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9화
쾅!
찔러오던 검을, 좌수의 검으로 내리쳐 막았다. 두 자루 검이 땅에 내리 꽂히고, 달려오던 그림왈드의 몸이 균형을 잃고 그대로 앞으로 쏠렸다.
턱!
총 길이의 반이 칼날인 칸젤의 시퍼런 날이 그림왈드의 가슴에 닿았다.
창 날에 갑옷의 감촉이 닿는 것을 느끼자마자, 있는 힘껏 잡아당겼다. 힘을 받을 거리가 충분치 않았음에도, 서늘한 칸젤의 날은 갑옷을 찢고 그 안의 살까지 깊숙이 갈랐다.
"끄윽!"
확실히 녹록하지 않았다. 그림왈드는 그 짧은 순간에도 몸을 뒤로 날리다시피 하며 살을 가르는 창 날을 최대한 피했다. 그렇다 해도 피가 땅을 충분히 적실 만큼 쏟아지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흉골이 다 갈라지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다.
피가 쏟아지는 가슴을 부여잡고 빠르게, 위태롭게 뒷걸음질을 친다. 군터는 바로 그를 따라붙었다. 멀어지는 속도보다 빠르게 뒤쫓으며, 내리쳤던 검을 들어올리며 찔렀다.
챙강!
대응하려 올라간 그림왈드의 검이 힘 없이 튕겨졌다. 부딪침으로 인해 살짝 방향이 틀어진 검극은 명치를 찔렀다. 갑옷은 의미가 없었다.
푸욱!
"허억!"
펄떡이는 움직임이 눈보다 검의 떨림을 통해 손이 먼저 느꼈다.
"……."
그림왈드와 눈이 마주쳤다. 고통, 분노, 그 밖의 복잡한 감정이 눈을 통해 비쳤다.
푸욱!
검을 뽑았다.
챙!
힘 없이 날아들던 검을 쳐냈다. 그것만으로도 그림왈드의 몸은 힘 없이 밀려 쓰러졌다. 마지막까지도 이빨을 드러냈지만, 거기까지였다. 쓰러진 그림왈드는 움찔거렸으나 다시 일어서지는 못했다.
그가 쓰러진 자리에서부터 땅이 붉게 물들어갔다.
-구, 군터 경의 승리요!
사회자의 다급하게까지 느껴지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관중들의 함성이 뒤따랐으나 별 감흥은 없었다. 군터는 몇 번인가 더 꿈틀거리다가 끝내 잠잠해진 그림왈드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
"고의다! 승패가 갈렸음에도 저 놈이 고의로 그림왈드 경을 죽인 것이다!"
쓰러진 그림왈드에게 달려간 병사들이 고개를 젓자마자, 리에론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그전에도 그의 얼굴은 잔뜩 붉어져 있었으나, 이제는 아예 폭발하고 있었다.
그의 분노로 가득 찬 시선은 멀찍이 떨어진 막시밀리언을 향했다.
"공작 각하. 어찌 말씀을 그리 하십니까."
활활 타는 불꽃 같은 시선을 상대로도 막시밀리언은 눈살을 찌푸리기만 했을 뿐, 태연한 신색을 유지했다. 모양새만 보면 가만히 있는 그에게 리에론 공작이 화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림왈드 경은 반격을 가했습니다. 그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았고, 군터 경은 승리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단지 그뿐입니다. 물론 그 결과가 좋지 못하게 나왔으나, 날이 선 병기를 가지고 벌이는 투기에 불운한 사고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를 잘 알고 계실 공작 각하께서 새삼스레 그런 말씀을 하신다는 것은 수하를 잃으신 비통함 때문이리라 생각합니다."
으득!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막시밀리언은 이미 죽었을 것이다. 그것도 그냥 죽는 것도 아니라 사지가 찢겨 죽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노려보는 리에론 공작의 시선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명문 무가의 혈통으로, 본인도 전장에서 군대를 이끈 경험이 있는 리에론 공작은 무인이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었고, 그런 그의 살기는 보통 사람이 심기가 불편할 때 발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게 농밀했다.
