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8화
피가 튀었다.
'늦었다.'
그것을 자각한 순간, 후끈한 열기가 제대로 올라오기도 전에 곧바로 검을 내리그었지만, 그림왈드는 아슬아슬하게 뒤로 몸을 빼서 피해냈다. 허공을 그은 검이 무게 중심을 흐트러뜨렸고, 군터는 한 발자국 물러나며 중심을 잡았다.
"……."
굵은 밧줄로 칭칭 묶인 것처럼 압박을 받던 몸의 감각이 돌아왔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전신에 힘이 느껴진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고통이, 피가 서너 호흡 전과 다른 유일한 점이다.
핏발이 서고, 부릅 뜨인 눈이 물러난 적을 향했다. 끔찍할 정도의 살기가 휘몰아쳤다. 득의의 미소를 짓고 있던 그림왈드가 흠칫할 정도였다.
"후우."
끈적한 숨결이 떨어진 입술 사이로 흘렀다.
'간만이군.'
이렇게 피를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전쟁이 끝난 후로는 처음이다. 전장에서조차 이렇게 제대로 일격을 허용한 적이 드물었는데, 가벼운 마음으로 참가했던(시작은 그랬던) 무투회에서 이런 상처를 입게 될 줄이야.
'보이지 않는 힘을 사용한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좋은 것을 알았다. 그림왈드의 정체 모를 힘은 방어용이 아니다. 보다 유용한 것이다. 충돌의 충격을 해소시키는 것이 어찌 가능했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내 몸을 붙들었듯, 무기를 붙든 건가?'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비슷할 것이다.
"……."
거리를 벌리고서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그림왈드에게서 눈을 떼고, 슬쩍 시선을 아래로 내려 상처 부위를 보았다. 가벼운 가죽 갑옷은 깔끔하게 잘렸고, 그 안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상처가 작지 않은 만큼 출혈량도 상당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상처에서 일어나는 열기는 그의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불길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순간적으로 너무나 화가 치밀어 아찔할 지경이었다. 이성의 끈에 날카로운 칼날이 반쯤 파고들었다. 손에 쥔 칸젤이 그런 감정을 더 부추겼다. 당장 저놈의 목을 잘라버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분노는 힘이 되지만, 그 힘에 너무 기대면 오히려 역효과를 낳는다.
최고의 무력은 감정과 이성이 대등하게 서로를 받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는 것을, 군터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끓어오른 분노를 가라앉혔다. 보채는 칸젤을 다독였다.
그리고 여전히 뜨겁게 일렁이는 눈으로, 조금은 더 냉정하게 상대를 보았다.
'별다른 징후는 없었다.'
만약 그림왈드가 스스로 술사라서 직접 술법을 사용한 것이라면 단번에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그가 사용하고 있는 힘이 일반적인 술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힘이 사용될 때의 징후도 미약하고, 발동되는 속도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군터는 이러한 부류의 힘을 알고 있었다. 직접 바로 옆에서 몇 번이나 보았고, 한 번은 직접 싸우기까지 했었으니까.
'각인.'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아그니스 체스퍼가 사용하던 힘. 제국의 궁정 술사들이 직접 새겨주었다 했던가.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 힘을 이용해 칼날도 제대로 들어가지 않는 청동의 거인으로 변할 수 있었다.
그림왈드의 저 힘이 아그니스 체스퍼의 것과 비해 어떤지는 알 수 없으나, 위력적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군터는 저 위력적인 힘이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각인의 힘을 사용하던 아그니스 체스퍼 본인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였으니 확실하다.
'대가 없는 힘은 없다.'
하다 못해 맨몸으로 힘을 낼 때도 피로라는 대가가 따른다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의 강체술-각인-을 사용하면 몸에 힘이 급속도로 소진 된다고 했다. 어찌 보면 군터의 비술과도 같다.
몸에 새겨진 각인을 통해 술법의 힘을 발휘하지만, 그 힘을 사용하는 기반은 어디까지나 사용자의 육신. 따라서 강한 힘을 발휘할수록 더 무거운 부하가 몸에 걸리게 되는 것이다.
'아아. 그렇군.'
문득, 숨을 몰아 쉬고 있는 그림왈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 거라고는 치고 빠진 것 밖에 없는데, 칼에 몸이 베이지도 않는 주제에 어째서 저런 모습을 보이는 걸까.
답은,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뻔하지 않은가.
*
챙! 채챙! 쾅!
폭풍과 같았다.
피를 보고 나서부터 눈이 돌아간 것처럼 쉼 없이 몰아치는 군터의 모습은,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칠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이들 가운데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흘렀다. 막시밀리언의 곁에 모여 앉은 동부의 영주들이었다.
"저런! 저렇게 하다가는 기운이 빠져버릴 터인데."
"어쨌거나 기세를 탔지. 여기서 뚫지 못하면 끝이오."
나름대로 전장에서 칼 좀 휘둘러 봤다는 영주들이 아는 척을 했다. 막시밀리언은 아무 말 없이 경기를 지켜보았다.
"괜찮은 것인지 모르겠군요."
젠탄테르 남작이 조심스레 말했다. 동부 연합의 일원이자, 사적으로는 막시밀리언의 장인이기도 한 그의 말에는 막시밀리언도 답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을 겁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속이 깊은 사내입니다. 특히나 검을 들었을 때는 더욱 더 그렇지요. 순간의 분노에 몸을 맡기는 범부가 아닙니다."
"수하에 대한 신뢰가 대단하시군요. 하긴, 범부가 어찌 그런 무훈을 세웠겠습니까마는."
오오오오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한 번 일이 벌어졌다. 숨 쉴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몰아붙이던 군터가 그림왈드의 반격에 어깨를 베인 것이다. 팔이 떨어져나가거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공세를 멈추고 뒷걸음질을 칠 만큼 위력적인 일격이었다.
