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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58화 (358/1,064)

358화

야스메티가 해준 말은 군터를 조금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

"유의하셔야 하지만, 그렇다고 또 너무 신경 쓰실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이는 당연히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도리어 제법 늦었다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불편한 마음을 달래고자 하는 입바른 말이 아니었다. 야스메티는 진정으로 이것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이야기했다.

"제가 그리 길게 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보며 느낀 바가 있습니다."

"뭔가."

"이상은 현실에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겁니다. 머릿속으로 그리는 것만이 가능하기에 이상입니다.

사람간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당연히 군신의 관계 역시 여기 포함이 됩니다.

군주가 신하를 믿고, 신하는 그저 충실히 그런 믿음에 섬김으로써 보답하는 것이 이상적인 군신의 관계이겠으나…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지요. 설령 겉으로는 그래 보일지라도, 속으로는 끝없이 서로를 두려워하고 의심합니다. 허나 우습게도, 그렇기 때문에 군신의 관계가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장주님께서는 이 의미를 아시겠습니까?"

"알 것 같군."

두려워하면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면 조심하게 된다. 조심하면 일을 그르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게 되니, 관계가 유지된다.

"장주님. 영주님께 너무 거창한 것을 기대하지 마십시오. 예를 들면 무조건적인 신뢰 같은 것 말입니다. 그 기대를 접지 않으시면 장주님께서는 언제고 상처를 입게 되실 겁니다."

"하. 처음부터 그런 말랑한 것을 기대한 적은 없으니 오해할 필요는 없다. 다만 신경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지.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나."

지금까지 영주는 그를 미트라스를 견제하기 위한 일종의 도구로써 사용해왔다. 힘 있는 신하들이 서로를 견제하는 그림이 그 위에 위치한 지배자로서는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서서히 그 이상적인 그림이 흐트러지려 하고 있었다. 군터가 전국적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면서부터다.

군주의 입장에서 휘하의 권신이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지만, 꾸준히 경계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작금에 이르러 군부의, 그리고 군부에 속하지 않은 이들까지도 적지 않게 군터의 이름을 칭송하고 있다. 제국에서 온 7황자의 특사도 유별난 호감을 표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질적으로 군터가 더 대단한 권력을 손에 쥐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허나 명성, 명망이라는 것은 당장 눈에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지금 군터는 그것을 가졌다.

"이해가 안 되는군."

"무엇이 말입니까?"

"이리 되리라는 걸 영주께서 모르셨을까."

"아셨겠지요."

"그랬다면 차라리 내게 무투회의 참가를 권하지 않으셨으면 될 일 아닌가."

"그랬다면 왕국의 모든 영주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깨를 펴실 수 없었겠지요. 지금과 같은 상황을 예견하셨더라도 영주님은 장주님을 참가시키셨을 겁니다. 말하자면, 이 모든 일들은 결국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장주님께서는 본래 권신이셨습니다. 거기에 명망이 더해졌을 뿐이지요. 균형이라는 것은 항상 맞을 수는 없는 것이기에, 언제고 장주님께서 미트라스를 넘어서는 순간부터 견제는 시작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건가."

"예. 이와 같은 경우는 옛적부터 아주 흔한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완전히 믿을 수가 없기에, 항상 서로에 대한 의심을 하며 살아가지요. 그걸 겉으로 드러내고 안 드러내고의 차이만 있을 뿐, 본질은 항상 같습니다."

"현명하군. 나이도 그리 많지 않으면서 세상을 다 아는 듯이 이야기하는구나."

"저보다 앞서서, 오래 산 이들의 삶이 글 속에 녹아 있지요. 거기에 더해 스스로도 세상을 최대한 넓고 두루두루 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글은 익혔지만 군터가 보는 것은 업무에 관련하여 올라오는 보고서 같은 것들이 전부였다. 책 같은 것을 읽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금 야스메티의 말을 들어보면 평소에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책을 읽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물론 나중에 여유가 조금 더 생겼을 때의 이야기고, 지금은 아니다.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곳의 일은 자네에게 맡기지. 살라스, 할렌과 상의하게."

"예. 그리하겠습니다."

*

위글로우에는 사이주 제레이스가 이끄는 7황자의 사절단만이 아니라, 베이고르의 왕이 파견한 사절단 또한 머물고 있었다. 보내준 축하사절에 대한 답신 격으로 7황자에게 보내는 사신이었다.

"이미 많은 시일이 흘렀으니, 더 이상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절단의 대표인 조에모 사미르 자작이 은근한 목소리로 재촉했다. 왕의 서신을 하루라도 빨리 7황자에게 전해야 하는 입장인 그로서는 어떤 이유로든 이렇게 일정이 늘어지는 것이 영 달갑지 않았다.

물론 코누디스 자작이 베풀어주는 연회는 즐거웠지만, 더 이상 여기서 뭉개고 있다가는 해가 바뀌어서야 배나시드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그렇지 않아도 이제 곧 출발하려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물론입니다. 코누디스 자작님의 후의는 차고 넘칠 정도로 받았으니, 이제는 이 사람도 할 일을 해야지요."

그거 참 다행스러운 말이다.

말뿐이 아니라, 사이주 제레이스는 곧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영주를 찾아가 이제 떠나겠다는 뜻을 전한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더 머무르시라 하고 싶지만 그건 내 욕심이겠지. 먼 길 편히 가시기 바라오."

"영주님의 후의는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께도 잘 말씀 올리지요."

"하하. 그래주시면 고맙겠소."

