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화
그들은 곧장 7황자의 궁으로 안내되어 갔다.
그곳은 본래 테리브란의 성주가 머물던 곳이었는데, 7황자가 오게 되면서 관저를 허물고 그곳에 성을 축조했다고 했다.
'웅장하군.'
베이고르의 왕성보다도 더 거대하고, 화려했다. 성벽에는 빠지는 곳 없이 병사들이 도열해 있었으며, 사신이 온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몇몇 병사들이 나팔을 불고 있었다.
"으음."
여기까지 오면서 느낀 바로, 사미르 자작은 심약한 이는 아니었다. 나름대로 강단이 있으며, 성질도 부릴 줄 아는 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지금은 마른 침만 몇 번씩 삼키며 애써 표정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성문에서부터 이어지는 군기 정연한 병사들의 모습은 다가오는 그들에게 적지 않은 압박감을 선사하고 있었다.
규칙적으로 울리는 북이며 나팔 소리는 덤이다. 명백히, 이것은 사신을 맞는 자세는 아니었다.
이것은 환영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것은 금방이라도 창 끝을 이쪽에 겨눌 것처럼 부리부리하게 눈을 치뜨고 있는 병사들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자작 각하."
사이주 제레이스와 카자쿠는 앞서 가고 있었다. 명목상 손님인 사미르 자작과 군터는 무리의 중간 즈음에서 말머리를 나란히 한 채 움직이고 있었다.
"군터 경. 할 말이라도 있나?"
"기죽지 마십시오."
"뭐라?"
불쾌한 표정이다. 어쩌면 일개 기사 나부랭이가 자작이며 왕의 사신인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고깝게 들렸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군터는 담담히 할 말을 했다.
"지금 이곳에서, 자작 각하께서는 베이고르의 얼굴이 아니십니까. 저들이 어찌 나오든지, 설령 목 앞에 칼을 들이밀더라도 당당하셔야 합니다."
"그럼! 당연하지. 경이 말하지 않아도 잘 알고 있네."
다 알고 있다며, 책망하는 듯한 목소리로 답한 사미르 자작은 말을 끝내고 나서 잠시 침묵하다가 한 마디를 더했다.
"…내 반드시 그리할 것이네. 어쨌거나 날 생각해서 해준 말이겠지. 마음 써주어 고맙군."
"별 말씀을."
이곳에 오기 전까지 그들은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낯설고, 어쩌면 위험할 수도 있는 제국의 땅을 밟게 된 베이고르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서로 조금은 다른 목적을 띄고 온 그들이었기에 살갑게 이야기나 나눌 처지는 되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은 위태로움 속에서 그들은 비로소 서로에게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문을 열어라!"
세 개의 성문을 지나는 동안 성문이 미리 열려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꼭 그 앞에서 한 번을 멈춰 서고, 카자쿠가 크게 외치고 나서야 천천히 성문이 열렸다.
쿵!
세 번째 성문이 열렸다. 가장 화려했던, 마지막 성문이었다.
마지막이라는 것을 안 것은, 성문이 열리자마자 좌우로 길게 도열해 있는 병사들을 봤기 때문이다. 이전에 보았던 병사들과는 확연히 다른, 하나하나가 어지간한 무관 급은 되어 보이는 이들이었다. 갖춘 무장도, 풍기는 기세도.
그런 이들이 족히 3, 400은 되어 보였다. 그런 이들이 말단 병사들처럼 성문 뒤편에서부터 쭉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끝에는 웅장해 보이는 계단이 있었고, 그곳에는 문무관리들이 또 줄지어 서 있었다.
"사신은 안으로 드시오."
누군가가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미르 자작은 듣지 못했다. 그는 수백 무인이 풍기는 기세에 완전히 주눅이 들어버렸다.
"사신은 안으로 드시오."
같은 말이 한 번 더 반복되고서야 그는 실책을 깨닫고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멈춰 선 말의 배를 찼다.
"여기서부터는 말에서 내리셔야 하오."
어느새 말에서 내린 사이주 제레이스가 말했다. 그에 사미르 자작과 군터, 그 뒤로 말을 탄 이들 모두가 하마했다.
"……."
사미르 자작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뒤편의 수하에게 왕이 내린 친서를 건네 받고서 숨을 가다듬었다. 여전히 수백 쌍의 날카로운 시선이 그에게 날아들고 있었다.
외롭게 한 발 나서려던 그의 옆에,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다.
"함께 가시지요."
사미르 자작이 군터를 보며 흐릿하게 웃었다.
"안으로 들어가는 게 허락되는 건 나뿐일세."
"사신은 안으로 들라 했지요. 소관 또한 사신입니다. 전하의 사신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말장난일 뿐이야."
"그렇습니까?"
군터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몇 걸음 옆으로 물러서 길을 튼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물었다.
"말장난이네. 하지만…틀렸다고만 볼 수도 없겠군."
