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5화
보리스는 곧바로 땅에 뻗어버리고 싶은 것을 꾹꾹 참으며 그의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힘든 근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서 곧바로 동생과 놀아주었더니 어지간해서는 피곤함을 모르는 그의 몸도 물 먹은 솜마냥 축축 쳐졌다. 육체적으로 피로한 게 아니라 정신적으로 완전히 바닥이 나버린 것이다.
'어렸을 때는 귀여웠는데.'
동생 실비아는 이제 나이를 조금 먹었다고 칭얼거리는 것이 늘었다. 무엇이든지 해도 불만, 안 해도 불만이다. 맞춰주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이제는 정말 한 번 놀아주고 나면 머리가 다 지끈거릴 지경이었다. 새삼 동생과 하루 종일 붙어 다니는 시녀들이 대단하게 느껴졌다.
'피해 다녀야 하나.'
차마 싫은 소리는 못하겠지만, 어떻게든 방법을 내지 않으면 점점 더 고달파질 것 같다는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끄응."
그렇게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데, 멀찍이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공자."
"……?"
익숙한 얼굴이었다. 한 번도 둘이서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은 없지만, 집을 들락거리는 것을 몇 번 봤고 인사도 나눈 사이였다.
비교적 최근에 아버지의 측근이 된 사람. 능력은 있다는 것 같지만, 추레한 외모에 음침한 분위기 때문에 거부감이 드는 자였다. 그래서 먼저 다가가 말을 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지금은 저쪽에서 먼저 아는 척을 해왔으니 받아줘야 하지 않겠나.
"야스메티 님."
"간만에 뵙습니다."
역시 꺼려지는 사람이다. 사람을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건 좋지 않지만, 이 자는 외모와 목소리. 분위기까지 3박자가 고루 갖춰져 백 중 아흔 아홉은 거부감을 일으킬 만했다.
그러나 이 자는 부친의 측근이다. 들리는 이야기들에 의하면 능력도 출중한 듯했다. 하긴, 그러니까 부친이 가까이에 두는 것일 터. 아무튼 이 자에 대한 감상이야 어떻든, 그걸 내색할 수는 없다.
그것을 상기한 보리스는 최대한 덤덤하게 대꾸했다.
"예. 그렇군요. 상당히 간만에 뵙는 것 같습니다."
"이거 죄송합니다. 피로하실 터인데 붙잡게 되어서."
"아닙니다. 어쩐 일로?"
지나가다 얼굴을 봤다고 인사나 하러 온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랬다면 저렇게 뚫어지게 쳐다볼 필요는 없었을 테니.
"아아. 공자께 청이 한 가지 있어서 말이지요."
"청이요? 제게 말입니까?"
스스로를 낮게 보지는 않지만, 자신이 이 남자를 위해 해줄 것이 있나 싶었다.
야스메티는 비록 공식적인 관직은 없지만 부친의 참모 같은 존재로서, 자세한 내용은 몰라도 막대한 자금을 들여 일을 하고 있다 들었다. 부친의 휘하에서 중요한 일을 맡은 것이다. 자신이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란 그에게 있어 사소한 것에 불과할 텐데, 이렇게 직접 찾아와서 부탁을 한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예."
"뜻밖이군요. 말씀해 보시지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든든하군요 공자님. 그리 말씀해주실 줄 믿고 있었습니다. 제가 부탁을 드리긴 하지만, 실은 이 일은 장주님을 위한 것이니 부디 애써주십시오."
"부담스럽군요. 하지만 말씀 드렸듯, 할 수 있는 것이라면 기꺼이 하겠습니다."
말은 부담이라 했지만 의욕이 차 올랐다. 자신이 부친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이(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보리스에겐 큰 흥분으로 다가왔다.
"그럼 잠시…이야기를 나눌 곳이 있겠습니까."
"길게 걸리는 일입니까? 보시다시피, 지금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혹시 모르는 일이지요. 적어도 저기 매달려 있는 새들은 듣지 않겠습니까?"
농담인가 싶어 그의 표정을 살폈으나, 야스메티는 멀찍이 지붕 위에 앉아 있는 몇 마리 새들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어이 이 자리에서 선 채로는 말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보리스는 그를 저택 안의 조용한 방으로 안내했다.
그렇게 조용히 자리에 앉자마자, 야스메티는 바로 입을 열어 용건을 꺼냈다.
"공자. 공자께서 열 넷이시지요?"
"곧 열 다섯이 됩니다."
"공자께서는 연배에 비해 성숙하십니다. 외적으로나 내적으로나 말이지요. 훌륭하십니다."
"…고맙습니다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인지."
"나이에 비해 성숙한 것은 좋지만, 하지만 이번 만큼은 공자의 나이에 맞게 한 번 움직여주셔야겠습니다."
"……?"
영문 모를 소리로 말문을 연 야스메티가 계속 말을 이어갈수록, 보리스의 표정은 점점 요상하게 변해갔다.
그리고 그의 말이 다 끝났을 때. 보리스는 다소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게 전부입니까?"
"예."
너무 자연스럽게, 너무나 단호하게 즉답을 해버리니 보리스는 말문이 막혔다. 지금 그가 한 말이 모두 진지한 이야기였다는 뜻이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장주님을 위한 일입니다. 다소 간에 어려움이 있으시겠지만…그럼에도 공자께서 잘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떠나는 그에게 엉거주춤 일어나 마중을 나간 후.
홀로 남은 보리스는 고심에 가득 찼다. 이야기를 듣기 전에 느꼈던 흥분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한편. 보리스가 표정을 구긴 채 방에 박혀있을 동안 저택을 나서려던 야스메티는 뜻밖의 인물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모페이브 공. 제게 무슨 용무라도?"
