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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62화 (362/1,064)

362화

7황자와의 면담 후, 일행은 객관으로 이동했다. 면담 때 7황자가 보인 태도와는 별개로, 그들에게 주어진 객관은 굉장히 훌륭했다. 사신 명부에 따로 이름을 올린 이들에게는 독채가 주어졌고, 그 독채는 하나하나가 정원이 딸릴 정도로 큰 규모였다.

군터에게도 당연히 독채가 주어졌는데, 그 크기가 위글로우에 있는 그의 저택보다도 더 컸다. 부담스러울 정도의 크기였다. 병사들을 들인다고 해도 다 채워지지가 않을 정도였다.

"아버지. 보셨어요? 도시 내에 호수가 있었습니다."

보리스는 나름대로 차분하려 애쓰는 듯했지만, 그럼에도 목소리가 오르락내리락했다. 오늘 길에 보았던 큼지막한 호수부터 시작해서 테리브란의 웅장함과 화려함에 완전히 눈을 빼앗긴 것이다.

"나가볼 수 있을까요?"

"물론. 우리가 이곳에 갇혀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다만 당장은 어려울 것이다. 이곳으로 안내한 관리도 피로를 풀며 잠깐 기다려 달라고 했으니.

"정말 대단합니다. 제국, 제국, 말로만 들었는데…정말 엄청나군요. 왕도와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이곳이 더 낫다."

일부만 보았을 뿐이지만, 대충 보기에도 규모나 성세나 모두 테리브란이 배나시드보다 나았다. 제 아무리 테리브란이 제국 북부의 중심지가 되었다고는 해도, 일개 지방 도시가 일국의 수도보다도 더 번성한 것이다. 이것만 보아도 제국이 얼마나 거대하고 융성한 나라인지를 알 수 있었다.

'세상은 넓군.'

신선함을 넘어 아득한 기분이다. 이제껏 그의 세상이 얼마나 협소했는지를 이곳에 오고서야 알았다.

피하기 위해 제국에 왔으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오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래. 보니 어떠하던가? 보낸 서신을 읽었으나, 직접 듣고 싶군."

"잔뜩 긴장하고 있더군요. 전하께서 혹 군대를 이끌고 진군해올까 잔뜩 겁을 먹고 있었습니다."

"흐음. 내가 실로 그리하면 어찌 될 것 같은가? 성문을 열고 항복을 하겠나?"

"으음. 전하."

"농이다. 하니 그리 정색할 필요 없다."

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안하다. 그가 섬기는 주인은 언제든, 무엇이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뒤집어엎을 수 있는 사람이다. 조부가 타계한 이후, 그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나마 부친 정도일까?

"전하. 하오시면……."

"얻을 것도 없는 사소한 싸움에 힘을 뺄 수는 없지. 당초의 계획대로 하겠다."

그 말을 듣자마자 사이주 제레이스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오나 전하. 아무런 조치도 없이 군사를 남쪽으로 움직일 수는 없사옵니다."

'혼사문제인가.'

신하들이 간언이 주인은 내키지 않은 것 같았다.

"혼인동맹은 내키지 않는다."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놈들이 감히 겁을 상실한다면 대가를 치르게 해주면 그뿐이다. 그에 대해서 더는 거론치 말라."

"으음."

'눈치 없기는.'

주인의 속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신하는 미움을 받기 마련이다. 아니, 미움까지는 아니더라도 총애는 결코 얻을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저 목에 힘만 잔뜩 들어간 작자들은 자격미달이다. 훗날 주인이 대업을 이룬다 해도, 저들에게 주어질 것이 크지 않다는 데 기꺼이 내기를 걸 수도 있었다.

"그보다는,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지."

다소 가볍던 분위기에 갑작스레 쇳덩이가 올라갔다. 이제부터 나누는 이야기들. 여기서 결정된 일들이 그들의 미래를 좌우할 것임을 모두가 알기 때문이다.

"남진을 하고자 한다면, 결국 오젠이나 헤루즈입니다."

