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화
보리스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제국에…한 번 가보고 싶습니다."
"으음?"
사이주 제레이스는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군터가 기억하기로는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놀랐다는 거다. 보리스의 말이 그의 예상범주 밖이라는 뜻이고.
"그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군."
"항상 들어왔습니다만, 실제로 본 적은 없었으니까 말입니다. 호기심이 쌓이고 쌓여, 이제는 언제고 한 번쯤 제국을 이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소망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제국에 가본 적이 없는가?"
"나기는 제국의 땅에서 났습니다만, 제 기억 속에 제국의 모습은 없습니다."
"아아. 그렇군. 열 넷이라 했었지. 흐음."
사이주 제레이스가 수염을 어루만졌다.
"어려운 일은 아니지. 어차피 베이고르 국왕 전하의 사절단이 나와 함께 가니, 자네는 나와 함께 갔다가 그들과 함께 돌아올 수 있을 것이야. 허나 마음에 걸리는 것은 자네가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아……."
보리스의 탄식을 어찌 받아들인 것인지, 사이주 제레이스는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은 군터에게로 옮겨갔다.
"어떻소 군터 경. 이미 한 말이 있는데, 별 것도 아닌 청에 무르기에는 조금 그렇지 않겠소?"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경이 내 체면을 세워주시겠소?"
"어떻게 말입니까."
"열넷 어린 아이가 홀로 움직인다면 신경이 쓰이겠으나, 부자(父子)가 함께 간다면 문제될 것이 무에 있겠소?"
지금 이 순간. 군터는 속으로 크게 감탄했다.
짐작은 했으나 확신은 할 수 없었는데, 이제야 이 모든 것이 야스메티의 머릿속에서 그려진 그림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사이주 제레이스가 이리 나올 것이라 확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과할 만큼 자신감 있게 나섰던 아들의 행동은 필시 그가 요구한 것일 터.
"으음."
여기서 즉답하는 것은 좋지 않다. 약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자 왜 그러냐는 듯 사이주 제레이스가 두 팔을 벌렸다.
"무엇을 망설이시오. 어차피 영주님께서도 우리 전하에게 사람을 보내실 터. 경이 그 무리를 이끌고 나와 함께 전하를 뵈러 가면 되지 않겠소? 겸사겸사 아들에게 제국 구경도 시켜주고 말이오."
"그 말씀도 옳습니다만, 공연히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까 싶어 그렇습니다."
"폐랄 것이 뭐 있겠소."
다음날 영주를 만나러 간 사이주 제레이스는 7황자에게 갈 코누다이안의 사절로 군터를 청했고, 영주 막시밀리언은 조금 생각하는가 싶더니 흔쾌히 그 요청을 수락했다.
그렇게 간단하게 결정되었다. 정말로 간단히.
*
아침에 일찍 영주를 만나 사절단의 일을 마무리 짓고 온 군터는 곧장 야스메티를 찾았다. 야스메티는 부름이 있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달려왔다.
"모두 네가 자네가 말한 대로 되었다."
'네가'가 아니고 '자네가'다. 자연스럽게 말이 그리 나와다. 이전에도 능력이 있음은 알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정말 크게 탄복했다. 그가 느낀 놀라운 만큼 야스메티를 대하는 군터의 태도 역시 달라졌다. 이제는 그냥 건네는 말에도 어느 정도의 존중이 담겼다.
"너무 정확히 맞아 떨어지니 뭔가에 홀린 것 같군. 무슨 술수라도 부렸나?"
"저는 그런 재주는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그저 최대한 알려고 했을 뿐이지요."
"알려고 했다? 무엇을 말인가?"
"사람입니다."
"사람?"
"사이주 제레이스는 호방한 사내입니다. 제국 명문 귀족 가문의 직계로 태어났으나 일찌감치 후계구도가 정해지면서 그는 최대한 권력의 핵심에서 멀리 떨어져 지냈지요."
"그게 중요한가?"
"중요하지요. 어떤 사람의 현재란 결국 과거에서 이어져온 결과물이니까요. 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과거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현재를 알고, 현재를 알면 미래에 앞으로 그가 어떻게 움직일지를 추측할 수 있습니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나."
"예. 말씀 드렸듯 사이주 제레이스는 호방하고 즉흥적인 성향이 짙습니다. 큰 일 앞에서야 당연히 다르겠지만, 이런 사소한 일 앞에서는 얼마든지 그 순간의 기분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자이지요. 어린 공자께서 나이답지 않은 당당함과 용맹함을 보이시니 그는 크게 기분이 좋았을 겁니다.
술이 기분 좋게 들어가면 어지간한 것에는 관대해지는 것처럼, 그 역시 그러했을 뿐입니다."
"보리스에게 어찌 해야 할지 알려준 것 역시 자네였겠고."
"예. 처음에 제가 한 일은 공자께 부탁을 드린 것뿐이었는데, 나중에 공자께서 저를 찾아와 도움을 청하시더군요. 하여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조언을 드렸습니다."
"그랬군. 어쩐지 녀석이 너무 날뛴다 생각했었지."
때때로 자신감이 과하지만, 그래도 분별 없는 녀석은 아닌데 조금은 이상하다 싶었다. 보리스가 그리 나서면서도 속으로는 속을 끓였을 것을 생각하니 지난 일이지만 웃음이 나왔다.
"저…영주님. 이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여쭐 것이 있습니다."
야스메티가 조금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군터는 의아해 하면서도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오늘 영주님을 뵈러 가셔서 사절단을 이끌고 싶다 요청하셨을 때, 영주님께서는 어찌 반응하셨습니까?"
