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화
즐거움에 취해있는 것은 하루 이틀로 족했다. 군터는 곧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가지고 온 것은 역시 야스메티였다.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은 보람이 있어, 고급 정보들을 물어왔다.
"커닐레이 백작의 건강이 좋지 않다 합니다."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 않나."
"심각한 상황인 것 같습니다.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고 합니다."
"우리로서는…좋은 일인 것 같군."
폴사도는 처음부터 코누다이안과 대립각을 세워왔다. 커닐레이 백작은 어떤 의미에서는 영주가 리에론 공작보다도 더 신경 쓰는 정적이었고. 그런 그가 죽는다면, 코누다이안의 입장에서는 나쁠 것이 없었다.
"그렇습니다. 코누다이안으로서는 호재이지요. 커닐레이 백작은 유독 야심이 큰 자였으니, 그 자가 숨을 거둔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좋은 일일 것입니다. 허나."
"허나?"
"아마 영주님께서는 조금 더 큰 것을 노리시지 않을까 싶습니다."
"더 큰 것? 무엇을 말하나."
"커닐레이 백작은 아들만 넷입니다. 그 중 하나는 어리고, 하나는 어리석지요. 허나 나머지 둘은 나름대로 머리를 쓸 줄 알며, 그런 만큼 야심 또한 큽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커닐레이 백작은 후계를 정하지 않았습니다. 장자가 후계자로 여겨지고는 있지만, 확실하게 굳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 해도, 결국 커닐레이 백작이 후계를 정할 것이 아닌가."
아무리 위독한 상황이라고 해도 죽기 전에 후계 정도는 정할 것이다. 그가 그리 하고 싶지 않다 해도, 밑의 사람들이 어떻게든 확답을 받아낼 테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는데, 야스메티는 고개를 저었다.
"그게 그리 간단히 마무리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째서인가?"
"이변이 없는 한 장남이 후계자의 지위를 가져가게 될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암암리에 후계자로 여겨져 왔으니 명분은 충분하지요. 하지만 삼남이 문제입니다.
장남과 삼남을 뒤에서 떠받치는 세력 면에서 보자면 장남은 크게 뒤집니다. 거기에 삼남의 뒤를 미는 세력이 워낙 거칠기에, 자칫하면 후계 다툼에 칼부림이 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까지 가겠는가. 폴사도가 도적들의 산채도 아니고, 동부의 손꼽히는 대영지네. 그런 식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을 것 같은데."
"이러한 위기를 자초한 것은 커닐레이 백작 본인입니다.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용병대장의 딸입니다.
말이 용병대지, 사실은 제국 시절부터 군벌로 행세하던 자더군요. 그는 은퇴한 무관인데, 구 바크렌 정부와 무슨 끈이 있었는지 많은 사병을 거느리고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겉으로는 용병 행세를 했으나, 때때로 지저분한 일도 한 모양이더군요. 커닐레이 백작은 일찍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 장인의 군사력을 등에 업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재건 전쟁 당시에 크게 활약하여 백작의 자리까지 올랐습니다.
그 장인이라는 자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아들이 뒤를 이어 폴사도에서 기사로 행세하고 있지요. 그 기반은 여전합니다."
"장남은?"
"그는 비세트 자작의 외손입니다."
"비세트 자작?"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이름이다. 하지만 흐릿하여 생각이 잘 나지 않았는데, 야스메티가 바로 설명을 이었다.
"리에론 공작의 막하에 있는 서부의 영주입니다. 일찍부터 리에론 가문의 가신이었고, 리에론 공작의 신임이 제법 두텁다 하더군요.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았으나, 실상 커닐레이 백작은 리에론 공작과의 끈을 붙든 셈입니다."
"그렇다면…리에론 공작이 폴사도의 후계 다툼에 끼어들 수도 있는 건가?"
"가능하겠지요. 삼남 측에서 빌미를 준다면 당연히 개입할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개입하려 할 것입니다."
"음?"
"리에론 공작의 입장에서는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커닐레이 백작은 리에론 공작과의 끈을 붙들고는 있었으나, 나름대로 그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세력을 일구고 지켜내 왔습니다. 리에론 공작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있었겠지요. 이번에 커닐레이 백작이 죽는다면, 비세트 자작을 이용해서 폴사도의 내정에 관여하려 할 것입니다.
모렌스 자작이 서부로 이동하며 잃어버린 동부에서의 영향력을 되찾으려 하겠지요."
"그건 우리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군."
"바로 그렇습니다. 영주님께서도 그 점을 염두에 두고 계시겠지요. 하여 저는 영주님께서 이번 폴사도의 후계 문제에 적극 개입하시지 않을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폴사도의 후계 문제에 개입을 한다……."
결코 간단하지 않은 이야기다. 잘은 모르지만, 신중해야 하는 문제라는 것만은 알 것 같았다. 다른 영지의 일에, 그것도 후계 문제 같은 민감한 일에 발을 들이는 일은 특히 주의해야 할 것이다. 자칫하면 영지 간 군사적 충돌로까지 이어질 수 있으니까.
"출전하게 될지도 모르겠군."
명분이 장남에게 있다면 삼남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무력 동원 한 가지 뿐이다. 그러나 그리 되면 비세트 자작. 아니, 리에론 공작 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니…아마 이쪽에서도 움직이게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리 될지도 모르지요. 십중팔구, 아마도 그리 될 확률이 높습니다. 그렇기 때문에…장주님께서는 당분간 자리를 피해 계셔야 합니다."
"음?"
