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2화
"초원에서 무슨 소식이 들려왔기에?"
"경도 알다시피, 아국에 병합되지 않은 타칸 연합의 무리들이 초원으로 빠져나갔지 않소?"
타칸 연합이 통째로 베이고르에 흡수가 되지는 않았다. 순순히 복속한 이들도 있었지만 초원으로 도망쳐 간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베이고르는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런 그들의 뒤를 쫓아초원으로 진군하기에는 여력이 없었다.
새롭게 얻은 서부 영토를 아직 안정화하지도 못했을 뿐더러, 전쟁을 위해 쥐어짤 대로 쥐어 짠 동부 역시 사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왕명으로 또 다른 전쟁을 선포한다면 영주들은 물론이고, 백성들의 원성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을 것이 자명했기에 왕도 북쪽의 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고 있는 상황이었다.
"근래에 자주 모습이 보인다고 하더군."
"약탈자들이 따뜻한 땅을 찾아 움직이는 것은 특별한 일이라 할 수 없지."
"약탈자들이 약탈은 하지 않으니까 문제인 거요."
"음?"
"정확히는, 하긴 하는데…어째 적극적이지 않단 말이오. 어째 눈가림인 것 같단 말이지."
"놈들이…정찰이라도 하는 것 같은가?"
"내 느낌일 뿐이오. 영주님께도 아뢰었지만, 과민한 반응이라 하시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시더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잠깐 생각해야 했다. 진지한 얼굴을 한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군터는 그에게 동조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초원으로 쫓겨간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이들이 다시금 군사적인 행동을 보인다는 것은 별로 설득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렇게 추측하는 이유라는 것도 단순히 느낌일 뿐이라지 않은가.
"솔직히, 내 생각도 그대의 영주님과 별 다르지 않소."
"이해하오. 내가 과민한 것일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몸 담고 있는 곳은 초원과 거의 맞닿아 있소. 잔바람이 불어도 폭풍을 염려해야 하지. 그래야 열에 하나라도 일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지 않겠소? 나 같은 사람이라도 과하게 걱정을 하지 않는다면 누가 이런 걱정을 하겠소?"
발렌디아르는 뛰어난 무인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군인이었다. 군터는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즐거웠다. 술이 다 떨어지고, 상 위의 음식도 다 차게 식었을 무렵. 헤어지기 전에 그들은 다음 번에 다시 한 번 만날 것을 약속했다.
"아직 확실하지는 않지만, 이런 무투회가 또 열린다고 하오. 몇 년 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그때 또 한 번 봅시다."
"그러지. 그때까지 무탈하길."
"하하. 경이야말로."
마음이 맞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항상 즐거운 일이다. 군터는 발렌디아르 이후에는 다른 방문객을 받지 않았다.
그렇게 보름 여가 지난 후.
군터는 막시밀리언을 따라 마침내 귀로에 올랐다.
*
코누다이안에 들어섰을 때부터 마음이 편해졌다. 그런 감정은 위글로우의 성문을 지나 가족들과 재회하고서 정점을 찍었다. 군터는 환한 웃음을 짓는 벨리사와 두 아들딸을 하나씩 가볍게 안았다. 거칠하고 냄새 나는 갑옷이 가족들에게 닿는 것이 꺼려졌기 때문이다.
"들었어요 아버지! 무투회에서 우승하셨다는 거요!"
벨리사와 실비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보리스가 가장 들떠 있었다. 그가 우승했다는 소식을 일찍부터 전해 듣고는 줄곧 이런 상태였던 모양이다.
"어떠셨어요? 무투회 이야기 좀 들려주세요!"
평소에는 그래도 나이에 비해 점잖은 모습을 보이던 녀석이 이렇게까지 방방 뛰는 걸 보면 정말 어지간히도 신이 난 모양이었다. 군터는 씻고 나서 들려주겠다고 약속하고 나서야 냄새 나는 몸에 들러붙는 아들을 떼어낼 수 있었다.
"이해하세요. 그만큼 아버지가 자랑스러운 거니까."