사이주 제레이스는 가볍게 웃었다. 허나 그의 옆에 있던 카자쿠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 사이주 공! 그게 무슨 소리요?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걸 알면서 사족은 왜 붙이는 거요? 그거야말로 말장난이 아니오!"
"하지만 카자쿠 공. 생각해 보시오. 전하께서는 사신을 들라 하셨소. 베이고르 왕의 사신만 사신은 아니지. 그렇지 않소?"
"흥. 난 모르겠소이다. 들어갈 수 있는 건 베이고르 왕의 사신 한 사람뿐이오. 잡스런 인사가 끼어드는 건 용납할 수 없소이다."
"공의 뜻이지 전하의 뜻은 아니오."
"뭐라 하든 상관 없소. 내 앞을 지나 들어갈 수 있는 건 저 자, 왕의 사신 한 사람뿐이니."
팔짱까지 끼고 앞을 막아선 카자쿠는 군터를 결코 보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를 힐끗 보았다. 군터와 눈이 마주친 그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전하의 뜻은 아니네."
"그렇다면, 제가 지나간다고 해도 책하시지는 않겠군요."
"지나간다? 웃기는군. 누구 마음대로?"
카자쿠가 콧방귀를 뀌었다. 그의 부리부리한 눈이 군터를 노려봤다.
군터가 앞으로 나섰다.
"군터 경. 이럴 필요 없네."
"저 또한 사신입니다."
"말장난은 용납할 수 없다 했다!"
군터가 세 걸음 째 나아갔을 때, 팔짱을 끼고 있던 카자쿠가 팔을 풀었다. 그리고 네 걸음 째. 큼지막한 주먹이 광풍을 일으키며 날아들었다.
콱!
군터는 손을 펴 카자쿠의 주먹을 받아냈다. 다만 주먹에 실린 힘이 너무도 강맹하여 두 걸음을 뒤로 물러서야 했다.
"흥!"
카자쿠가 아랑곳 않고 다시금 주먹을 날렸다. 군터는 잡은 주먹을 뒤로 당기며 그의 중심을 흔들고, 동시에 앞서 있던 발을 차올렸다. 그러자 카자쿠는 뻗던 주먹을 내려 차올리는 발을 막는 동시에 붙들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주먹을 잡아 챈 것이 오히려 족쇄가 됐다.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카자쿠는 군터의 몸을 들어올려 땅에 내리꽂았다.
그러나 군터도 순순히 당해주지는 않았다. 몸이 들리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으나, 땅에 내리 꽂히는 순간 몸의 균형을 맞추어 다리로 착지하고 충격을 최소화했다. 그 기민한 몸놀림에 카자쿠의 눈이 빛났다.
탁!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본격적인 박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주먹과 주먹이 얽히고, 발과 다리가 쾌속하게 상대의 몸을 두들겼다.
"허허. 이런이런."
자연스레 두 사람이 날뛸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 멀찍이 물러난 사이주 제레이스는 격렬하게 맞붙는 두 사람을 보며 재미있다는 듯 미소 지었다. 반면에, 사미르 자작은 경악하여 입을 쩍 벌렸다.
"저, 저래도 되겠습니까? 말려야……."
"말려야 한다면 전하께서 말씀을 내리셨을 거요. 하지만 그렇지 않으셨으니, 지켜 봅시다. 이런 여흥은 흔한 게 아니오."
"여흥이라니요? 그 무슨."
"오오!"
사이주 제레이스가 탄성을 질렀다. 카자쿠의 절묘한 뒷발차기가 군터의 옆머리를 타격한 것이다. 척 보기에도 제대로 들어간 일격이었다. 군터도 충격을 느꼈는지 휘청거리며 한 발자국을 물러났다.
카자쿠가 승기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물러서는 군터를 향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턱!
한 순간이었다. 뒷걸음질쳤던 군터가 한껏 몸을 낮추고, 달려들던 카자쿠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 주먹은 아슬아슬하게, 친다기보다 걸치듯이 카자쿠의 턱을 스쳐 지나갔다.
그 빗맞은 것 같은 주먹 한 방에 기세 좋게 나아가던 카자쿠의 몸이 덜컥 멈춰 섰다. 그뿐 아니라 다리가 풀린 듯, 휘청거리며 균형을 잃기까지 했다.
순식간에 형세가 역전됐다. 호기를 맞은 군터는 기세 좋게 카자쿠를 몰아쳤고, 카자쿠는 충격을 해소할 시간을 벌기 위해 수세로 일관하며 연신 뒷걸음질쳤다. 그리고 어느 정도 회복이 되었다 싶었을 때 곧바로 반격에 나섰다.
쿵! 쿵!
피륙이 맞부딪치는 소리라고는 믿을 수 없는 둔탁한 소리가 연신 터졌다. 서로를 죽일 것처럼 붙어 싸우는 두 사람은 누구 하나가 우위를 점했다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어느 한쪽이 승기를 잡았나 싶으면 질세라 다른 한쪽이 기세를 올렸고, 위기다 싶으면 어떻게든 반전을 이루어냈다.