"리에론 공작. 그대의 상심은 짐작하네."
싸늘하게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왕의 한 마디였다.
"허나, 좋은 자리에서 그런 태도는 옳지 않아. 무투회가 개회한 이후로 다친 이가 한 둘이며, 죽은 이 또한 없지 않았는데 그때도 이 자리에 있는 영주들이 자네처럼 언성을 높였던가?"
내용은 타이르는 것이었으나 목소리는 사뭇 차가웠다. 몸을 한 쪽으로 기울이고, 손에 턱을 괸 모습은 이 상황에 대한 불쾌함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
리에론 공작이 숨을 골랐다. 눈을 한 번 질끈 감고는 왕을 향해 크게 허리를 숙였다.
"…소신이 순간의 노여움을 이기지 못하여 전하의 앞에서 추태를 보이고 말았습니다. 부디 용서하여주시옵소서."
"됐네. 공작도 사람일진대, 당연히 감정에 휩쓸릴 때도 있겠지. 그대의 용맹한 기사에게 벌어진 안타까운 사고에 대해서는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지."
"감사하옵니다. 신들의 품으로 돌아간 그림왈드 경도…성은에 기뻐할 것입니다."
왕이 사고라고 말했고, 리에론 공작도 그것을 인정했다. 이제 이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리에론 공작이 체면을 단단히 구겼군요."
센트리올 자작이 슬그머니 한 마디 했다.
막시밀리언은 짐짓 엄숙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공작 각하께서 안 그래도 상심이 크실 터인데, 그런 말까지 들으신다면 아예 화병으로 쓰러지실지도 모릅니다."
"아아. 그렇지요. 여기서는 말 조심을 해야겠습니다. 하하."
주변에 앉은 다섯 영주가 잔뜩 목소리를 낮추고 축하 인사를 건넸다. 그에 막시밀리언은 희미한 웃음으로 조용히 화답했다.
"그나저나 무투회의 우승은 군터 경의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군요."
"모르는 일이지요. 아직 한 경기가 남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이번에 입은 부상이 어떤지도 살펴봐야 하겠고……."
"아아. 그렇군요. 큰 부상이 아니길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말은 그리 했지만, 말을 한 막시밀리언이나 주변의 영주들이나 이미 우승자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상을 걱정하기에는 마지막까지 보여준 군터의 움직임에 전혀 부자연스러움이 없었을 뿐더러, 상대를 걱정하기에는 이제 또 한 번의 경기를 치를 참가자들의 수준이 그리 대단치 않았다.
*
경기가 있던 날 오후. 막시밀리언은 곧바로 군터를 찾아왔다.
"부상은 어떤가."
"괜찮습니다. 살이 조금 베인 것뿐입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심한 부상일 수도 있겠지만, 군터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근골은 그가 발휘하는 힘만큼이나 강했고, 피륙의 상처 정도는 별 감흥도 없었다. 그의 몸에는 이보다 더 큰 상처들이 빛 바랜 흉터로 남아 있었으니까.
"마지막에는 나도 놀랐다네. 이미 승패가 갈린 것처럼 보였는데, 거기서 굳이 끝을 볼 줄은 몰랐거든."
"……."
"불운한 사고였다는 말은 하지 않는가?"
"어찌 영주님께 거짓을 말씀 올리겠습니까."
"허어. 혹시나 했는데 정말이었군. 무모한 일이었네. 물론 나야 기뻤지만."
기쁘기만 했을까. 주변의 눈치만 아니었다면 리에론 공작의 찌그러진 얼굴을 향해 축배라도 들었을 것이다. 공작이랍시고 어울리지도 않는 무게를 잡으며 뒤로는 얄팍한 수작을 부리는 그가 얼마나 꼴 보기 싫었던가. 근래에 오늘처럼 통쾌한 날이 없었다.
하지만 통쾌한 것은 통쾌한 것이고, 걱정스러운 것은 걱정스러운 것이다. 리에론 공작이 날뛰려던 그 자리에서 바로 진화를 하기는 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못한 불만이 뒤로 흘러나올 수도 있다.