벨리사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너무 유난스러운 것 같은데."
"난리도 아니었어요. 보리스 뿐만이 아니에요. 이쪽의 무관들은 대부분 비슷할 걸요. 모두 당신이 오기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러고 보니 먼저 만났던 살라스와 할렌 등도 얼굴이 제법 상기되어 있었던가. 참 실 없는 녀석들이다.
'그게 뭐 그리 대수라고.'
낯이 간지러워서라도 군터는 그렇게 생각을 ?지만, 실은 대수가 맞았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왕이 직접 열고, 왕국의 모든 영주가 참가자를 낸 무투회에서 우승을 했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베이고르 최고의 무인이라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나라의 최고라는 것. 군에 몸담고 무를 숭상하는 이들에게 그 이상의 영광이 어디 있겠는가. 비록 그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같은 영지에 몸 담았다는 동질감만으로도 충분히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살라스와 할렌처럼 그의 휘하에 있는 이들은 특히 그런 감정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강적이라고 할 만한 자는 둘이었지."
몸을 씻고 나온 군터는 가족들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실비아는 오랜만에 아버지를 봐서인지 마냥 웃었고, 보리스는 말할 것도 없이 신이 났다. 벨리사는 그런 아이들을 그저 웃으며 바라보았다.
"누구였나요?"
"발렌디아르와 그림왈드라는 자들이었다."
군터는 그들과의 대결을 담담히 풀어놓았다. 그 중 한 명은 직접 죽이기까지 했으나, 어차피 보리스나 실비아나 그의 자식들인지라 죽음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다.
직접 보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겠지만, 적어도 듣는 것은 자연스러웠다. 이런 것에 대해 벨리사는 우려를 드러냈었지만, 군터는 이것만은 꿋꿋이 고집했다.
애당초, 죽을 때까지 피를 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교육(?)에 대한 결과로, 아버지가 둘 중 한 명을 죽였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두 아이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보리스는 더 눈을 빛내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그렇게까지 칭찬하시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발렌디아르 경이라는 분. 저도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어요."
"안 될 것 없지. 언제고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러고 보니 보리스 너는 수도를 본 적이 없구나. 아니,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겠지?"
"예. 어렸을 적에 잠시 있었다고 하셨지만, 그때는 너무 어렸을 때니까요."
"음."
정신 없던 시기였다. 갓난 아이였던 보리스를 그곳(당시의 제국령 살마드)에서 처음 봤었다. 할렌이 벨리사와 보리스를 호위하여 왔었지.
그때의 그 갓난 아이가 어느새 이렇게나 커버렸는가. 새삼 세월의 흐름이 느껴졌다.
"네 나이가 올해 열 넷이지."
"예. 조금 있으면 열 다섯이지요."
조금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긴 시간이 남아 있다. 그런데도 눈을 빛내면서 저런 말을 하는 건, 지금 그의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흐르고 있는지를 짐작한다는 뜻이다. 또한 그 생각의 결론 중 하나를 간절히 바란다는 뜻이기도 하겠고.
"……."
군터가 말 없이 식사를 이어가자, 잠시 후 보리스는 슬쩍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닙니다."
"보리스. 식사 자리다."
벨리사가 아들을 제지하고 나섰다. 그러나 군터는 손을 들어 보리스의 말이 계속 이어지게 했다.
"아니. 괜찮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눈치 보지 말고 속 시원히 해라."
무슨 말이 나올지는 이미 이 자리에 있는 모든…아니, 실비아를 제외한 모두가 알고 있다. 보리스는 못마땅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어머니를 한 번 흘깃 보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래도 곧바로 속내를 털어놓았다.
"임관하고 싶습니다."
"아직 이르다. 넌 열넷이 어린 나이가 아니라 하지만, 관직에 나서기에 열넷은 일러도 한참 이른 나이야."
"제 솜씨는 할렌님도 인정하셨습니다."
"관가(官街)의 일은 무술 솜씨만으로 다 해결이 될 만큼 녹록하지 않다."
