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1화
제국의 황제는 인세에 내려온 신이었다. 적어도 제국의 국민들은 그리 믿었다. 사이주 제레이스도 그리 믿었고, 지금도 믿는 듯했다. 군터는 거기에 대고 '신도 죽나?'하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그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신인(神人)이라 하지."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를 가리켜 한 말이다. 신의 핏줄을 이은 자. 인간 어미의 배에서 태어났으나 씨는 신의 씨라는 거다.
실제로 제국의 황자들은 수명이 길고, 노화가 늦게 찾아온다 했다. 황자들마다 편차가 있기는 했지만, 자연사 했던 황자들 중 가장 오래 산 이가 이백 하고도 서른 몇 살에 죽었다 하니 확실히 평범한 인간은 아닌 것이다.
아무튼 다른 황자들과 마찬가지로, 7황자도 긴 젊음과 장수의 축복을 타고 났다. 올해 쉰 하고도 셋이 되었다는 7황자는 기껏해야 이십 대 중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신인이라.'
신의 피를 이었느니 어쩌느니 하는 건 헛소리로 치더라도, 분명히 평범한 사람과는 확연히 달라 보였다. 그 어떤 비범한 사람이 내는 분위기나, 기세와도 차이가 있다. 저것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
그래. 종(種)자체가 달라 보인다. 껍데기는 사람이나, 사람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사이주 제레이스는 그래서 그리 말했던 것이리라.
"네놈이구나. 카자쿠가 그래도 내 휘하에서는 한 손에 꼽을 만한데, 일개 소국 영주의 수하 따위에게 고생을 할 줄이야."
아무리 신분에 차이가 있다 한들, 어찌 됐든 이쪽도 사신의 온 신분. 따라서 어느 정도는 대우를 해주는 게 옳을 터인데 다짜고짜 아랫것 대하듯 대한다. 하지만 그에게는 저런 오만이 더없이 어울렸다. 태어날 때부터 위로 단 한 명만을 둔 지고한 신분. 하대가 자연스러운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무례를 범했습니다."
"무례는 무례지. 그래도 보기 좋았다. 즐거웠어. 사내라면 응당 그래야지. 대리하여 왔다면 주인을 위해서라도 당당해야 하는 것이 옳아. 그런 의미에서, 네놈은 사내라 할만하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 그의 표정은 살필 수 없었다. 그래도 목소리에는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그 정도 실력과 기개. 벽지의 소국에서 썩기에는 아깝다. 고(孤)를 따라라. 네 재주를 넓은 세상에서 펼칠 수 있게 해주마."
당황스러운 자다. 이렇게까지 안하무인인 자는 처음이라, 순간적으로 어찌 대응해야 할지 당혹스러웠다.
"…말씀은 감사하나, 그럴 수는 없습니다."
"흐음. 그래. 신하라면 주인에 대한 충성심이 있어야지."
제안을 거부했음에도 그 외에 별다른 반응은 없었다. 진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그냥 한 번 던져본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너희의 왕이 내게 전하는 말이 있겠지."
얼떨떨해 있던 사미르 자작이 정신을 수습하고 답했다.
"전하. 저희 국왕 전하께서 전하시는 서신이 있사옵니다."
"읽어라."
"예?"
"쯧! 무지한 사신에게 아량을 베푸마. 고는 두 번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유의하라."
"예, 옛."
사미르 자작이 서신을 꺼내어 읽었다. 그 내용은 제법 길었으나 이런저런 잡스러운 말들을 빼고 나면 요는 간단했다. 양측의 우호가 계속되기를 바란다는 뜻을 드러내며, 베이고르는 결코 제국의 땅을 침범할 생각이 없음을 강조했다.
"우호를 바란다? 건방진 말이로군."
"옛?"
"이미 아국은 피를 흘렸다. 바크렌을 상실했고, 위장 둘까지 잃었지. 고는 제국의 황자로서 제국의 적을 멸절시켜야 할 책무가 있다. 그런데 어찌 그대의 왕은 어찌 감히 내게 우호를 말하는가?"
"전하. 아국이 제국과 다툰 것은, 고토를 수복하고 무너졌던 나라를 다시 세우기 위함입니다."
