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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54화 (354/1,064)

354화

야스메티의 말을 따르기로 했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였다. 폴사도의 사정이 전해져 오기 전에, 영주가 폴사도의 삼남과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몸을 빼야 했다. 그러지 못하고 시기를 놓친다면 자칫 의도가 읽힐 수가 있으니까 말이다.

"연회가 아직 진행되고 있습니다. 우선 장주님께서는 연회에 참석하시어 사이주 제레이스와 이야기를 나누십시오. 그는 장주님께 호감을 가지고 있으니, 그와 가까워지기는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알겠다."

사이주 제레이스. 정식으로는 사이주 옌(제국에서 사용되는, 후계가 아닌 직계를 뜻하는 중간이름 중 하나) 제레이스는 일전에 수도에서 있었던 무투회를 상당히 인상 깊게 봤는지 위글로우로 돌아오는 길에도 군터에게 몇 차례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이곤 했다. 야스메티의 말처럼 그가 이쪽에 호감을 가진 것은 분명하니, 연회 자리에 나가 적당히 말 몇 마디만 섞으면 사이는 저절로 가까워질 것이었다.

"내가 그와 가까워지기만 하면 다 해결이 되는 것이냐?"

"물론 그렇지는 않습니다. 거기서 더 꾀를 내야겠지요. 장주님께서 먼저 나서시는 것은 그림이 좋지 않습니다. 어떻게든 사이주 제레이스가 이야기를 꺼내게 만들어야 합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나?"

"예. 여기서는 아무래도…공자님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습니다."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

"보리스 말인가?"

"예."

눈을 크게 뜨고 되묻는 군터에게, 야스메티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며칠 동안이나 이어진 연회는 여전히 화려했다. 이는 영주가 얼마나 귀빈을 챙기는지가 여실히 드러나는 단면이었다. 정확하게는 제레이스 가문의 후계자도 아닌 일개 사내가 아니라, 그 뒤에 있는 7황자를 대하는 태도이겠지만.

"억지로 권하지 않았음에도 자네가 연회에 참석하다니. 이건 또 별 일이군."

"영주님께서 베푸시는 연회에 계속 불참하는 것은 경우가 아닌 것 같아……."

막시밀리언이 기꺼운 듯 크게 웃었다.

"잘 생각했네. 잘 왔어. 마음껏 즐기게."

그의 참석을 기뻐하는 이는 막시밀리언만이 아니었다. 사이주 옌 제레이스 또한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군터 경. 가는 날까지 못 뵐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만나게 되는군."

"연회에 얼굴 한 번 비췄을 뿐인데, 너무 반가이 맞아주시는군요."

"내가 웃음이 헤픈 사람은 아니오만. 아무에게나 이러지는 않소이다. 그만큼 경과 친해지고 싶은 마음이라 알아주시오."

제레이스라는 한 주를 넘어서 제국 북부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문가의 직계가 이렇게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후계와는 관련이 없는 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의 개방적인 태도는 그가 가진 군터에 대한 호감의 감정 외에도 그라는 사람 자체가 가진 호방함과, 사람 사귀기를 좋아하는 성품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이는 군터가 무관으로서 맡은 임무. 예를 들면 호위 같은 것 외에는 일체 정치적인 참여나 언행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속내를 숨기고 계산하기를 즐기는 이들과 다른 군터의 담백함이 그에게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사절단의 대표로서, 7황자의 특사로서 맡은 바 임무가 있는 그였기에 만약 군터가 영주의 옆에서 정치적인 행사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면 아무리 무인으로서 호감이 있다 해도 그는 군터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자리에서 일어나 군터의 옆자리로 와 앉았다.

"영주님과 이야기를 나누셔야 하지 않습니까?"

"영주님과는 이야기를 이미 충분하다 못해 넘치도록 나누었다오. 영주님께서 이곳에 있는 동안 아무쪼록 즐기라 말씀하셨으니 이 사람은 그리 할 생각이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어울려주시겠소?"

"그러시다면야."

7황자의 특사라는 엄청난 지위. 거기에 영주가 직접 청하고 대대적으로 연회까지 베풀 정도의 귀빈이었지만 막상 그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붙이는 이는 없었다. 그의 지위가 너무나 높기 때문에, 도리어 언감생심 말을 붙일 용기도 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군터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사이주 옌 제레이스와 술잔을 기울였다.

그런데 술 상대 겸 말상대를 한다고 하지만, 실상 군터가 하는 거라곤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짤막하게 대꾸하는 식으로 반응해주는 것뿐이었다. 술이 적당히 들어가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7황자의 특사는 상당히 수다스러웠다.

"솔직히 놀랐소이다. 이 사람이 직접 칼을 휘두르는 재주는 없지만, 그래도 빼어난 무인들의 솜씨를 수도 없이 직접 눈으로 보았었는데 경과 같은 솜씨를 지닌 이는 극히 드물었지. 그러니까 경의 무예는 제국에서도 드문 수준이라는 거요."

"그렇습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군터의 입장에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제국은 넓지요?"

"하하.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어지간한 제국의 명문 귀족조차도 제국이 얼마나 넓은지 알지를 못하지. 한 평생 한 주에서 태어나고 죽는 이들이 대다수요. 평생 국토의 끝을 볼 일이 없는 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소."

"땅이 넓으니 사람도 많고, 사람이 많으니 솜씨 좋은 무인들도 많겠습니다. 공께서 이 몸의 솜씨를 제국에서도 드물다 하셨지만, 바꿔 말하면 제국에는 저와 비슷한 이들이 드물긴 해도 있다는 것이 아닙니까."