처음인 것 같았다. 군터의 기억에, 이들 모자가 이렇게 진지하게 서로 언성을 높인 적은 없었다. 어쩌면 그가 보지 않는 곳에서 사소한 다툼이 있었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가 보는 앞에서 이런 적은 처음이었다. 그만큼 서로 물러설 수 없다는 뜻이겠지.
'관직이라.'
솔직한 생각으로는 아직은 이르지 않나 싶었다. 벨리사의 말처럼 관가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그냥 말 그대로 아직 어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보리스가 아무리 자기 실력이 어쩌네 저쩌네 해도, 아비인 그의 눈에는 아직 모든 면에서 덜 여문 아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껏 부모 앞에서 반항기 한 번 드러낸 적 없었던 보리스다. 그랬던 녀석이 이렇게 결연하게 목소리를 낼 정도면, 그 의지가 단단히 섰다는 뜻이다. 나름대로는 충분히 숙고도 했을 터인데, 그렇게 내세운 아들의 뜻을 가볍게 꺾고 싶지는 않았다.
"좋다. 네 뜻이 정 그렇다면…기회를 주마."
"감사합니다!"
"당신……."
"똑바로 듣거라. 기회를 주겠다 했을 뿐이다. 넌 내 아들이지만, 내 아들이라는 것을 빼면 특별할 것이 하나 없는 열 네 살 애송이에 불과하다. 그런 너에게 내가 그럴듯한 자리를 내주는 것은 어렵지 않지만, 난 그리하고 싶지 않다. 네가 있을 자리는 네가 네 능력으로 마련해라."
"…그리 하겠습니다."
각오를 다진 얼굴이다. 앳된 얼굴에 제법 사내다운 기세가 흐른다. 군터는 고기를 먹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걸렸다.
*
"옛? 공자님을 보졸(步卒)로……? 괜찮겠습니까?"
"안 괜찮을 것은 또 무엇이냐. 특별대우 할 것 없다. 다른 병졸들과 똑같이 대해라. "
할렌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그…래도 알 만한 녀석들은 다 알 겁니다. 특히나 일정 지위 이상의 장교들은 공자님의 얼굴까지 알 텐데, 괜히 군기만 흐려지지 않겠습니까? 특별대우를 원치 않으신다면 차라리 작은 자리라도 하나 내어주시는 것이 어떨지."
"군기가 흐려지는 것을 막는 게 네 녀석의 책임 아니더냐. 너부터 녀석을 다르지 않게 대한다면 그 밑의 녀석들도 절로 따르겠지."
"그렇기는 하겠습니다마는. 아아 이거 참……."
할렌은 한동안 끙끙거렸지만 결국에는 명에 따랐다. 개운치 않은 표정이야 여전했지만, 그래도 군터는 할렌이 시킨 대로 잘 따를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기쁜 이야기를 나누려 왔는데, 장주님께서는 보자마자 어려운 짐을 내리시는군요."
"내 아들이 짐이란 소리냐?"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만. 으으!"
답답함이 머리 끝까지 찬 얼굴이다. 군터는 물론, 자리한 모든 이들이 큭큭 대며 웃었다.
"그나저나 경하 드립니다. 저희 모두 믿고는 있었습니다만, 막상 소식이 들려오니 어찌나 기쁘던지요."
"맞습니다."
"역시 장주님이십니다. 명실상부 베이고르 최고의 무인이 되셨습니다."
"허명일 뿐이다."
"허명이라니요. 국왕 전하께서 직접 명검까지 하사하셨다지요?"
그 말이 나오자 다들 눈을 빛냈다. 군터는 그 바람을 거부하지 않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풀어 탁자 위에 올렸다.
"오오! 이것이……."
"과연 척 보기에도 예사롭지 않아 보입니다."
검집에서 뽑지도 않았는데 대체 뭐가 예사롭지 않다는 것인지.
호들갑이란 호들갑은 다 떠는 부하들 속에서 군터는 헛웃음만 지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고, 홀가분했다. 그들의 떠들썩함이, 그가 무언가 이뤄냈음을 확인시켜주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