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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50화 (350/1,064)

350화

가슴을 가로지른 부상은 별 것 아니었다. 물론 살이 제법 깊게 갈라지기는 했지만, 제대로 한 방 먹은 것치고는 그리 크게 다친 편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뼈가 다치지 않았으니까.

심각하다고 한다면 어깨 쪽이 더 문제였는데, 한창 경기 중일 때는 몰랐지만 끝나고 나서 흥분이 가라앉으니 움직일 때마다 제법 큰 통증이 따라왔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영주가 직접 수배하여 데려온, 솜씨 좋다는 의사는 군터의 앞에서 잔뜩 주눅이 든 채로 감히 눈도 마주치지 못했다. 체구가 왜소한 그가 군터의 앞에 있으니 마치 어린 아이가 어른의 앞에 있는 것 같았다.

"당분간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만……."

"그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겠지."

"무리하게 움직인다면 부상이 더 악화가 될 수 있습니다."

"당연한 말을 하는군. 통증만 가라앉힐 수 있으면 족하다. 지금도 크게 상관은 없지만, 미세하게 감각이 무뎌지는 것 같아서 말이다."

"으음."

의사는 결국 약을 처방해 주었다. 하지만 이는 상처를 치유하는 약이 아니었다. 어차피 그런 약이야 이미 쓰고 있었으니까. 그가 처방한 것은 군터가 바란 대로 통증만을 가라앉혀주는, 일종의 마약이었다. 의사는 그 약을 장복하면 절대 안 된다고, 경기 당일 아침에만 사용하라고 몇 번이나 신신당부를 하고 갔다.

"좀 어떠십니까?"

"답답하다."

왼쪽 어깨를 붕대로 칭칭 묶어 고정시켜둔 채였다. 시합 전날까지는 풀지 않는 것이 좋다고 했다. 답답하지만 따를 생각이었다. 이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좋아진다면야 며칠 답답한 것을 못 참겠는가.

"그래도 마지막 상대가 상대라 다행입니다."

마지막 상대가 된 자는 별 볼일 없는 자라는 것 같았다. 이전의 경기도 치열했지만 시시했다는 것 같고. 군터의 부상이 그리 크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이미 우승자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들이 돌고 있었다.

"공교롭지 않습니까. 강자들은 강자들끼리 붙어서 낭패만 본 채 일찍 떨어지고, 별 볼일 없는 자들은 운 하나로 높은 곳까지 오르니 말입니다."

영주를 경호하며 모든 시합을 지켜본 바오룸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시끄럽다."

그러나 군터는 그의 장단에 맞춰줄 생각이 없었다.

지금 이 시점에서 저런 말을 들은들 마음만 무뎌질 뿐이다. 마지막 상대가 그리 별볼일 없는 자라면 승리한 다음에 속으로 비웃으면 그뿐이다. 미리부터 승리한 것처럼 웃기는 감상을 가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제가 괜한 말을 한 것 같습니다."

"영주님께는 감사하다고 전해라."

"기뻐하실 겁니다. 그 자가 변변찮아 보여도, 나름 수도에서는 귀족 가문들에 들락거릴 정도로 솜씨가 좋은 의사라고 합니다. 영주님께서도 수배하시는 데 애 좀 먹으셨습니다."

물론 정말 솜씨 좋은 의사들은 귀족 가문을 들락거리는 것이 아니라 귀족 가문들에 소속이 되어 있겠지만,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더할 필요는 없다. 요는, 영주가 자신이 할 수 있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것이니까.

"경기 전까지는 가벼운 훈련도 되도록이면 자제하십시오. 혹 상처가 덧날지도 모릅니다."

"알아서 하겠다."

수도까지 와서 느낀 것이지만, 바오룸은 제법 수다스러웠다.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거의 하루 종일 영주의 호위를 서면서 입을 떼지 못하기 때문인지, 그를 만날 때마다 하지 않아도 될 말까지 하곤 했다.

그래도 그런 말들 중 대다수가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임을 알기에 지금처럼 적당히 자르고 있었다.

"듣자 하니 경기를 끝내고 돌아가는 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승리를 거두었는데도 말입니다."

"……."

굳이 이유를 생각하려 하지 않고 손을 내저었다. 바오룸이 고개를 숙이고 물러갔다.