"패해 무너졌으면 그대로 사라지면 될 것을, 벌레처럼 꿈틀거린단 말인가?"
"……."
사미르 자작은 어찌나 황당했던지, 숙였던 고개까지 들고 입을 벌렸다. 그는 7황자의 상식적이지 않은, 그야말로 억지에 가까운 말에 당황하여 대꾸할 말조차 찾지 못했다.
그에 안 되겠다 싶어, 군터가 끼어들었다.
"잃어버린 것을 다시 찾고 싶어함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탓하신다면 베이고르를 제대로 끝내지 못했고, 다시 일어나는 것도 막지 못했던 제국군을 탓하셔야지, 어찌 베이고르를 탓하십니까."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앞쪽의 7황자가 아니라 옆의 사미르 자작이었다. 당돌하게 이야기를 했다가 7황자가 노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워하는 마음이 여실히 전해져 왔다.
하지만 군터도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들은 바도 있고, 지금 마주하면서 느끼고 있는 바도 있었다.
그의 생각에, 7황자는 보통 사람을 대하듯 해서는 안 되는 자였다. 그는 군터가 이제껏 본 그 어떤 사람보다 오만하고, 동시에 이질적이었다.
보통의 권력자라면 자신의 말에 대꾸하는 사신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겠지만, 7황자라면.
"듣고 보니 그렇군. 쿠엘단을 탓해야겠고, 아란딜 페레모어와 아그니스 체스퍼를 탓해야겠어. 뭐 좋다. 허면 이것은 어떠냐? 고가 군사를 일으켜 이전 제국이 범한 과오를 씻어내는 것은? 왕실의 혈족은 물론이요, 귀족이라 칭하는 놈들까지 모조리 씨를 말려버린다면, 이번에야말로 제국이 바크렌을 온전히 지배할 수 있겠지. 아니 그러하냐?"
"저, 전하!"
"뜻대로 하십시오."
"군터 경!"
사미르 자작의 시선은 무시했다. 이제는 군터도 꼿꼿이 고개를 들고 7황자를 응시했다. 그는 처음처럼 몸을 비스듬히 기대고 있었다. 표정 역시 처음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 웃지도 않았고, 화내지도 않았다.
"뜻대로 하라?"
"전하께서 하시고자 한다면, 저희가 어찌 막겠습니까."
"그렇지. 너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그건 아닙니다."
"음?"
"전하의 군세에 맞서 싸울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이기고 지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앉아 죽을 수는 없으니, 죽기 전까지는 싸울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크르르…….
왕좌 앞에 엎드려 있던 호랑이 한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 했다.
크앙!
7황자의 손이 호랑이의 머리를 짓눌러 다시 내려 앉혔다. 호랑이는 신경질적으로 울부짖으면서도 다시 몸을 낮췄다.
"재미있구나."
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입가에는 자그맣게 웃음기가 돌았다.
"베이고르가 너와 같느냐?"
"……."
"아니지. 아니야. 괜한 것을 물었다. 죽고 싶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요, 잃고 싶지 않은 것도 매한가지니 어찌 되었든 할 수 있는 데까지 싸우겠구나. 그렇지?"
"예."
"그래. 가장 강한 것은 욕망이다. 그 중에서도 살고 싶어하는 욕망과 비할 것이 있겠는가. 고가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친다면 이기더라도 피를 흘릴 수밖에 없겠지. 그건 고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
"너희 왕에게 전하라. 살기 위해 고와 맞서기를 각오했듯, 살기 위해 앞으로 계속 숨죽이고 있으라고. 그리하면 숨은 붙여줄 것을 약조하겠다."
자기 할 말만 실컷 하고서, 7황자는 물러가라는 듯 손을 한 번 저었다.
군터와 사미르 자작이 깊게 허리를 숙이고 뒷걸음질을 치려는데, 7황자의 목소리가 한 번 더 들려왔다.
"너는 본래 제국 출신이더냐?"
누구에게 묻는 것인가. 생각할 필요는 없었다. 등에 닿는 시선이 느껴졌으니.
"예."
