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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51화 (351/1,064)

351화

"또 다시 상대를 죽였군."

"훌륭하지만, 잔인한 솜씨요."

술렁이는 목소리들이 들렸다. 심지어는 몇몇에 불과하지만 탄식을 하는 이도 있었다. 우승자를 축하하는 분위기만은 아니었다. 그에 막시밀리언은 소리 없이 코웃음 쳤다.

확실히, 잔인하기는 했다. 필요 이상으로 과하게 손을 쓴 것 같은 느낌은 그 역시 받았다.

하지만 그게 뭐가 어쨌단 말인가? 애당초 이 무투회의 참가자들은 몸이 상하는 건 물론, 목숨까지도 담보로 잡고 참가한 게 아니었나. 막말로, 패한 상대를 살려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저 비정함. 섬기는 주인을 닮은 모양이지."

거구의 사내가 비아냥대는 투로 중얼거렸다. 중얼거린다고 해도 주변에 있는 이들은 다 들을 정도의 목소리였다.

"……."

막시밀리언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마침 사내 역시 그를 보고 있었다.

거버렉 후작.

거물이다. 리에론 진영의 2인자로, 전형적인 무인이며 괄괄한 성미가 유명하다.

"이 무투회가 샌님들의 놀이판은 아니지 않습니까? 무용담을 자랑하는 것이 취미이시라는 거버렉 후작께서 그런 말씀을 하시니 당황스럽습니다 그려."

"말장난 치는 재주는 여전하시군."

"말장난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아시겠지만 라르바시온 경은 대단했습니다. 상처를 입고 피를 보아도 물러서지 않는, 저런 용맹함은 전장에서도 쉽게 볼 수 없지요. 제 수하가 그만큼 다급했다는 것이니, 다들 너무 잔혹하다 책망하지만은 말아주십시오."

"흥! 필요했는지 안 했는지 정도는 분간할 수 있네. 코누디스 자작의 눈에는 그리 보였는지 몰라도, 내 눈엔 다르게 보이던데?"

"하늘을 보아도 누군가는 구름을 볼 테고, 누군가는 날아가는 새들을 보겠지요."

"뭐라? 그게 무슨 말인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뜻이지요."

"뭐라!"

거버렉 후작이 벌떡 일어났다. 칼을 쥔 세월이 수십 년이라 그런지 그가 발하는 기세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바오룸을 비롯해 뒤편에서 호위를 서던 무관들이 앞으로 나섰다.

"거버렉 후작. 적당히 하시게. 여기가 어딘 줄 알고 그리 언성을 높이시는 게요?"

더 거칠어지려는 분위기를 가라앉힌 것은 칸디시아렌 공작이었다. 그가 담담히 목소리를 내자 거버렉 후작조차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목에 핏대를 누그러뜨린 그가 슬쩍 리에론 공작을 쳐다보았지만 별달리 돌아오는 반응은 없었다.

"크흠!"

그는 왕이 앉은 상석으로 몸을 돌려 몸을 낮췄다.

"전하. 소신이 감정에 치우쳐 실수를 하였습니다. 부디 너그러이 용서해 주십시오."

왕이 껄껄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거버렉 후작의 괄괄한 성미야 내 익히 알지. 허나 공의 나이도 있는데, 언제까지 그리 청년처럼 굴 수는 없는 노릇 아니오?"

"…송구하옵니다."

왕에게 질타 아닌 질타를 당하는 거버렉 후작을 보며 막시밀리언은 흐릿하게 조소했다. 그는 손짓으로 호위들을 물리고 다시 경기장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커흠!"

"어흠!"

쏟아지는 시선이 곱지는 않다. 그러나 곧 왕이 몸을 일으켜 우승자를 치하하니 영주들은 적어도 이 자리에서는 다른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다만 거버렉 후작을 위시한 리에론 공작의 일파들이 따가운 시선을 계속해서 보내왔으나, 막시밀리언은 그 모든 적의를 가벼운 미소로 받아넘겼다.

*

"훌륭한 솜씨였다."