*

답답한 날들이었다. 훈련도 쉬고, 기껏해야 정원을 산책하는 것 정도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랬기에 경기 전날이 되었을 때는 왼쪽 어깨의 통증마저 반갑게 느껴졌다.

'약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군.'

통증은 있다. 하지만 며칠 전처럼 그것 때문에 감이 둔해지지는 않았다. 통증이 있는 와중에도 움직임은 평소와 같다. 혹시나 했지만 정말로 그 며칠 사이에 호전이 된 것이다.

자신의 몸이지만, 어지간히도 평범함을 벗어난 몸이었다. 하지만 놀랍지는 않다. 그저 흡족했다.

꺼림직한 마약에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만족스러웠다.

'무슨 이름이었지.'

얼핏 듣긴 들었다. 그런데 기억은 나지 않았다. 분명 랄…어쩌고 하는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누구라도 상관 없다고 생각해서 굳이 기억하려 들지 않았었다. 어차피 기억해야 할 이름이라면 경기 후에는 어떻게든 기억하게 될 테니까.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고, 무투회의 마지막 날이 밝았다.

일어나서 몸을 풀고, 병사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향하고, 일찍부터 자리를 가득 채운 관중들의 소리를 들으면서도 딱히 특별한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저 이제 곧 이 길었던 행사가 끝난다는 데서 느끼는 후련함 정도일까. 그리고 굳이 하나 더 하자면.

"너무 그러지 마십시오."

"아무 말도 안 했다."

"말씀을 안 하셔도, 그렇게 싫으신 티를 내시면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유난을 떠는 건 아닌가 싶었을 뿐이다."

그의 말에 바오룸이 대번에 고개를 저었다.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영주님께서는 마땅히 우려하실 부분을 우려하신 겁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리에론 가문은 오랜 세월 동안 이 도시에 뿌리를 박고 세를 키웠습니다. 모르긴 몰라도, 수도에서 그들의 영향력은 왕실 이상일 겁니다.

대놓고 허튼 짓거리는 못하더라도, 은밀하게는 얼마든지 손을 쓸 수 있겠지요. 물론 그럴 확률도 적기는 하겠지만, 영주님께서는 만에 하나까지 염려를 하시는 겁니다."

"…그래. 알겠다."

문득 그림왈드의 숨통을 끊었던 것은 괜한 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빠르게 사라졌다.

어차피 벌어진 일이다. 그리고 리에론과 코누디스의 사이는 그림왈드의 일이 있기 전에도 최악이었다. 그가 한 일은 이미 활활 타는 불에다가 바람 좀 분 것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군터 경."

바오룸과 병사들에게 빙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데, 관리가 다가와 그를 불렀다. 관리는 그의 시선을 받고 움찔하더니 할 말만 짧게 하고 돌아섰다.

"시간입니다."

*

와아아아아아-!

바오룸은 별볼일 없는 상대라고 말했다.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확신에 찬 얼굴이었고 목소리였다.

그러나 지금. 라르바시온이라는 이름의 상대를 마주한 군터는, 바오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직감했다.

보는 순간 알았다. 이 자는 강하다. 그리고 무언가…특별하다.

단련된 몸. 꼿꼿한 기세. 뜯어보면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없는데, 희한하게도 그를 보고 있자니 경각심이 일었다.

"……."

군터는 사회자가 경기 시작을 외쳤지만 바로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본능의 경고를 십분 수용하여 차분히 상대를 살폈다.

자세는 평범하다. 단지 어쩐지 조금 흐리멍덩한 것 같은 눈이 거슬렸다. 결투에 나선 전사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눈이다.

어떻게 저런 눈을 한 자가 여기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거지?

그런 의구심이 고개를 든 순간. 자세를 취하고 있던 상대가 갑작스레 달려들었다. 사전 동작 없이 곧바로 몸이 튀어나왔기에 군터는 조금 당황하여 받아 치는 것이 늦어졌다. 그렇다 해도 아주 미세한 정도였지만, 고작 그 정도의 지체 때문에 반격을 가하는 대신 수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흐릿한 눈을 한 상대의 힘이, 그의 예상을 웃돌았기 때문이다.

채채챙!

'이놈…움직임이.'