"공이라니, 과분합니다. 편히 부르시지요."
모페이브가 잔잔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야스메티는 호칭을 바꾸지 않았다.
"어찌 그러겠습니까. 어떤 의미에서는 장주님과 가장 가까우신 분이 아닙니까. 또한 저 역시 아무런 관직 없는 몸이니, 따지고 보면 저나 공이나 별 다를 것이 없지요."
"그러시다면……."
"그나저나, 저를 찾으신 용무가?"
"아. 다름이 아니라…여쭐 것이 있어서 말입니다. 얼핏 이야기는 들었습니다만, 어째서 공자님께 그런 일을 맡기시는지."
야스메티가 슬쩍 고개를 틀었다.
"이야기를 들으셨다고요? 장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까?"
"예."
"흐음."
"혹 말이 새어나갈 것을 우려하신다면, 그러실 필요 없다 말씀 드리겠습니다. 제가 다른 재주는 없어도 입을 열지 않는 재주 하나는 그래도 있는 편이니까요."
"그러시다면야. 그런데, 제가 공자님을 뵌 것은…하인들을 통해서 아셨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문제라도?"
"혹여 아랫것들을 통해 말이 돌지는 않겠지요?"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 저택에서 일하는 모든 이들을 가리고 가려 뽑았습니다. 특히 영주님 일가가 거주하시는 본관 쪽으로는 더 그렇지요."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야스메티 공은 사람을 잘 믿지 않으시는군요."
야스메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것이 화난 표정이 아님은 약간의 웃음기가 묻어나는 목소리가 들리고서야 알 수 있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사람을 잘 믿는 편입니다. 다만 한 가지. 믿을 수 있는 상황에서만 말입니다."
"어려운 말씀이군요."
"그저 사람을 생각하는 저 나름의 얄팍한 가치관일 뿐입니다. 음. 어째서 공자님께 그런 일을 맡겼느냐 물으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별 것 아닙니다. 그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지요."
"효과적이라?"
더 설명을 해달라는 듯한 눈빛에 야스메티는 고개를 끄덕였다.
"들으셨다면 아시겠지만, 장주님께서 코누다이안을 벗어나시려면 일단은 명분이 필요합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니 설명할 필요도 없고,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그 명분은 자연스러워야 함은 물론이요 될 수 있으면 최대한 가벼워야 합니다."
"가벼워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입니까?"
"정치적으로 이야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지요. 그런 구실 없이, 가볍게 떠날 수 있는 명분이어야 합니다. 이를 테면 제국 구경 같은 것도 좋지요. 견문도 넓힐 겸 해서 뒷산에 산보를 나갔다 오는 것처럼 모양이 나오면 그것이 최고입니다."
"어째서 그래야 합니까?"
"왜냐하면 지금껏 장주님께서 구축해오신, 남들에게 비치는 그분의 모습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장주님께서는 이제껏 명령이 내려오지 않는 한 움직이신 적이 없지요. 제가 알기로 단 한 번도 그러신 적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에 장주님께서 어떠한 이유로든 제국으로 가신다 하면 자연히 의심의 눈초리가 따라붙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다 못해 안 보이던 곳으로 새가 날아도 쳐다보게 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필요도 없지요."
그에 모페이브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는 표정은 덤이었다.
"그래서 명분이군요."
"그렇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장주님이 움직이실 수 있는 명분이 됩니다."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말이지요?"
모페이브의 짤막한 대꾸에 야스메티의 자그마한 눈이 벌어지고, 다시 한 번 표정이 일그러졌다.
"바로 알아차리시는군요. 맞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맞은편에 앉은 모페이브를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마주보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주 노골적으로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 강렬한 시선에 모페이브가 변명 아닌 변명을 해야 했다.
"장주님을 오래 모셨습니다. 항상 일관된 분이셨지요. 헌데 근래에 들어 전에 없던 모습을 보이시니, 그것이 야스메티 공의 덕분임을 알았습니다. 허면 앞으로도 이런 일이 없지 않을 것 같은데, 그렇다면 그때마다 지금과 같은 명분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옳습니다."
"오랫동안 한 분을 모시다 보니 눈치가 늘었을 뿐, 별로 대단한 생각을 한 것은 아닙니다. 과분한 시선을 거둬주시지요."
"아닙니다. 모페이브 공은 현명하신 분입니다. 적어도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가끔씩 차나 한 잔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어떠십니까? 술도 괜찮습니다만, 저택에 머무시는 분이니 술 냄새를 풍기는 것은 꺼리실 것 같으니……."
"말씀하신 이유대로 술은 사양하지요. 다만 차라면 좋습니다. 말벗이 생기면 좋지요."
두 사람은 한결 부드러워진 분위기 속에서 자잘한 이야기들을 나눴다. 그러다 서서히 해가 질 즈음이 되어서 다음을 기약하며 작별했다.
*
사이주 옌 제레이스가 군터의 집을 찾았다.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호위 둘만을 대동한, 최대한 간소한 행차였다.
"어서 오십시오."
"초대해 주어서 고맙소."
화려하게 차린 자리는 아니었다. 아무리 화려하게 준비한들 그의 눈에 차기도 힘들 뿐더러, 화려한 연회라면 이미 수도에서부터 시작해 영주관저에 이르기까지 질리도록 즐겼을 것이니 그보다 덜한 것으로 힘을 줘봐야 의미도 없다.
다만 화려하지는 않더라도 성의는 확실히 들여서 준비했다. 간소하나 가볍지는 않은 주안상이었다. 군터의 뜻이 십분 반영된 것이었고, 다행히 손님은 그럭저럭 만족한 듯싶었다.
"드시지요."
"그래요. 듭시다. 하하하."
자리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