"어째서 그런 것인가? 자네답지 않았네."
군터는 잠시 속으로 말을 골랐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떼었다.
"그 경기는, 영주님과 리에론 공작의 대리전이 아니었습니까."
"언제 그렇게 말이 늘었나. 위벨에게 배우기라도 한 건가?"
막시밀리언이 씩 웃었다.
"뭐 좋아. 무슨 이유가 됐든, 자네 말처럼 파비우스에게 제대로 한 방 먹인 것은 사실이니. 그 오만한 자가 벌떡 일어나 삿대질까지 하는데, 웃음을 참느라 애 먹었다네."
어지간히도 기분이 좋았는지, 막시밀리언은 드물게 많은 말을 하다가 돌아갔다. 그것도 남은 한 경기를 위해 몸조리를 잘 하라며 일찍 자리를 비켜준 것이었다. 안 그런 척했지만, 그간 리에론으로부터 받은 압박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리에론 공작을 몇 번이고 씹어댄 것을 보면 말이다.
'왜 죽이기까지 했냐고.'
과한 손속이었다. 죽이지 않고 끝낼 수도 있었다. 적당히 무력화시키고 승리를 거둘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림왈드의 성가신 능력을 깼을 때부터, 그 후의 과정은 상관 없이 이미 승패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굳이 죽였다. 리에론 공작에게 한 방 먹여주기 위해서? 영주도 알아차린 것 같지만,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런 것 따위는 관심도 없었다. 무투회가 영주들의 대리전이라고 하지만, 군터는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싸운 것은 오직 자신을 위해서지, 그가 섬기는 영주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왜였을까.
굳이 그림왈드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은 돌이켜봐도 별로 이성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자칫하면 크게 후환을 치를 수도 있는 일이었다.
사실 마지막에 검을 찌를 때까지도 별 생각은 없었다. 후환이라든지, 그런 것들에 대해서는 일절 고려치 않고, 그저 살의에 가득 차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위기감 때문이었다고 뒤늦게 짐작했다.
그림왈드가 그만큼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검이 가슴을 가르고 어깨를 벤 것과는 상관 없이, 그의 모든 것이 거슬렸었다.
모든 것이 끝난 지금 다시 한 번 생각해봐도 그 순간의 감정은 그 자신도 이해가 가지 않을 만큼 맹목적이었으며, 맹렬했다. 뭔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이.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인 것도 아니다. 이전에도 가끔씩, 뭔가 조금 몰리는 일이 생겼을 때마다 간혹 이런 비슷한 경우가 있곤 했다. 그때마다 반성하고, 더욱 더 정신을 바짝 차리는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그럼에도 오늘 또 한 번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이상하군.'
분명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을 하는데, 머릿속으로는 의구심이 지워지지가 않는데, 그의 마음은 더 없이 평온했다. 가슴과 머리가 완벽히 따로 놀고 있었다.
군터는 생각하기를 그만뒀다. 감정이 이성을 밀었고, 피로가 그 위를 덮었다. 오늘만큼은 푹 쉬고 싶었다.
*
"정말 할 생각이오?"
[확인해야 한다.]
"오늘 본 걸로도 확신할 수 없었소? 전보다 더 치열하게 싸웠지 않소. 드러난 것도 전보다 많았을 텐데."
[알 수 없었다. 닮았지만 달랐다.]
"후우……."
진한 한숨. 그리고 체념.
"그대와 그대의 일족이 베이고르에 빚을 졌음을 잊지 마시오."
[그대들에게도 좋은 일이다. 만약 정말로 그가 '파편'이라면, 인간 하나의 희생은 값싼 것이다.]
상아색 손이 앞으로 움직였다.
길게 뻗은 손가락 끝에 은은한 빛이 감돌았다.
툭
그 손끝은 한 사내의 이마에 닿았다.
멍하게 풀려있던 사내의 두 눈이 천천히 감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