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화
사자의 요람이라는, 다소 난해하고 거창한 별칭이 어째서 관문 같은 것에 붙어있는지 의아했었다.
그런데 그 이유는 눈으로 직접 보고서 바로 알 수 있었다.
두 돌산의 사이에 관문이 들어선 형태였다. 관문을 수사자의 커다란 머리라 친다면, 양 옆으로 크고 길게 뻗은 암벽들은 마치 사자의 앞발같이 웅장하면서도 사나워 보였다.
"천혜의 요새군요."
사미르 자작이 크게 감탄했다. 그는 그저 척 보기에도 무척이나 견고하며, 웅장한 관문을 보며 있는 그대로의 감상을 토했다.
그러나 군터는 그와는 조금 다른 것을 보았다.
"지세가 절묘하군요. 협곡 사이에 요새를 지은 겁니까?"
그의 물음에 사이주 제레이스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허면?"
"본래 하나의 암산(岩山)을 파내어 그 안에 지은 거요. 쿠엘단 전하의 술법으로."
"……."
저 관문, 혹은 요새가 다시 보였다. 술법이라? 암산을 파냈다고?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파헨델에서 하루를 묵을 거요. 아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소이다."
"무엇입니까?"
"파헨델의 사령관은 세레온 우슈무르 장군이오. 제국의 적포장군이며, 깐깐한 성미로 유명하지. 그는 황자 전하와도 거리를 두고 자신의 직무에만 충실한 사내요."
군인으로서 매우 바람직하다 할 수 있다. 말만 들어서는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다. 허나 사미르 자작은 뭔가 눈치를 챈 것 같았다.
"그는 황자 전하의 명을 받지 않습니까?"
"그럴 리가. 그랬다면 지금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겠소? 다만 그는 전하의 명을 듣지만, 그러면서도 본인의 완고한 기질을 죽이지 못하오. 그래도 능력 하나만은 확실하니 파헨델의 사령관으로 유임을 시키는 것이지만……. 아무튼 그는 여러분을 별로 달갑게 여기지 않을 거요. 그러니 파헨델에서 머무는 하루 동안은 조심하는 것이 좋소. 우리는 하루를 최대한 조용히 머물다 갈 거요."
제국의 눈으로 보면 베이고르는 적국이다. 잠시 싸움을 멈추고 있을 뿐, 언제 다시 군대를 일으켜 들이쳐도 이상하지 않은 상대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상대와 한가로이 사절단이나 오가는 것을 보통의 제국군이라면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터.
"마중을 나왔군."
그들이 베이고르를 어찌 생각하는가에 대해서는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쿵!
관문으로 어느 정도 가까이 가자 문이 열리더니 족히 수백은 되어 보이는 병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선두에는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오는 붉은 전포를 걸친 무장이 있었다.
"사이주 공. 먼 길 다녀오시느라 노고가 많으셨소."
"고맙습니다 장군. 굳이 이렇게 직접 마중 나오지 않으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하는 일 없이 사무실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고생하신 분께 얼굴이라도 비추는 것이 더 좋겠지. 아니 그렇소?"
"그리 말씀해주신다면 저야 감사한 일입니다만."
날카로운 인상의 사내였다. 다소 신경질적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사이주 제레이스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못마땅한 기색을 감추지 않은 채로 그의 뒤에 있는 베이고르의 사신들을 쓸어보았다.
군터에게도 그의 사나운 시선이 닿았다. 군터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담담히 그를 쳐다보며 마주보았다. 그에 세레온 우슈무르는 인상을 구겼으나 차마 뭐라 할 수는 없었던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 하루를 머물다 가신다고?"
"예. 그간 전하께서 맡기신 임무를 위해 열흘 간을 쉬지 않고 이동해 왔습니다. 그러니 하루를 머물며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움직이려 합니다."
"그럼 그러시오. 머무시는 동안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겠소."
"감사합니다."
그가 휙! 하고 몸을 돌렸다.
"과연……. 보통이 아니군요."
보리스가 작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제국의 위장이다. 황제에게서 직접 임명을 받는 자들이 변변찮을 리 없지."
