카앙!

그럼에도 무기를 늘어뜨리지 않는 것은, 온 힘을 다해 부딪치는 과정 자체가 즐거웠기 때문이다. 그들 정도 수준의 무인이 되면, 전력을 기울여도 상하지 않을 상대를 갖는다는 것이 어려워진다. 말하자면, 지금 그들에게 있어 서로의 존재는 즐거움 그 자체였다.

쾅!

둘 모두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쳤다.

대체 얼마나 부딪친 것일까. 팔의 감각이 무뎌졌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렇게까지 몸에 힘이 빠질 수 있다는 것이 새삼스러웠다.

"이렇게까지 지치는 건 또 간만이군."

카자쿠가 씩 웃었다. 이전과는 다른, 아무것도 묻어있지 않은 시원한 미소였다.

"마찬가지요."

"여기까지만 하지. 어차피, 피차 마지막까지 갈 생각은 없지 않나."

"그럽시다. 그나저나 괜찮소? 칼날이 상한 것 같소만."

법구라던 카자쿠의 도는 수백 번이 훌쩍 넘게 칸젤과 부딪치며 이가 나갔다. 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대단하다 싶었다. 한쪽 날만 사용하는 칼이라는 것이 본래 무기들 중에 내구가 약하기로 손에 꼽는데, 칸젤과 수백 번이 넘게 부딪치면서도 살짝 이가 나간 것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괜찮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다시 날이 서니."

"음?"

"법구라 하지 않았나. 잡스러운 능력은 없지만, 무구로서는 최고지."

카자쿠가 그의 칼 옆면을 부드럽게 쓸고 칼집에 넣었다.

"대단해. 인정하지.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던 소국에 이런 맞수가 있었을 줄이야."

"음?"

칭찬은 칭찬이고, 의문은 의문이었다.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던 소국이라고 하기엔, 베이고르와 데이븐랏지가 그렇게까지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았다.

군터의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카자쿠가 설명을 덧붙였다.

"난 이곳 태생이 아니야. 내 말투만 봐도 뭔가 다르다는 것이 느껴지지 않나?"

"…그렇긴 하군."

뭐라고 해야 할까. 분명히 제국어이기는 한데, 억양이 보통사람들과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게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그것으로 카자쿠의 출신을 점치지는 않았었다. 진정으로 남다른 그의 검은 피부를 보면서도 말이다.

"나는 제국 남부 출신이다. 랑그윤이라고 아나?"

"모르오."

"아바시스는 들어봤겠지?"

아바시스라. 귀에 익다. 어디선가 들어본 적이 있는 듯했다. 분명…제국과 수 차례 전쟁을 치른 남방의 강국이라고 했던가.

"그 아바시스와 맞닿아 있는 곳이다. 난 그곳에서 태어났고, 인생의 반을 그곳에서 보냈지."

"나머지 반은?"

"황도. 그곳에서 자콥 전하를 뵙고 그 분을 따랐다. 베이고르니 뭐니, 이곳에 오기 전까지는 들어보지도 못했다."

7황자가 데이븐랏지에 온 것이 얼마 되지 않았으니, 그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베이고르를 몰랐다는 이야기가 이해가 됐다.

"악감정은 없다. 솔직히 말하면 아니꼬웠던 건 사실인데, 지금은 아니야."

주인과 신하가 닮은꼴이었다. 거침없는 태도 하며, 대놓고 드러내는 오만함. 그리고, 그런 것이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역시 닮았다.

그것은 아마 그들에게서 악의가 비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의도하고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본래 그런 이들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땀을 실컷 흘렸더니 목이 마르군. 손님에게 시원한 마실 것 정도는 내어주겠지?"

오만한데다 뻔뻔하기까지.

어처구니가 없어 실소하자 카자쿠가 '설마'하는 표정을 지었다.

"기운도 다 빠지고, 땀을 뻘뻘 흘리는 목 마른 손님을 그냥 보내지는 않겠지?"

"손님은 내가 손님이겠지. 잊었소?"

"머무는 동안 이 객관의 주인은 네노…아니, 자네 아닌가?"

"자네라."

"불편한가? 나이는 내가 더 많은 것 같은데?"

"피부가 검은 사람은 처음 봐서, 나이가 분간이 안 되는구려. 아무튼 좋소. 목이나 축이고 가시오."

카자쿠는 생각보다도 호탕한 사내였다. 그와 간단히 술 한잔을 하며 느낀 건, 그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는 어제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였다. 군터는 그가 자신을 인정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극단적이군.'

자신이 인정하는 상대에게는 호의적이나 그렇지 못한 상대에게는 어제처럼, 오늘 한 판 제대로 붙기 전처럼 오만한 태도를 견지한다. 그런 것을 딱히 좋다 나쁘다 평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람인 것만은 분명했다.

그것에 대해 카자쿠도 술잔을 기울이며 이야기했다.

"난 능력도 없으면서 고개에 힘이 들어간 것들이 싫다. 전장에서 만나면 한 칼에 목이 날아갈 것들이 주제도 모르고 목소리를 높이면 이 손으로 그 모가지를 꺾어주고 싶단 말이지."

카자쿠는 자신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이야기를 했다.

그는 귀족 출신이 아니었다. 그러기는커녕, 부모가 누군지도 모르는 전쟁고아 출신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살기 위해 온갖 일들을 다했고, 몸이 어느 정도 자랐을 때부터는 군대에 투신해 전공을 쌓았다.

숱한 수급을 취했고, 적지 않은 승리를 누렸다. 말단 병졸이었던 그가 장교의 위치까지 오르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이가 스물 정도(고아였기에, 카자쿠는 지금도 자신의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했다) 되었을 무렵에는 말을 타고 수하 병사들을 이끌며 전장을 누볐다.

그러다가 한 번.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지른 엿 같은(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상관 한 놈으로 인해 처참한 패전을 겪고, 그 책임까지 떠안아 투옥이 되었다. 언제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처지로 전락해버린 것이다.

바로 그때. 허망한 끝을 직감하고 있던 순간에 그에게 구원의 빛이 비쳤다. 때마침 전장을 순시하러 온 7황자의 눈에 든 것이다.

병신 같은 상관 놈의 명령에 억지로 뛰어들었던 전장에서 미친 듯이 날뛰던 그를 7황자가 눈 여겨 보았었고, 감옥에 갇힌 그를 직접 빼내주었다. 그리고 그의 수하로 들어가는 대신 소원 하나까지 이루어주겠다고 했다.

그 한 가지 소원. 카자쿠는 그것을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상관의 목을 취하는 데 사용했다. 자신과, 허망하게 죽어버린 수하들의 복수를 위해서였다.

"그 놈이 귀족이었어. 능력도 없는 병신 쓰레기가 집안 하나 잘 타고 나서 지휘관 자리를 꿰찬 거지."

카자쿠는 귀족을, 정확히는 능력도 없으면서 혈통만 믿고 나대는 족속을 경멸했다. 7황자의 호위대장 직을 맡고 있는 그는 원한다면 언제든 귀족이 될 수 있었다. 실제로 7황자가 직접 '성'을 내려주겠다고 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 영광스런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능력은 이름에 있는 것이 아니야. 그렇지 않나?"

"옳은 말이오."

군터는 이 거칠기 짝이 없는 사내가 썩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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