그들의 세력은 데이븐랏지를 중심으로 리바스트라와 본다인, 아록을 아우른다. 제국 37주, 바크렌을 상실하며 이제는 36주가 되었으나 그 중 4개를 가졌다 함은 그리 처진 것은 아니나 앞선 것 또한 아니다.

지금 거론되는 오젠과 헤루즈는 2황자의 손에 있는 곳들이다. 그는 그 두 주를 포함하여 다섯 개 주를 거느리고 있다.

"어차피 저쪽도 충돌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요는 명분이지요."

일곱이 남았다. 본격적으로 쟁탈전이 시작되기 전이었다면 미리 손을 써서 암살을 하든, 뭘 하든 할 수 있었겠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그런 편리한 방법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서로의 세력을 이끌고 부딪치는 수밖에 없는데, 이는 어찌 둘러대더라도 결국은 내전이라 그에 합당한 명분이 필요하다.

군사를 일으켜 형제를 칠 만한 명분 말이다.

"황도에 사람을 보내야겠지요."

주인의 표정이 좋지 않게 변했다. 그러나 그 역시 알고 있다. 내키지 않더라도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허락은 곧바로 떨어졌다. 못마땅함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긴 했지만.

"보내라."

"예."

주인이 말했다.

"내 형제는 무능하나 어리석지는 않다. 우리가 어찌 나올지 이미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2황자 바란무르 엘 트라소프. 황자들 중에서 딱히 이름이 알려진 이는 아니었다. 허나 그의 외가가 제국에서도 손에 꼽는 권세가인 덕에 이 황좌의 전쟁에서 최후의 7인이 될 수 있었다.

"그렇겠지요. 어쩌면 우리가 움직이기도 전에 먼저 치고 나올지도 모릅니다."

"맞다. 황도의 노괴(老怪)는 원하는 누구에게든 명분을 쥐여줄 테니."

노괴라. 역시나 거침없는 입담이다. 듣는 이들만 괜히 불안해져 손에서 땀이 나는 언사가 아닌가. 제국의 군주를 저렇게 말할 수 있는 이는 제국인이며 군주 아닌 자들 중 오직 그 한 사람뿐이리라.

"지금 이 순간부터 시작이나 다름없다. 4주의 군사들을 대기시켜라. 언제든 출정할 수 있도록 준비를 하도록."

"옛!"

*

자유롭게 움직여도 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물론 안내인 겸 감시인과 함께 움직여야 했으나, 어쨌든 객관 밖으로 나가도 된다는 것은 환영할 일이었다. 특히 보리스에게 그랬다.

"오래 기다렸나?"

안내인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안내인이라고 온 이는 예상 밖의 인물이었다.

"사이주 공. 어찌……."

싱긋 웃으며 나타난 자는 사이주 제레이스였다. 제레이스 가문의 직계가 안내인 일을 맡은 것이다. 그의 입장에서 봤을 때, 명백히 격이 떨어지는 일인데 말이다.

일단은 사신 자격으로 오기는 했으나, 그래 봐야 일개 자작령의 사신에 불과하다. 일국의 사신 자격으로 온 사미르 자작조차 제대로 대우를 못 받는 와중에 그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런데 사이주 제레이스가 왔다. 그것도 아무나 시켜도 될 안내인으로 말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하릴없이 노는 사람이네. 노느니 자그마한 일이라도 해야지. 게다가 따지고 보면 내가 자네를 이곳으로 데리고 온 것이나 마찬가지지 않나."

"해서 직접 오신 겁니까?"

"겸사겸사지. 위쪽에서는 한창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계셔서 말일세. 그런 곳에 내가 낄 자리는 없거든. 그러니 심심함이라도 달래야 하지 않겠나."

분명히 자조적인 말인데 그의 입으로 들으니 유쾌하게 들렸다.

'일찌감치 권력에서 멀어졌다더니.'

살기 위한 처세술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그런 게 아닌 것 같았다. 그저 멀어진 것이 아니라, 이 사내는 진정으로 권력에 대한 욕심을 버린 것이다. 그러니 이처럼 태연하고, 거침없을 수 있는 것이리라.

"도시를 둘러보고 싶겠지?"