준비는 항상 되어 있었다. 사이주 제레이스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영주에게 떠나기로 말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 영주 관저 앞으로 수백이 훌쩍 넘는 인원이 도열했다.

"군터. 믿고 맡기겠네."

"예."

"데이븐랏지 쪽은 초행인가?"

"베이고르(바크렌) 밖으로 나가는 것 자체가 처음입니다."

"하하. 많이 보고 오게. 세상은 참 넓지. 좋은 기회가 될 게야."

웃으며 어깨를 두드려 격려해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수하를 아끼는 상관의 모습 그 자체다. 그러나 한 번 그런 이야기를 들어 버려서인지, 군터는 자꾸만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무표정을 유지하려 노력해야 했다.

"소임을 다하고 오겠습니다."

믿음직스럽다는 듯 껄껄 웃은 막시밀리언이 슬쩍 가까이 다가오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이미 이야기 했었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든 최대한 몸을 낮추도록 하게."

"예."

코누다이안에서 보내는 인원은 100명 가량이었다. 무관 및 병사들이 70정도였고, 20은 짐꾼들. 그리고 나머지는 관리들이었다.

그리고 그 세 부류 중 엄밀히 따지면 첫 번째에 속하지만, 실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보리스가 군터의 옆에서 말을 몰았다.

행렬에 섞여 위글로우의 성문을 나설 때부터 보리스의 앳된 얼굴은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아버지. 아버지는 제국에…아니. 데이븐랏지에 가본 적이 있으십니까?"

"아니. 없다."

짤막하게 답한 군터는 뒤늦게 한 마디를 더했다.

"그런데 이번에 네 덕에 한 번 가보게 되었구나."

그 무뚝뚝한 말에 보리스의 입가에 걸린 웃음이 진해졌다.

*

7황자의 세력은 제국 북부의 4개 주를 아우른다. 데이븐랏지와 본다인, 리바스트라와 아록이 바로 그 네 곳인데 그 중에서도 데이븐랏지는 그의 본거지였다.

그를 후견하는 제레이스 가문이 총독 위를 역임하고 있는 곳도 역시 그곳이었다. 때문에 코누다이안에서 출발해 베이고르를 벗어난 사절단의 목적지는 데이븐랏지였다.

"데이븐랏지에 가기 위해서는 리바스트라와 본다인의 접경을 지나야 하오. 두 곳의 경계가 우리가 가는 길목에 맞닿아 있지."

사이주 제레이스가 초행길인 군터에게 간단히 설명해주었다.

"마중을 나옵니까?"

"글쎄. 아마 그렇지는 않을 거요. 말했다시피 우리가 가려는 길은 두 주의 경계에 절묘하게 걸쳐 있거든. 어느 쪽이든 마중을 나오려면 너무 멀리 움직여야 하지. 게다가, 우리는 곧장 파헨델을 지날 거라서 말이오. 사람이 나온다면 기껏해야 인근 도시의 성주들이나 나오겠지."

"파헨델? 그게 무엇입니까?"

"쿠엘단 전하께서 과거 베이고르와의 일전을 위해 세우신 거대한 전쟁요새요.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관문으로 쓰였고, 지금도 그러고 있지."

함께 듣고 있던 사미르 자작의 안색이 슬쩍 굳어졌다. 전쟁요새니, 과거의 일전이니 하는 이야기들에서 묘한 위압감을 느낀 것이리라. 지금 베이고르의 입장은 어떻게든 7황자와의 충돌을 피하려 함이니, 아무리 과거의 일이라 해도 이런 흉악한 이야기들은 별로 달갑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기대해도 좋소. 정말 웅장하거든."

대관문 파헨델의 이명은 '사자의 요람'이라 했다. 단지 인간이 세운 시설에 불과하나 그 기상과 위용이 남달라 절로 그런 별칭이 붙었다고.

그 이야기를 들으니 군터도 내심 기대가 되었다. 그의 옆에 딱 달라붙어 가던 보리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파헨델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부지런히 이동할 거요. 시일을 지체하기도 했고,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워낙 멀어서 말이오."

"처지는 일은 없을 테니 염려 마십시오."

"하하. 그런 것을 걱정한 것은 아니오. 그저 지루해지더라도 이해해달라는 말이지."

그냥 하는 농담인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끝도 없이 뻗은 초지와 구릉을 열흘 가량 이동하다 보니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었다.

하긴, 그러고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파헨델이 정확히 어디 쯤에 있는지는 모르나, 본다인과 리바스트라는 각각이 베이고르와 비등한 규모를 가진 주들이었다.

"제국은 정말 넓군요."

벌써부터 이런 소리가 나왔다. 제국은커녕 베이고르조차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는 어린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긴 하지만 말이다.

"벌써 지친 것이냐?"

"아니요. 그런 건 아닙니다. 정말 감탄해서 그럽니다. 벌써 열흘 가까이 꾸준히 이동하고 있는데,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달라지지 않지 않습니까."

그 말대로다. 국경을 벗어나 이틀 정도 지났을 때부터 이런 풍경이 끝도 없이 펼쳐졌다. 소와 말 같은 가축들을 기르거나 농사를 짓기에 더 없이 적합해 보이는 비옥한 땅이다. 제국의 풍요로움이 느껴지는 듯한.

"이제 곧이라는구나."

"관문 말입니까?"

"그래."

서서히 지대가 낮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보이지 않던 산들도 멀찍이 보이기 시작했다. 관문이라는 것이 그냥 탁 트인 평야 지대에 있지는 않을 테니, 사이주 제레이스의 말이 아니었더라도 슬슬 가까워져 오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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