군터는 곧바로 국왕의 앞으로 불려가 치하를 받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기 전. 그는 왕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사실 경기장에 있을 때도 슬쩍 올려다 볼 수 있었기에 새로울 것은 없었지만, 주름진 얼굴을 가까이서 보는 것은 느낌이 달랐다.

어쨌거나 이 나무토막 같은 사내는 이 나라를 다스리는 주인이었으니까. 이 나라의 모든 이들이 이 남자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다.

"그대와 같은 용사들이 이 나라를 받치고 있으니, 참으로 듬직하군."

왕은 명검 한 자루와 눈 호랑이 가죽 다섯 필을 하사했다. 가죽도 가죽이지만, 명검이 특히 군터의 마음에 들었다. 기존에 그가 가지고 있던 검 또한 명검이라 할 만한 것이었는데, 왕이 내려준 검은 그보다도 더 훌륭했다. 겉보기에만 멋진 장식용이 아니라 실전용으로 제작된 것이어서 더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무투회가 끝나고, 군터는 부상을 추스르면서 간간이 막시밀리언이 여는 연회에서 얼굴을 비쳤다. 동부 연합의 영주들은 물론이고, 이름도 모르는 이들까지 다 한 마디씩 웃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실상, 그들이 축하하는 것은 그가 아니라 막시밀리언임을 군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이들을 상대하는 것은 이제 익숙했다. 머릿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형식적인 말로 대꾸하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요 며칠 사이에 군터의 관심은 그런 것보다 무투회의 마지막 상대였던 라르바시온에게 가 있었다. 정확히는 그가 죽던 순간에 그의 몸을 빠져 나왔던 희미한 무언가.

'술법이었겠지.'

그 술법의 영향으로 그런 기이한 움직임을 보였던 것이리라. 하지만 이런 빈약한 추측이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였다.

간단히 생각해보자면, 어떻게든 승리하고 싶었던 모자란 자가 술법의 힘을 빌려 무리를 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붙들고 머리를 쓸 이유도 없다. 하지만.

'익숙한 느낌이었다.'

흩어지는 옅은 푸른 연기에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들추는 것 같은, 묘한 익숙함이 있었다. 그런데 그 영문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어째서였을까 생각을 거듭했지만, 대다수의 고민이 그러하듯 붙잡고 있어도 떠오르는 것은 없었다.

*

며칠이 지나고, 높으신 분들의 자리에 얼굴을 비추러 다니는 일이 조금 뜸해졌다. 그제야 군터는 자유를 즐길 수 있었다. 어차피 수도에 머무는 동안 영주의 호위는 그의 소관이 아니었다. 여기저기 불려가는 며칠 동안 상처도 대충 아물었기에 몸도 근질거렸다.

그러나 모처럼의 자유라고 해도, 마땅히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위글로우에 있을 때처럼 말을 몰고 도시 밖을 달릴 수도 없었고,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도 없었다.

자칫 모처럼의 자유가 지루함으로 변질되려던 차에, 다행스럽게도 그를 찾아온 이들이 있었다. 이번 무투회에 참여하거나, 참여하지 않았지만 수도로 올라왔던 각지의 무관들이었다.

군터와 일면식이 있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이 더 많았는데, 그럼에도 그들은 직접 찾아와 교류를 청했다. 그들 중에는 무투회에서 군터와 직접 겨루기도 했던 기사, 발렌디아르도 있었다.

"이렇게 먼저 찾아올 줄은 몰랐군."

"지금이 아니면 언제 또 기회가 되겠소. 나나 경이나 각자 영지로 돌아가고 나면 기약이 없어지는데."

"그도 그렇군."

발렌디아르가 몸 담고 있는 챈버 영지는 왕국의 북부에 위치해 있었다. 정말 마음 먹고 일정을 잡지 않는 한, 가볍게 시간을 내어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다. 이번 같은 경우가 아니면 영지의 기사 씩이나 되는 그들이 사사로이 교류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찾는 이들이 많아 바쁘실 터인데, 시간을 내주어 고맙소이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자들이 만나자 하니 당황스러울 뿐이오."