"그건 왜 묻나?"
"알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처음 말씀을 드렸을 때는 조금 뜻밖이라는 반응이셨네. 그리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곧 흔쾌히 허락해주셨고."
"잠시 생각 후에 흔쾌히…말입니까."
"그래. 그런데 그건 왜 묻지?"
"음……."
언제나 미리 말을 준비해온 것처럼 술술 내던 야스메티가 드물게 시간을 끌었다. 그는 군터가 눈빛을 재촉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장주님. 이번에 사이주 제레이스가 직접 아국을 찾은 이유를 이전에 제가 말씀 드렸었습니다. 기억 하십니까?"
"…기억하지."
솔직히 말하면 반쯤은 잊고 있었다. 이제야 상기되었을 뿐이다.
그랬다. 사이주 제레이스는 7황자가 보낸, 노골적으로 말하면 염탐꾼 같은 자였다. 그의 눈에 베이고르가 어떻게 비치는지에 따라서, 그가 돌아가 7황자에게 무슨 말을 하느냐에 따라서 7황자의 칼끝이 베이고르를 향할 수도 있었다.
변명을 하자면, 그런 중차대한 임무를 맡고 온 사람치고 사이주 제레이스가 보이는 모습들이 너무 가볍고 때로는 유쾌하여 그가 지니고 있는 임무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어제의 일도 그렇고, 오늘의 모습도 그랬다.
악의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호감만을 가득 드러내며 웃는 사내에게서 그 어떤 숨겨진 진의를 추측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군터는 자신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인정했다.
안일했다. 어쩌면 알아차리지 못한 사이에 가면 위로 드러난 얼굴에 속아넘어간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야스메티는 그의 안일함을 지적하기 위해 말을 꺼낸 것이 아니었다.
"장주님. 있는 그대로 드러난 사실만 놓고 보았을 때, 7황자의 땅으로 가는 것은 자칫 사지(死地)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만약에 7황자가 남진하기 전에 먼저 아국을 정리하기로 마음을 먹는다면, 사절단은 그야말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 없습니다."
"……."
"물론 그리 되지는 않을 겁니다. 7황자가 아국을 칠 수도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일 뿐, 이미 7황자의 마음은 황도에 가 있습니다. 아국의 전력이 그의 눈에 들지도 못할 만큼 형편 없었다면 모를까, 그것이 아님을 확인했을 테니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않겠지요."
"허면 무엇이 문제인가."
"문제는, 영주님께서 흔쾌히 장주님을 보내기로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무슨 뜻이지?"
"장주님이시라면, 아끼는 부하가 위험한 곳에 가려 한다면…일단은 말리지 않으시겠습니까? 특히 별 것도 아닌 일로 간다 하면 더욱 그러시지 않겠습니까?"
"……."
"영주님께서 사절단이 짊어지는 위험에 대해 모르셨을 리는 없습니다. 허면 이를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자네가 그러했듯, 영주님께서도 양측 간에 전쟁은 없으리라 생각하신 거겠지."
"그렇다 하더라도 사절단의 파견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절차입니다. 일말의 위험 요소라도 있다면 측근이 거기에 끼는 것은 막아야 옳지 않겠습니까."
기어이 군터의 입에서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장주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야스메티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 숙인 고개를 들고 군터와 눈을 마주쳤다. 처음에 입을 여는 것은 망설였으나, 한 번 꺼낸 말을 잇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영주님의 마음 속에서…장주님께서는 밀려나신 듯합니다. 그것도 어쩌면, 상당히 많이."
*
"그가 사절단으로 가기를 청했다는 말입니까?"
"그래."
나른한 목소리. 옅은 연기가 감도는 방 안에서 두 남녀는 벌거벗은 채 누워 있었다.
"재미있더군. 사이주 제레이스가 그의 아들에게 제국을 보여주기로 약속을 했네, 어쩌네……. 그야말로 얼토당토않은 이야기였지."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글쎄. 둘이 잘 맞는 것 같더군. 하긴, 일찍이 후계에서 배제되고서 무부들과 그렇게 어울렸다니 뛰어난 무인에게 호감을 갖는 것이 이상하지는 않지."
"그는 이번의 일로 왕국 전역에 자신의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물론 당신의 이름 역시 빛나게 했지만……."
"무엇이 문제인가. 뛰어난 자가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 또한 군터는 내 휘하이니 그의 이름이 높아진다면 그 위에 있는 내 이름 역시 덩달아 높아지는 것.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지요. 하지만……."
"어째서 말을 하다 마는가."
"이전에도 군부에서 그의 명망이 높았던 걸로 압니다. 이제는 그를 따르는 이들이 더 늘어나겠지요."
"……."
"당신께서는 미트라스와 그가 서로 부딪치고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길 원하셨지요. 하지만 지금도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막시밀리언은 눈을 감았다.
똑바로 누운 그의 몸 위로 부드러운 손이 움직였다.
허리 언저리에서 시작된 손길이 목을 지나 얼굴에 이르렀을 때, 막시밀리언은 눈을 떴다. 그의 눈앞에는 언제나 변함없이 아름다운 여인의 얼굴이 있었다. 스물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 처음 봤던 때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조각 같은 아름다움이.
그녀의 매혹적인 눈동자가 그를 비췄고, 막시밀리언은 그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아찔함에 사로잡혔다.
"조심하셔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은 야지에 자란 풀과 같아서, 바람이 부는 대로 흔들리는 법입니다."
"…그래."
막시밀리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렸다.
"조심해서…나쁠 것은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