잘 나가다가 뜬금 없는 소리가 나왔다. 의아하여 야스메티를 쳐다보니, 그는 진지하다 못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장주님. 이것은 코누다이안으로서 취해야 하는 필연적인 행동이나, 몹시 지저분한 일입니다. 잘 풀려도 문제고, 잘 풀리지 않는다면 더더욱 문제입니다.
일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폴사도에서 자칫 큰 곤욕을 치르게 될 지도 모르고, 잘 풀리는 경우에도…오명을 피하지 못할 것입니다. 말씀 드렸듯, 명분은 장남에게 있습니다.
남의 후계 문제에 발을 디디고, 폴사도 영지를 통째로 집어 삼키려 모략을 꾸몄다고 욕을 먹게 될 겁니다. 사람들이 그리 말할 것이고, 리에론 공작 측에서도 온갖 이야기를 다 흘리겠지요. 장주님께서는 절대로 폴사도에 가셔서는 안 됩니다."
"……."
야스메티가 워낙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니 듣고 있는 군터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그는 야스메티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실감하지는 못했으나, 어느 정도 이해는 했다. 요는 위험을 피하고, 크게 욕 먹을 일을 피하라는 뜻이다.
"허나, 영주님께서 명을 내리신다면 나는 피할 수 없다. 아니, 피하지 않을 것이다."
명령이 내려왔는데 그걸 거부한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바로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장주님께서는 미리 코누다이안을 떠나 계셔야 합니다. 마침 7황자의 사절단이 아직 영지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사이주 옌 제레이스가 이끄는 7황자의 사절단은 야스메티의 말처럼 현재 코누다이안에 머물고 있었다. 본래는 곧바로 돌아가려던 것을 막시밀리언이 붙들고 연회를 베풀고 있었다.
"연회도 조만간 끝이 나겠지요. 그리 되면 그들은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인데, 분명 영주님께서는 그들을 그냥 보내지는 않으실 겁니다. 선물도 잔뜩 들려 보낼 것이고, 사람도 붙이겠지요."
"거기에 따라붙으란 말인가?"
그러려고 한 것은 아닌데, 나가는 말이 절로 뚱해졌다. 야스메티는 분명 그를 생각해서 성의껏 조언을 해주는 것이겠지만, 군터의 입장에서는 솔직히 별로 내키지 않았다.
오명을 쓰지 말라고 하지만, 쓰면 또 어떤가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 것보다는 어떤 이유로든 도망치듯 몸을 뺀다는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장주님."
그런 그의 심기를 읽었던 것일까. 야스메티가 나직이 그를 불렀다.
"장주님께서는 남들이 꿈꾸는 모든 것을 가지셨습니다. 지위, 권세, 재물, 거기에 개인적으로는 베이고르 최고 무인이라는 명예까지 지니고 계시지요."
"……."
"하지만 장주님. 장주님께서 더 높이 올라가시려면 그 이상이 필요합니다. 송구한 말씀이오나 세상 사람들이 그 어떤 말로 장주님을 치켜세운다 한들, 결국 장주님께서는 코누디스 자작님께서 지닌 칼 한 자루에 불과합니다."
맞는 말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헌데 어째서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일까. 군터는 입을 꾹 다물고 이어지는 야스메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칼에는 두 종류가 있지요. 사용하는 칼과 사용하지 않는 칼. 둘 중 더 오래가는 칼이 어느 쪽일 것 같으십니까?"
"글쎄."
"사용하지 않는 칼입니다. 벨 일이 없기에 날이 상할 일이 없고, 때문에 오래 가지요. 벽이나 장식장에 걸린 그런 칼들 말입니다. 보통 그런 곳에 걸리는 칼들은 대부분 귀한 것들이지요. 허나 장주님. 귀하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경우가 있으나,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귀한 경우도 있습니다."
"이해하기 어렵군.
"장주님은 보도(寶刀)이십니다. 그렇기에 영주님께서도 귀하게 여겨주고 계신 겁니다. 하지만 제 아무리 날이 잘 선 보도라 해도, 숱하게 살을 베고 피를 묻히다 보면 언젠가는 날이 상하기 마련입니다. 그때가 되어서도 과연 귀하게 여김을 받으실 수 있을까요?"
"어쩐지…나와 영주님을 이간질 하는 것 같군."
"장주님께서는 주종의 사이에 헛된 기대를 가지신 분이 아닌 줄로 압니다. 소인은 그리 생각했기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뿐입니다."
헛된 기대라. 야스메티의 말처럼, 그런 것 따위는 오래 전에 버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끄집어내니 거북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한편으로는 그렇게 거북함을 느끼면서도 내심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부분이 있었다. 조금 전에도 그랬지만, 야스메티의 말은 곱씹어 보면 틀린 구석이 없었다.
"장주님. 피할 수 있는 바람은 피함이 옳습니다. 덧붙여 말씀 드리자면, 장주님께서 안 계신다면 영주님께서는 과연 누구를 폴사도로 보내시겠습니까?"
폴사도로 아무나 보낼 수는 없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지위가 있는 자를 보내야 그쪽에서도 만족할 테니까.
영주를 제외하고, 코누다이안의 최고 권력자는 셋을 들 수 있다. 세 기사들. 그리고 거기서 군터가 빠진다면 남는 것은 둘. 하지만 그 중 하나인 위벨은 군사와는 관련이 없는 사람이니 남는 것은.
"…미트라스로군."
"어려움을 피한다는 것이 내키지 않으시면, 미트라스에게 한 방 먹여준다고 생각하십시오."
"어린아이 달래듯 하지 말게.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허면…소인의 말처럼?"
군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야스메티는 만족과 안도가 반반씩 섞인 얼굴로 물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