엄밀히 따지면 초원 출신이지만, 제국인으로 살았으니 긍정한다 해서 틀린 것도 아니다.
"직책이 무엇이었나?"
"십부장이었습니다."
"십부장?"
7황자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또한 처음으로 그의 기색이 변했다.
그가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무너질 만했군."
"……."
"물러가라."
묘한 기분이었다. 뭐라고 해도, 그저 의미 없이 한 마디 던진 것일 뿐일지라도 어쨌든 제국의 최고 권력자에게 인정을 받은 것이었으니까. 비록 그 권력자가 다소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는 했어도 말이다.
군터는 사미르 자작과 함께 천천히 대전을 벗어났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맹호들의 울음소리만이 그들의 발소리를 묻어주었다.
*
"그래. 어떠셨소?"
"전하께 듣지 않으셨습니까?"
"전하께서는 그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하지 않으신다오. 그저 그분께서 내리신 결정을 알려주실 뿐이지."
자신을 따르는 수하들에게도 자세한 설명 따위는 하지 않는다는 건가. 대전에서 보았던 7황자의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 편이 더 어울리기는 한다.
"그래도 한 마디는 하시더구려."
"……?"
"바크렌은 무너질 만했다고 말이오. 나는 전하께서 어찌하여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대강 짐작이 간다오."
그러면서 의미심장하게 웃는 사이주 제레이스.
그 능청스러움에 군터는 짤막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제가 졌습니다. 무슨 이야기가 듣고 싶으십니까."
"우선은 감상부터 듣고 싶군. 어땠소? 전하를 뵈니."
"…생소한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이제껏 세상에 그런 분이 계시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었습니다."
"그럴 거요. 전하와 같은 분을 뵈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래. 세상이 넓다는 것이 느껴지더이까?"
"예. 크게 느꼈습니다."
"좋은 경험이었겠지. 안 그렇소?"
고개만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신인이라 하셨었지요. 그 말씀, 조금은 이해가 가더군요."
"태생부터가 우리와는 다른 분이요. 황가의 핏줄들 중에서도 남다른 재능을 타고나셨지."
"남다른 재능…입니까."
재능이라고 해봐야 뭐 그리 대단할 것이 있겠느냐 싶을 수도 있지만, 사이주 제레이스의 말을 들어보면 7황자가 타고난 재능은 단순히 재능이라는 말 한 마디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찍이 제국의 황제는 원신(源神)과 닿아 그의 축복을 받았다. 인세의 신이라 할 만한 권능과 불멸의 삶을 누리는 황제에게 자식이란 다른 인간들과는 다른 의미였다.
황제는 일찍이 그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강대한 세력들과 동맹을 맺었고, 그러기 위해 그들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았다. 그 수만 수십이었으며, 그 부인들에게서 난 자식들의 수는 백 명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그 자식들에게 대단한 미래는 없었다. 황제는 불멸하며, 따라서 황좌에서 내려오는 일 따위는 없었다. 황비들이 하나 둘씩 늙어 죽어갈 때에도 황제는 처음 모습 그대로였고, 자식들이 죽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피를 이어받은 황자들은 수명이 보통 인간들보다 월등히 길었다. 허나 그런 그들조차도 황제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개중 몇몇,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여 무언가 이루고자 했다. 그런 그들은 전장에 뛰어들었다. 고귀한 신분으로 갑옷을 입고, 칼을 들어 시체와 피가 강을 이루는 땅으로 향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불꽃을 태우다가 사라져갔다.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는 그들과 비슷하면서도 달랐다. 만약 그가 50년만 더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 역시 먼저 간 형제들과 같은 길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태어났을 무렵에는 이미 제국의 정복전쟁이 시들해진 뒤였다.
그것은 7황자에게 있어 저주였다. 형제들보다도 더 강한 능력을 타고난 그는 지닌 능력만큼이나 뜨거운 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덜 떨어진 다른 형제들처럼 황도에서 세월만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러나 방법은 없었다. 제국은 황자들이 자기들 멋대로 날뛰게 용인하지 않았다.
결국 7황자는 점점 스스로 망가져갔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기회가 찾아오기 전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