그렇다고는 하나 적포라면 청녹흑적의 위계 중에서도 말단이다. 그렇기에 중요하다고는 해도 관문에서 사령관 직을 맡고 있는 것이리라. 그 이상이었다면 사령관이 아니라 군단장 정도가 되어 한 개 지방의 방위를 책임졌을 것이다. 그 옛날, 바크렌을 수호했던 아란딜 페레모어처럼 말이다.
"상당한 무인인 것 같습니다. 풍기는 기세가 예사롭지 않습니다."
군터는 아들의 진지한 목소리에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보리스가 그를 올려다보았으나 군터는 금세 표정을 고쳤다.
"자신의 눈높이에서 보이는 법이다."
"아버지께서는 달리 보셨단 말입니까?"
"저 자가 대단하다고 느꼈다면, 그건 네 수행이 그만큼 부족했기 때문이다."
군인이 아니라 무인으로서 판단하자면, 저 세레온 우슈무르라는 자는 그리 대단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말단 위계인 적포라서 그런 것일까? 직접 칼을 맞대고 마무리까지 해주었던 아그니스 체스퍼에 비하면……. 글쎄. 그리 인상적이지는 않다.
*
파헨델에서 머무는 하루. 사이주 제레이스의 염려와는 달리 별 일은 없었다. 그의 말처럼 사절단의 인원들이 행실을 조심하기도 했고, 세레온 우슈무르도 7황자의 손님이라 할 수 있는 자들에게 대놓고 해코지를 할 수는 없었으리라.
'대단하군.'
지금은 관문의 역할을 하고 있다지만, 파헨델은 처음에 그리 목적되어 지어진 것처럼 지금도 틀림없이 대단한 요새였다.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대충 짐작하기로 요새 내에 머무는 병력이 수천은 되어 보였고, 그런 병사들이 틈 없이 지키는 성벽은 자그마치 3중이었다. 그런데다 그 폭 또한 넓어 대군이 쳐들어온다 해도 쉽게 도모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병사들도 군기가 잘 들어 있다.'
사령관의 역량이라고 봐야 한다. 듣기로 이곳에서 전투가 치러지지 않은지 벌써 백 년이 넘었다는데도 이들은 엊그제 전투를 치른 것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풍기고 있다.
'이 또한 제국의 저력인가.'
사자는 웅크리고 있으나, 언제든 뛰쳐나갈 준비가 되어 있다. 파헨델에서의 하루 동안 군터는 그것을 확실히 느꼈다.
"살펴가시길. 전하께도 안부를 전해주시오."
"그리하겠습니다."
그렇게 하루를 푹 쉬고 보급도 충분히 받고서 다시 길을 나섰다. 울퉁불퉁한 야지를 지나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파헨델을 통과하고서부터는 그래도 도로라 할 수 있는 것이 넓게 펼쳐져 있어 이동이 편했다.
"길이 정비가 잘 되어있군요."
"제국은 광활하오. 그 넓은 국토를 다스리려면 도로의 정비는 필수지. 평범하게 가면 한 달이 걸리는 길을 정비된 도로를 이용해 이동하면 보름에 이동할 수 있으니, 벽지 중의 벽지가 아닌 이상 제국의 모든 곳에는 길이 나 있다오. 그리고 그 길은 모두 리비암으로 통하지."
"리비암이라면."
"제국의 심장.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지. 물론, 황궁이 있는 곳이기도 하고."
황도 리비암. 황제가 거하는 도시. 그의 말처럼 제국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제국의 모든 길은 황도로 통한다. 그야말로 제국의 심장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곳.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따라가면 언젠가 그곳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지금 그들이 제국에 들어와있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군터 경."
"예."
길을 가던 중에 사이주 제레이스가 가까이 다가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전하를 뵙기 전에 알아두셔야 할 것이 있소."
"말씀하십시오."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이 그임에도 사이주 제레이스는 망설이는 기색을 보였다.