일반적으로 무인이 보이는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다. 강함과 약함, 빠름과 느림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대개 그 형식은 정해져 있다. 파인 곳을 따라 물줄기가 흐르듯, 이론과 실전을 두루 겪은 무인이라면 그가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은 예상 가능하다. 단지 그 경우의 수가 제법 있어, 그 틀 안에서 수 싸움을 벌일 뿐.

카앙!

그러나 지금 상대하는 자는 그런 '당연함'에서 벗어나 있었다. 그의 움직임에는 형식이 없었다. 어설픈 것 같으면서도 의표를 찌르고, 무딘 것 같으면서도 날카로웠다.

그것은 흡사 기분이 내키는 대로 지르는 것 같은 느낌. 사람이 갈고 닦은 무술이 아니라 짐승이 마구잡이로 날뛰는 것 같은 흉포함.

쾅!

흙 바닥에 거친 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려났다.

창대가 떨린다. 손아귀가 저릿하다. 완벽하게 막아냈음에도 충격을 다 해소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힘에서는 대등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상하군.'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다. 느낌이 전부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해도, 이 힘은 이상하다. 지독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바람도 없는데 풀들이 춤을 추는 것 같이, 힘을 낼 수 없는 몸이 힘을 내고 있다.

쾅!

힘껏 후려치니 몸이 주욱 밀려난다. 군터는 상대의 무릎이 일순간 기이한 각도로 꺾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고통을 느끼지 않는 건가?'

인간의 본능은 고통을 피하는 쪽으로 움직인다. 차라리 몸을 띄워 땅을 뒹굴면 뒹굴지, 지금처럼 관절이 꺾이는 것을 감수하면서까지 거리를 유지하려 들지는 않는다.

채챙!

'인형 같군.'

상당한 고통이 있었을 텐데도 표정에 변화가 없다. 흐린 눈도 여전하다.

'약인가?'

고통을 느끼지 못하고 짐승처럼 달려들던 적이 처음은 아니다. 하지만 이전의 적들과 지금의 이 상대는 다르다.

챙!

그는 새롭다. 맛이 간 것 같은 와중에도 이처럼 강하고 날카로우니, 질기기만 했던 과거의 적들과 달리 위협적이다.

퍽!

검권(劍圈)의 안으로 파고들며 팔꿈치로 가슴을 찍었다. 고통이 아닌 충격으로 밀려나는 상대에게 연달아 팔을 쭉 뻗으며 검을 그었다.

촤악!

튄 피가 얼굴을 적시기도 전에 반격을 가해온다. 이 역시 예상하고 있던 바라, 군터는 검을 그으면서 거의 동시에 몸을 뒤로 틀며 발을 뻗었다. 상대의 검 끝이 아슬아슬하게 이마의 앞을 지나고, 피를 뿌리는 상대의 몸이 뒤로 크게 밀려났다.

"하아앗!"

어쩐지 어색하게 느껴지는 기합소리. 이제껏 숨소리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던 상대였는지라 낯설기까지 했다.

제법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상대의 몸놀림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안색이 급속도로 창백해져 감에도 잡아먹을 듯이 달려드는 꼴이 섬뜩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재미있었다.

사람과는 질릴 정도로 겨뤄봤고, 짐승과도 겨뤄봤다. 하지만 인형과는 또 처음이었다.

푸욱!

칸젤의 창 날이 오른쪽 가슴을 찔렀다. 달려오던 몸이 덜컥 멈춘 것은 깊숙이 파고든 창 때문이 아니라, 찌르자마자 곧바로 힘을 주어 들어올렸기 때문이었다. 창을 쥔 한 손으로 사람 하나를 들어올리는 일쯤, 손쉽다.

그렇게 들어올린 사람을 땅에 내리 찍는 것 또한, 역시 손쉽다.

콰앙!

살이 찢기고 뼈가 으스러졌다. 손에 확실히 감촉이 왔다.

턱!

그런데도 인형은 더듬거리며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쥐었다.

군터는 발길질을 하듯 손을 쳐내고, 뭉개지고 찢긴 가슴을 짓밟았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핏물이 배로 늘었다.

꿈틀거리던 몸이 경련을 하더니, 이내 멈췄다.

"……!"

그 순간, 그는 보았다.

입을 쩍 벌린 인형에게서 흐릿한 무언가가 빠져 나와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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