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6화
연회가 이어지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 군터는 사이주 제레이스에게 그의 가족들을 소개했다. 벨리사가 다소곳이 인사를 했고, 두 아이들 역시 어미의 옆에 나란히 서서 조심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부인은 아름다우시고, 자식들은 헌앙하군."
그의 시선은 특히 보리스에게서 오래 머물렀다. 어지간한 성인 남성보다 건장한 체구에 굳센 눈빛이 마음에 든 듯했다.
처음 볼 때부터 그런 느낌을 받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확신하게 되었지만 그는 확실히 호걸들을 좋아했다. 그리고 나이 때문에 아직은 앳된 얼굴을 하고 있지만 풍기는 기세만 보면 보리스도 어엿한 한 사람의 무인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가 어떻게 되는가?"
"곧 열 다섯이 됩니다."
"…곧 열 다섯? 그렇다면 지금 나이가 열 넷이라는 말인가?"
사이주 제레이스의 눈이 큼지막하게 뜨였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보리스를 위아래로 훑었다. 아랫사람이라 해도 그런 행동이 무례한 것임을 그 역시 모르지 않았지만, 이성적인 판단을 하기 전에 몸이 먼저 그리 움직였다. 그만큼 그가 받은 충격이 크다는 것이었다.
"열 넷. 열 넷이라니…허허. 믿기지 않는군. 설마 나와 농을 하는 건 아니겠지?"
"특사와 농을 할 이유가 있겠습니까. 제 아들은 틀림 없이 열 넷입니다. 조숙 하다는 말은 어렸을 적부터 많이 들으며 컸지요."
"그럴 만도 하지 않겠소? 솔직히 나도 아직 믿기지가 않는군."
무리도 아니었다. 사실 보리스를 처음 본 이들은 백이면 백 이런 반응을 보였다. 그나마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었다.
보리스도 그렇고, 실비아도 나이에 비해 체격이 큰 편이었다. 두 녀석 모두 날 때부터 크게 태어났고, 그렇게 자라왔다. 건강하기는 또 어찌나 건강한지 잔병 한 번 앓은 적이 없었으며, 힘은 또 어찌나 좋은지 어렸을 때부터 녀석들의 장난에 하인들이 많이 고생했었다.
"척 보기에도 기도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데…어떤가?"
"또래들 중 저보다 나은 이를 본 적이 없고, 부친 휘하의 무관들과도 수시로 겨루고 있습니다."
"하하하! 당차군. 당차. 그래도 오만하게 비치지 않으니, 10년…아니지. 5년 후가 기대되는군."
"감사합니다."
사이주 제레이스는 보리스의 당당한 태도가 마음에 들은 듯했다. 그러자 보리스는 그것을 보고 자신감이라도 얻었는지,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갔다.
"특사께서 허락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제 작은 재주를 보여드리고 싶습니다만."
"과하다."
아비의 딱딱한 목소리에 순간 몸을 굳혔지만 움츠러들었지만 뱉은 말을 주워담지는 않았다. 언짢은 기색을 보이는 대신 호기심을 보이는 사이주 제레이스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것이었다.
"흥미롭군. 재주를 보이겠다니, 어떻게 말인가?"
"특사께서 지목하시는 이와 가볍게 한 번 겨루어 보겠습니다."
사이주 제레이스가 흥미를 보이니 군터도 더는 부정적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대신 그는 아들에게 책망의 눈빛을 보냈지만, 보리스는 꿋꿋했다.
"좋아."
짝! 하고 박수를 친 사이주 제레이스가 그를 따라 온 호위 중 한 명을 쳐다보았다.
"앤릭."
"예."
"자네가 이 어린 무인의 상대를 해줘야겠다."
"예."
난데없이 철부지 꼬마의 장단에 맞춰주게 생겼음에도 앤릭이라 불린 호위무관은 전혀 불만스런 기색이 없었다. 명이 내렸으니 따른다. 오직 그것이었다. 흘러나오는 기세도 날카로운 것이 보통내기가 아닌 듯했다.
'그러니까 특사의 호위를 맡았겠지.'
보리스가 이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얼마만큼 할 수 있을지, 그것이 궁금했다.