퍽!
카자쿠의 목이 휙! 하고 돌아갔다. 동시에 군터의 턱이 꺾일 듯 들렸다.
"크응! ?!"
두 사람이 동시에 입에 찬 핏물을 내뱉었다. 상대를 잡아먹을 듯 이글거리는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제법이구만. 이렇게 애를 먹어보기는 간만인데."
"그쪽도 제법이오."
"맨손으로 결판을 보려면 하루가 꼬박 지나도 모자라겠어."
"그렇겠군."
약속이라도 한 듯, 두 사람의 손이 허리춤의 검 손잡이로 향했다.
"그쯤 했으면 됐다! 사신들은 들라!"
멀리서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자쿠가 입맛을 다시며 검으로 움직인 손을 거둬들였다.
"아쉽군."
"……."
카자쿠가 물러나니 군터도 손을 거뒀다.
'이 목소리. 7황자인가.'
목소리는 계단 너머에서 들려왔다. 거리가 제법 있었음에도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또렷했다.
"가시지요."
잔뜩 얼어 있던 사미르 자작에게 말을 건네니, 그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다가왔다.
"자네는 목숨이 여럿인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 무슨 배짱인지 모르겠군. 이곳은 제국일세."
"그렇다 한들, 사신을 죽이기야 하겠습니까."
"크핫!"
과격한 웃음소리. 돌아보니 카자쿠가 큭큭 거리며 웃고 있었다.
"대담하군. 대담해. 허나 전하의 앞에서는 조심해야 할 거다. 전하께서는 대담한 자와 용맹한 자를 좋아하시지만, 건방진 자는 용서치 않으시거든."
"고맙소. 유념하리다."
일그러져 있던 얼굴에 웃음기가 감도는 것처럼, 그들을 둘러싼 좌중의 분위기에도 변화가 있었다. 카자쿠와 군터가 죽일 듯 치고 박던 때부터, 오직 그들을 찍어 누르려던 기세와 시선들이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군터는 그것을 일말의 '인정'이라고 해석했다.
수백 병사들을 지나 계단 앞에 이르렀다. 가장 아래에 있던 무관 중 하나가 그들을 멈춰 세웠다. 정확히는 군터였다.
"무장은 허용되지 않소."
당연한 말. 군터는 허리춤의 검과 등에 맨 칸젤을 내려놓았다. 검은 풀어서 무관에게 건넸고, 칸젤은 바닥에 내리 꽂았다. 칸젤의 창날은 단단한 석재 바닥에 깊숙이 파고 들었다.
"……."
무관이 비켜서고, 사미르 자작과 군터는 계단을 올랐다.
양 옆에 나뉘어 선 제국 관리들의 시선이 그들을 헤집었다. 마치 삭풍 앞에 발가벗겨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리 길지 않았지만, 유난히 길게 느껴졌던 계단을 다 올랐다.
큼지막한 두 짝의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막아서는 자 없었고, 안내하는 자 또한 없었다. 그들은 열린 문을 넘었다.
수십 걸음을 걸었다.
군터는 짐승의 소리를 들었다. 낮게 으르렁 거리는, 맹수 특유의 소리를.
족히 수백 걸음을 걸었다.
탁 트인 대전과, 그 끝에 놓인 화려한 왕좌. 그 왕좌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은 사내가 보였다.
"기대도 안 했던 재미를 주었구나."
사내가 손을 뻗어 커다란 짐승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짐승은 기분 좋은 듯 눈을 감으며 입을 벌렸다. 보기만 해도 섬뜩해지는 이빨이 드러났다.
저 짐승의 이름을 안다. 살아있는 모습을 보지는 못했지만, 널려있는 가죽은 본 적이 있었다. 호피라 하여, 같은 무게의 금값보다도 더 비싼 귀물로 통했다.
호랑이.
다 자란 소보다도 커 보이는 대호 세 마리가 왕좌 근처에 앉아 있었다. 마치 개새끼처럼, 왕좌에 앉은 이를 향해 애교까지 부려가면서.
상상도 못한 광경에 사미르 자작은 다시금 입을 쩍 벌렸다.
허나 군터는 이 광경이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짐승의 습성은 명확하다. 약육강식. 약한 놈은 강한 놈을 따른다. 따르지 않으면 멀리 떠나거나, 죽는다.
저 대호들이 덩치 값을 못하고 왕좌의 사내에게 아양을 떠는 이유?
간단하다. 저 사내가 대호들보다 강하기 때문이다.
카자쿠가 강하다 생각했다. 역시 제국에는 강자들이 많겠구나 하고 즐거워 했었다.
허나 왕좌의 사내를 보면서는,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저건 뭐지?'
어째서 이 넓은 궁에 호위 하나 없는가. 걸어오며 의구심을 가졌으나 왕좌에 앉은 사내를 보며 풀렸다.
그는 강자였다. 적어도 이제껏 군터가 직접 눈으로 본 이들 중에서는 가장 강했다. 그것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