"그대가 알지는 모르겠으나…전하께서는 매우 특별한 분이시오. 매우 자신감이 넘치시며, 호전적이시지. 본래 전하께서는 베이고르와 일전을 치르길 바라셨소."
"……."
"내가 느닷없이 당황스러우시오?"
"아니. 그렇지는 않습니다. 단지 왜 이런 이야기를 제게 하시는지 몰라 의아할 뿐입니다."
"여러 가지 여건과, 신하들의 만류로 인해 뜻을 돌리긴 하셨으나 그분의 마음 속에는 분명히 미련이 남아있을 것이오. 아무리 상황이 여기까지 왔다 해도 전하께서는 여차하면 이 모든 것을 없던 일로 만들고 당장에라도 군대를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오."
"……."
"허나 나는 양국간의 우호가 계속되었으면 하는 사람이오. 지금 같은 때에, 전하께서는 북쪽이 아니라 남쪽을 향해 말머리를 돌리셔야 한다고 생각하오. 그러니 잘 들으시오."
안 그래도 작던 목소리가 더 작아졌다.
"분명히…전하께서는 시험을 하실 거요."
군터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
데이븐랏지의 수도 테리브란은 본래도 번화한 도시였지만, 지금에 이르러서는 제국 북부의 중심지가 해도 무방할 만큼 붐비는 곳이 되었다. 이유는 단 하나. 유력한 황위 계승자 후보 중 한 명인 7황자 자콥 엘 트라소프가 이곳에 둥지를 틀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제국의 주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그가 본거지를 마련한 곳이기에, 테리브란은 유례 없는 성세를 맞았다.
"당장에라도 출정할 수 있는 상주 병력이 2만이오. 전하의 명만 떨어진다면 한 달 안에 10만 병력을 모을 수 있지. 당연히 어중이떠중이가 아닌, 강병 중의 강병들로만 말이오."
웅장한 도시가 시야에 들어올 무렵, 사이주 제레이스는 자랑스런 목소리로 외쳤다. 멀찍이서 먼지구름을 피우며 달려오는 일단의 병력이 보였다. 제국 황가의 깃발을 단 병사들로, 이쪽을 마중 나온 것처럼 보였다.
"사이주 공!"
선두에서 말을 몰아온 사내는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얼굴이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멀리서 가볍게 손을 들며 반가움을 표시하는데도, 그 기백이 우렁찬 목소리를 타고 전해져 왔다.
"카자쿠 공! 전하께서 보내셨소?"
"그렇소! 전하를 기다리시게 하다니! 엄히 책임을 물으실 거외다!"
"그대의 바람은 아니시고?!"
"당연히 그런 것도 있소! 하하핫!"
카자쿠라는 사내는 이제껏 군터가 보지 못했던 부류의 사람이었다. 투구를 쓰지 않아 훤히 드러난 그의 얼굴은 숯처럼 시커맸다.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저 남쪽 어딘가에는 있다고 들었지만, 이렇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피부는 그렇게 검은데 웃으며 드러나는 이빨은 또 그렇게 하R다.
"가십시다! 엄히 벌을 하실지 어떨지는 모르나, 전하께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신 것은 사실이니까."
"그럽시다! 아! 여기 사미르 자작께 인사 드리시오. 베이고르의 국왕께서 보낸 특사시오."
그 말에 칸자쿠라 불린 사내의 부리부리한 눈이 돌아갔다. 그러나 순간이었다. 그는 사미르 자작은 본 체 만 체 하고 다시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말했다.
"내가 마중을 나온 건 그대요. 갑시다."
그러면서 그는 휙 말머리를 돌렸다. 명백한 모욕에 사미르 자작의 얼굴이 붉어졌다.
"허허. 이런이런."
난처하다는 듯 혀를 찬 사이주 제레이스가 사미르 자작을 달랬다.
"너무 노하지는 마십시오. 카자쿠 공은 전하의 심복으로, 사람을 대하는 데 많이 서툰 사람입니다."
"끄응! 알겠소이다."
다소 불편한 순간을 뒤로 하고, 카자쿠와 그의 병사들을 따라 일행은 테리브란의 성문을 향해 나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