기왕에 이렇게 나선 이상,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여줬으면 싶었다. 아니면 이 기회에 한 번 대차게 깨져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과하게 기세 등등한 아들은 아직까지 한 번도 좌절이라는 것을 맛본 적이 없었으니. 그런 치기는 일찍 꺾이면 꺾일수록 좋다. 주변에는 죄다 자신의 수하들 뿐이라 보리스를 상대로 진정 엄하게 대할 수 있는 이가 없었지만, 제국의 무관이라면 가능할 것이다.
"자리를 옮기지요."
가볍게 겨루어본다고 하지만 가검(假劍)이라도 들고 설치기에 연회장은 너무 협소했다. 가까운 곳에 있는 연무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움직이기 전에 하인들을 시켜 자리를 만들게 하니 잠시 후 그들이 연무장으로 향했을 때는 경기장 비슷하게 모양새가 갖춰져 있었다.
"하하. 재미있겠군. 어떨 것 같소?"
"제 아들놈이 지겠지요."
"으음. 너무 즉답이 아니오?"
"아들놈의 실력은 잘 압니다. 평범한 축에서는 쓸만한 수준이나, 그 이상을 벗어나면 어렵습니다."
"그래도 아들인데 가차없구려."
"헛된 기대를 하지 않을 뿐입니다."
냉정하게 봤을 때 보리스의 실력은 그의 수하들 사이에 두더라도 중간 수준은 된다. 하지만 출중하다 싶은 녀석들에 비하면 많이 떨어진다. 이제껏 보리스가 상대해봤던 녀석들 중에는 그 '출중한' 녀석들도 있었으나, 녀석들은 보리스를 상대하며 사정을 봐줬다.
진심으로 했지만, 전력으로 임하지는 않았다. 필승의 각오로 임한 녀석은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엄하게 한다 해도 자신의 아들이라는 것을 머리 한 켠에서 떨칠 수 없었으리라.
때문에 보리스는 실력에 비해 과도할 정도의 자신감에 차 있는 상태다. 그걸 깨주고 싶었지만 그의 수하들 중에 그렇게 모진 마음을 먹을 수 있는 녀석은 없었고, 군터 자신 역시 내키지 않았다. 아들을 상대로 엄한 척은 할 수 있어도, 진정 엄해지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럼, 잘 부탁 드리오."
"나야 말로."
두 사람이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대련이 시작됐다.
날을 죽인 검을 쥔 두 사람은 서로의 검권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거리를 유지하며 틈을 살폈다.
잠시 그러는가 싶더니, 보리스가 먼저 달려들었다.
"날카롭군!"
사이주 제레이스가 탄성을 질렀다. 그만큼 보리스의 움직임은 매서웠다. 빠르고 거친 공세에 앤릭도 살짝 당황했는지 연신 뒷걸음질을 치며 막아내기에 바빴다.
카각!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보리스의 움직임에 익숙해진 앤릭은 점차 반격을 시도하며 공세의 맥을 끊기 시작했다. 그에 자유분방하던 보리스의 움직임에 조금씩 제동이 걸렸다.
비로소 치열하게 맞붙기 시작한 두 사람. 군터는 차분하게 보리스를 상대하는 앤릭의 움직임을 눈 여겨 보았다. 그의 움직임은 이제껏 군터가 겪어보지 못했던 부류의 것이었다.
'단단하고 간결하다. 무리하지 않으며 군더더기가 없지만, 그렇기 때문에 격렬함 역시 없다.'
안정감이 있다고 해야 할까. 감탄이 나올 만큼 깔끔한 솜씨지만 전장에 어울리는 느낌은 아니다. 호위무관이라더니, 정말 딱 그런 느낌이었다.
'뚫리지 않는다는 개념이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으니 깨뜨리기가 쉽지 않다. 압도할 만하지도 않은데 무작정 힘으로 밀고 들어가다가는 도리어 낭패를 보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보리스는 정확히 그의 우려대로 행하고 있었다. 그다지 위협적인 것 같지도 않은데 자신의 공격이 번번이 무위로 돌아가니 열이 올랐는지, 더욱 기를 쓰고 몰아치고 있었다.
'지금.'
푹!
"으악!"
생각한 순간, 앤릭의 검이 보리스의 오른쪽 어깨를 찔렀다. 날을 죽인 검이었기에 살갗을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으나, 그럼에도 보리스는 어깨에서 피를 흘리며 뒤로 나가 떨어졌다.