무투회의 우승자라는 명예는 높으신 분들이 보기에는 그저 칼 좀 쓰는 기사 하나 정도일 뿐이지만, 그 밑의 무인들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들에게 있어 일신의 강함이란 단지 눈요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과 같은 부류는 그것에 직접적인 동경을 가지기 마련이다. 지금 수도에 있는 무인들 중 군터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고, 그에게 막연한 동경을 품지 않은 자 또한 드물었다.

거기에 본격적으로 유명세를 타면서, 그의 과 전력까지 덩달아 입 소문을 타고 있었다. 아그니스 체스퍼를 참살한 것이며, 자세한 것까지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대전사 포라칸을 상대하였다는 것까지.

작게 시작된 이야기는 점점 더 살이 붙어갔고, 덕분에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무명(武名)은 일개 기사의 수준을 확실히 뛰어넘어 더 크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정작 당사자는 집구석에 박혀 있어 그것을 완전히 실감하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군터는 일면식도 없거나, 있어도 따로 이야기를 나눌 정도의 친분은 없는 이들이 만나고 싶다 부탁을 해대는 것에 조금 질린 상태였다. 그러던 차에 발렌디아르의 방문은 반가운 것이었다. 그와는 직접 겨뤄봤을 뿐더러, 그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으니 교분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그래서일까. 무투회에서 마주치기 전까지는 서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는데도 막상 적당히 술자리를 차리고 마주 앉으니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술술 흘러나왔다. 처음에는 서로의 실력을 칭찬하는 말이 주를 이루다가, 술이 조금 들어가고부터는 각자의 인생사에 대한 것들이 조금씩 튀어나왔다.

"자그마한 마을에서 태어났소. 아버지께서 마름의 호위로 계셨는데, 어렸을 적부터 칼로 밥벌이를 해야 한다고 하시며 무술을 가르쳐 주셨지. 난 내가 커서 아버지의 일을 이어받을 줄로만 알았소. 그러니까, 전쟁이 터지기 전까지는 말이오."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제국의 치세가 흔들리자 그가 머물던 마을은 혼란에 빠졌다. 제국에 기대야 하는지, 새롭게 깃발을 들고 나타난 베이고르에 기대야 하는지,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그들은 결정을 내렸다.

"제국의 수탈이 오죽 심했소. 사실 안전만 보장이 된다면 제국에 머리를 조아리고픈 이는 아무도 없었을 거요."

사실 이건 흔한 이야기였다. 그들과 같은 이유로 숱한 이들이 베이고르에 몸을 담았고, 그들을 흡수한 베이고르는 기어이 제국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칼 쓰는 재주가 있었기에 어쩌다 보니 마을의 우두머리가 되었지. 지금의 영주님을 만나 그분께 충성을 바치기로 하고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올랐소."

스스로 이야기하듯, 진부한 이야기였지만 군터는 나름 재미있게 들었다. 그것은 그의 사연이 발렌디아르를 비롯한 대다수의 이들과는 다르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듣는 것도 사실은 처음이었고.

군터가 그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듯, 발렌디아르 역시 군터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었다. 그는 군터의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몇 번이나 탄성을 흘렸다.

"실로 파란만장하군. 나와는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로."

"과정은 달랐으나 결과는 비슷하지. 그대와 나, 모두 여기에 있으니."

"뭐, 그도 그렇군."

과거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현재로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 현재의 이야기라는 것은 사실 별달리 새로울 게 없어, 과거를 이야기할 때보다 흥미가 덜했다.

"그나저나 경은 알고 있소?"

"뭘 말이오."

"요 근래에 북방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소이다. 한 달에 몇 번씩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들려온다오."

"북방이라 함은?"

"어디긴 어디겠소. 초원이지."

"초원……."

재미없는 이야기들이 지나는 와중에, 한 가지 흥미로운 주제가 나왔다.

하지만 그 흥미는 사뭇 심각하게 변한 발렌디아르의 표정 때문이 아니었다. 간만에 들어보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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