"아하. 말이 그리 되는군. 음…틀린 말은 아니오. 맞아. 옳은 말이오."

"어떻습니까? 제국의 무인들은. 저는 한때 제국군이었지만, 북방 벽지에서 바람을 맞으며 지내다 보니 제국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합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야스메티의 말을 충실히 따르고 있는 군터였다. 관심이 가는 주제가 나오니 그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고 있지 않은가.

군터는 제국의 무인들에 대한 관심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다. 베이고르의 최고 무인이라는 칭호를 얻게 된 지금은 더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따지고 보면 베이고르에서 최고라 해봐야 제국으로 치면 수십 개 주 중 겨우 한 곳에서 최고라는 것과 같았다.

그렇기에 알고 싶었다. 제국의 기준으로 바꾸었을 때, 자신의 실력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수준에 있는 것인지를. 이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품는 의문과 호승심의 반영이었다.

"으흠. 제국의 무인들이라……. 위에서부터 이야기 하자면, 역시 위장(位將)들을 들 수 있겠지. 물론 그 위에 장군부가 있기는 하지만 실상 의미는 없소. 장군부에 속한 이들은 대부분 나이 지긋하거나 대대로 자리를 이어받는 가문 출신들이니까. 그러니 위장들이 군부의 실질적인 전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오. 특히 개중에는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능력으로 딛고 올라 온 자들이 더러 있는데, 그들이야말로 일선에서 전투를 수행하는 이들이지. 경이 상대했던 아그니스 체스퍼도 그런 이들 중 하나라 할 수 있소."

"흐음."

일찍이 아그니스 체스퍼 본인으로부터 들은 이야기와 별 다르지 않다.

"물론 이름이 크게 알려지지 않은 이들 중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지닌 무인들이 있겠지. 하지만 그런 이들까지 일일이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고, 제국의 이름난 무인이라 하면 위장들 중에 찾는 것이 보통일 것이오."

"그들 외에도 있지 않습니까. 가장 먼저 이름이 나와야 하는 이들을 어찌 언급하지 않으십니까."

"음?"

"어찌 모르는 척을 하십니까. 군주들 말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이주 옌 제레이스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웃는 것 같기도 하고, 굳어버린 것 같기도 하고,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오묘한 얼굴이었다.

"허어……."

그런 오묘한 표정 변화 끝에 나온 것은, 아마도 탄식이었다.

"경. 군주들은 언급할 이유가 없소."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그분들은 무인이 아니니까. 그분들은…그들은 사람이 아니오.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무인들을 이야기 하는데 거론할 이유가 없지."

그야말로 논외라는 것이다.

"그들이 그리 대단합니까?"

"대단하냐고? 하하하."

웃음이 웃음 같지가 않았다. 어처구니 없다는 듯 끌끌 거린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경. 말했듯이 그들은 사람이 아니오. 그들은 수백 년 전부터 승하하신 황제 폐하를 따라 수 없이 많은 전장을 누볐소. 수십 개의 나라가 그들의 손에 무너졌지. 작금의 제국을 일군 것은 그들의 창칼이었소. 그들의 위명은 수백 년 전부터 세상을 떨쳐 울렸지. 알고 있소? 제국에는 그들을 신으로 섬기는 교단들도 있소. 물론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것은 아니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신앙이 그저 자발적으로 일어난 것이란 거지. 이해하겠소? 우리가 가진 그 어떤 지식으로도 그들을 가늠할 수 없을 거요."

가볍게 한 번 던져봤을 뿐인데 돌아오는 반응이 예상 이상으로 격했다. 그만큼 군주라는 이들에 대한 그의 인식이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제국의 어떤 이들이 군주들을 신으로 섬긴다 했지만, 지금 그의 태도를 보면 그게 꼭 다른 이들의 이야기 같이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나 대단한 자들인가.'

예전, 제국에 몸 담고 있던 시절에 들었던 그들의 이야기는 온통 허무맹랑한 것들뿐이었다. 그래서 그런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별로 진지하게 믿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그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들을 해준 병졸들이나 싸구려 술집에서 시간을 죽이는 놈팡이들과 달리,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는 제국의 명문 귀족가의 자제였다. 어디서 어설프게 주워 들은, 과장에 과장을 거듭한 허튼소리를 할 만한 위인이 아닌 것이다.

'살아있는 신이라.'

생각해보면 예전, 단 한번뿐이지만 그 편린이나마 경험한 적이 있었다.

군주 쿠엘단이 남겨두었던 법보. 기후마저 뒤집어버리는 초월적인 권능. 그것을 떠올려 보면 군주라 하는 이들이 사람이 아니라는 말도 일부는 수긍이 간다.

하지만 그런 초월적인 이적을 부릴 줄 안다고 해서 바라보지도 못할 정도로 아득한 것은 또 아니다. 가까운 예로 타칸의 대족장 역시 마치 신과 같은 위용을 보였다고 하나 결국에는 패사하지 않았나.

"하하. 역시 내 안목이 틀리지 않았구려."

"예?"

"지금 그 눈. 호승심이 비치고 있소이다. 필시 군주들에 떠올리고 있겠지."

"……."

"제국에서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일이오. 그대가 제국인이 아니기 때문일까? 단지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그 도전적인 눈은 참으로 인상 깊구려."

뭔가 혼자서 생각하고 멋대로 결론을 내려버린 것 같지만, 아무래도 이쪽에 대한 호감이 더 커진 모양이었다. 웃음이 더 잦아지고, 목소리에 실린 친근감도 더 진해진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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