앤릭은 뒤를 쫓지 않았다. 그는 다만 검을 갈무리 하며 승부가 끝났음을 알렸다.
"으…으윽!"
보리스가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손에 쥔 검은 그의 몸과 달리 따라 올라오지 못했다. 어깨에서는 가느다란 피가 흘러내려 옷을 적시고 있었다.
"끝났군."
"아들 놈의 완패입니다."
"그렇긴 하나, 재미있었소. 감탄했어. 앤릭 경도 제법 애를 먹었고 말이오."
뒷말은 예의상 한 말일 뿐이다. 앤릭이라는 호위무관이 애를 먹은 것처럼 보인 건 그의 무술이 공격보다는 방어에 근간을 뒀기 때문이다.
모르는 이가 보기에는 보리스가 시종일관 주도권을 잡고 있다가 불의의 일격 한 방으로 나가떨어진 것처럼 보일 테지만, 무술을 아는 이들의 눈에는 진실이 보인다. 그것을 알 텐데도 그리 말하는 것은 군터와, 망연한 얼굴로 축 늘어진 팔을 내려보는 어린 무인의 기를 세워주기 위함이리라.
군터는 그런 사이주 제레이스의 배려가 고마웠다.
"아들놈에게 한 마디 해줘야겠습니다."
"나무라지는 마시오."
"나무라려는 것이 아닙니다. 칭찬을 해주려고 합니다."
"흐음."
군터는 보리스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오자 보리스는 이를 악 물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고개 들어라."
"아버지……."
"약자가 강자에게 지는 것은 바람 앞에 풀이 눕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
"한 번도 바람을 맞아보지 못한 풀은 미풍에도 짓밟히는 법이지. 하지만 질긴 잡초는 폭풍을 만나도 흔들릴지언정 짓밟히지 않아."
"…저는."
"네가 범한 실수는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러니 아비는 너를 칭찬해주마."
"예……?"
"그 와중에도 검을 놓지 않았지 않느냐."
"아……."
검을 쥔 손이 꼼지락거렸다. 어깨를 찔리는 와중에도, 바닥을 구르는 와중에도 검을 놓지 않은 손에는 부드러운 살이 하나 없었다. 죄다 돌덩이 같은 굳은살뿐.
"기본은 되어 있다는 뜻이지. 이제 네가 할 일은 수없이 바람을 맞으며 더욱 더 질겨지는 것이다."
"…예."
고개가 들리고, 눈에는 불이 켜졌다. 군터는 그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피가 흐르는 어깨 쪽에 눈길을 주었다.
"상처를 치료해라. 네가 상대한 호위무관이 마지막에 검에서 힘을 뺐다. 깊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피가 흐르고 있으니."
"그 전에, 특사께 사죄를 먼저 올리겠습니다."
"음?"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보리스는 사이주 제레이스의 앞으로 갔다. 술 한 잔을 막 입으로 가져가던 사이주 제레이스가 의아하다는 듯 그의 앞으로 온 보리스를 보았다.
"상처부터 치료하는 게 좋지 않겠나?"
"마음만 앞서 나섰다가 부끄러운 모습만을 보여드렸으니, 특사께 사죄를 먼저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으응? 하, 하하하하핫!"
그야말로 대소였다. 몸이 흔들리니 마시려던 술도 덩달아 흔들리며 잔 밖으로 흘렀지만 그는 그런 것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하하. 무슨 말을 그리 하나. 지기는 했지만 좋은 구경을 했네. 정말이지 감탄했어. 내 이제껏 자네 나이에 자네와 같은 실력은 본 적이 없네. 10년. 아니, 5년 후가 정말 기대되는군."
바라보는 시선에는 호의가 가득하다. 그의 따스한 말에 보리스는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부지런히 정진하겠습니다."
"좋아. 좋아! 기분일세. 내게 청할 것이 없나? 미래가 기대되는 소년 무인에게 내 자그맣게 베풀 수 있다면 좋겠군."
"아……."
"뭐든 좋아. 내 지금 들고 있는 술이라도 달라면 기꺼이 내주겠네."
망설이는 보리스에게 사이주 제레이스는 어서 말해보라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