그의 물음은 옆에서 눈을 빛내고 있던 보리스에게 향했다.

"나는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이 도시에 내가 모르는 곳은 없지."

점잖은 척을 해도 결국 보리스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웅장하고 화려한 미지의 도시는 소년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군터는 보리스와 함께 사이주 제레이스를 따라 나섰다.

"도시 내의 호수. 본래 이 도시에 이런 것은 없었네."

"본래 없었다 하심은, 새로이 생긴 것이란 뜻입니까?"

"생겼다? 으음. 뭐, 틀린 말은 아닐지도 모르겠군. 정확하게는 만든 것이야. 한때 이런 것이 크게 유행을 했었거든. 호수 위에 자그마한 배를 띄워놓고 그 위에서 차나 술을 마시는 것이 유행을 했었지. 저기 남쪽 어느 지방에서부터 유래한 것이라고 알고 있네. 배를 타기 위해 한참을 기다려야 했던 때에 비하면 많이 시들해졌지만, 지금도 귀족들이나 부유한 자들이 이따금씩 뱃놀이를 즐기곤 하지."

보리스가 눈 여겨 보았던 도시 안의 호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는 곧바로 사람을 시켜 호수에 배를 띄우게 했다. 예전에 비하면 덜하다지만, 지금도 예약을 해야 뱃놀이를 즐길 수 있다고 했는데 말이다. 과연 제레이스라고 해야 할까.

"어떤가?"

"운치가 있군요. 제대로 표현을 한 것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잔잔한 물 위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풍미였다. 사실 군터는 '배'라는 것을 타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조잡한 뗏목을 탄 적은 있었지만, 이처럼 제대로 된 배를 타본 적은 없었다.

"그렇지. 운치가 있지. 지금 같은 초저녁도 좋지만, 뱃놀이는 밤에 즐기는 것이 가장 좋다네. 호수 전체가 어둠에 잠기고, 수면 위에 달빛이 비추면…그 광경은 운치가 좋은 수준을 넘어 황홀할 지경이지."

"그렇습니까."

사이주 제레이스는 군터에게 그가 돌아가기 전에 한 번쯤은 더 배를 띄우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풍경이 좋다는 야밤에 말이다.

"그쪽은 어떤가 어린 무인? 만족스럽나?"

"예. 후의에 감사드립니다 사이주 공."

"하하."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았다. 노꾼들이 천천히 노를 저으니 배가 천천히 물살을 갈랐다.

호수라고는 하지만, 그 크기는 상당했다. 호수의 중앙에 있으면 호수 밖에서는 흐릿한 배의 형체 말고는 알아볼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이런 것을 사람이 직접 만들었다는 거다. 높은 이들의, 소위 유행 때문에 말이다. 대단하다면 대단하고, 기가 찬다면 기가 차는 이야기다.

"군터 경."

"예."

"이번에 자네가 카자쿠 공과 손을 섞지 않았나."

"……."

"그때 자네가 보인 무공 때문에 자네에게 흥미가 생긴 이들이 적지 않은 모양이네. 이쪽의 사람들이 섬기는 주인을 닮아 성미가 드센 이들이 많거든. 무공이라면 지기 싫어하는 이들 또한 많고. 그런데 자네가 그들의 마음에 불을 질러버린 모양이야. 당장 카자쿠 공만 해도 내게 와서는 자네와 자리를 만들어달라고 하더군."

홀대를 받는다 해도 사신은 사신이라는 건지, 이런 쪽에서는 또 그래도 경우를 지키는 모양이었다.

"어려울 것 없지요."

"괜찮겠나?"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것도 아니고, 순수하게 겨뤄보고자 한다면 소관 역시 마다하지 않습니다."

마다하지 않다 뿐인가, 오히려 이쪽에서도 바라는 바다. 마음에 불길이 일어난 것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어렵게 생각지 말고, 눈치 보지 말고 찾아달라 하십시오."

"하하. 그렇군. 그랬지. 자네도 그런 쪽이었지. 하하하."

호수 한가운데에 멈춘 배 위에서 호탕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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