"……."
젠탄테르 남작이 헙! 하고 입을 다물었다. 태연히 지켜보던 막시밀리언의 표정도 살짝 굳어졌다.
동부 연합의 영주들의 분위기도 좋지 않게 변했는데, 반면에 리에론 공작 주변에 모여 앉은 영주들의 목소리는 한층 더 커졌다. 개중 몇몇은 이미 승패가 결정이 난 것처럼 웃고 있었다. 정말 심한 어떤 자는 리에론 공작에게 축하의 인사까지 건넸다.
'뭘 노리고 있는 거지?'
막시밀리언은 백부장 출신으로, 전장에서 쌓아 올린 피로써 지금의 자리까지 오른 군벌 영주였다.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전에는 직접 적들과 칼을 부딪치며 싸운 적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무인으로서 그의 성취는 높다고 하기에는 다소 부족한 것이었기에 지금 저 아래서 벌어지고 있는 공방을 제대로 볼 줄 아는 안목은 없었다.
다만, 그는 군터라는 사내를 잘 알았다. 자신의 명을 받는 수하이지만, 무인으로서 그가 이룬 성취는 충분히 존중했다. 그렇기에 저런 이름도 모르는(이제는 알게 됐지만) 자에게 저토록 휘둘릴 자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물론 지금은 그런 믿음과는 달리 두 번이나 피를 뿌리며 안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었지만, 분명 무슨 계산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여유로운 낯짝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리에론 공작의 시선을 지금처럼 태연히 넘기지 못할 것 같았다.
*
"……."
어깨를 베였다. 피가 튄 것에 비해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다. 통증은 있지만, 움직이는 데 지장이 없으니 그걸로 됐다.
"후우! 후우!"
묘한 광경이다.
많이 움직인 것도 그이고, 어깨와 가슴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 것도 그인데, 숨이 거칠어진 것은 그림왈드 쪽이니 말이다.
'역시.'
생각한 것이 맞았다. 저 정체 모를, 성가시기 짝이 없는 술수는 몸에 부담을 지운다. 어쩌면 아그니스 체스퍼의 강체술보다 더 심할지도 모른다. 그림왈드는 그 때문에 그의 각인된 능력을 필요할 때만 짧게 발휘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렇지 않은가? 만약 저 힘에 아무런 제약도 없거나, 있다 해도 그 제약이 약하다면 처음 그의 가슴에 상처를 남길 때처럼 그의 전신을 묶어버리고 목을 쳤으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는 것은, 그러지 못한다는 것과 같지 않겠는가.
'최고로 발휘할 수 있는 힘은 전신의 움직임을 늦추는 정도. 그마저도 반의 반 호흡 이상 가져가지 못한다.'
그것도 멀쩡할 때의 일이니, 지금처럼 체력이 떨어진 상태에서는 그마저도 하지 못할 확률이 높다. 물론 확단할 수는 없는 것이라, 군터는 몰아치면서도 칸젤을 이용해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설령 그림왈드가 처음처럼 달려든다고 해도 반응할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였다.
마구잡이로 몰아치는 것 같지만 그게 아니다. 군터는 거친 공세로 착실하게 그림왈드의 체력을 빼놓고 있었다. 몸에 칼을 맞는 것을 감수하고서 말이다.
이제껏 군터가 이렇게까지 신경을 써서 상대한 적은 단 둘 뿐이었다.
타칸 연합의 대전사 포라칸. 그리고 아그니스 체스퍼.
이제는 이 둘의 이름 옆에 그림왈드가 올랐다.
'어떤 의미에서는 체스퍼 장군보다도 더 까다로운 상대다.'
물론 순수한 무공만을 놓고 봤을 때는 아그니스 체스퍼가 명백히 위다. 하지만 저 성가신 능력이 까다로움을 더했다.
저 능력. 상대의 움직임을 묶어버리는 저 힘은 1대1의 결투에서 만큼은 아그니스 체스퍼의 강체술보다 훨씬 더 강력했다.
'술법의 힘이라.'
술법이라고 한다면, 이쪽도 숨겨놓은 패가 있다. 다만 아직은 확신이 서지 않았다. 꺼낸다 하여 먹힌다는 보장이 없고, 마지막 패를 감추어 두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불안감을 심어줄 수 있다.
그림왈드가 그의 능력을 믿고 과감하게 달려들지 못하는 이유도, 어느 순간에 군터가 감춰놓은 패를 꺼내 들지 몰라서다.
'확신이 없는 거겠지.'
비술을 사용했을 때 한층 더 강력해진 그를 묶을 수 있을지 그림왈드는 확신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처럼 과감히 달려들지 못하고 끌고 있는 거다. 하지만 이는 어리석은 선택이다.
비술이 아니더라도, 군터의 몸은 충분히 강하다. 지금처럼 평범한 공방이 이어지기만 해도, 먼저 나가떨어지는 쪽은 그림왈드다.
그는 버티기 위해 계속해서 각인된 술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그로 인해 그의 체력은 빠르게 고갈되어가고 있다. 비록 가슴과 어깨에 한 방씩을 허용하여 피를 봤지만, 군터는 이 상태로 지금 하늘에 걸린 해가 저물 때까지 싸울 자신이 있었다.
'이제 슬슬 알아차렸겠지.'
한 방을 먹였음에도 만족한 얼굴이 아니다. 그의 표정은 오히려 일그러졌다. 이쪽의 평온한 기색을 보고서라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시간은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와라.'
사냥감이 덫에 빠지길 기다리는 사냥꾼의 심정이다.
그림왈드의 굳어진 눈매에 독기가 서렸다. 결단을 내린 자의 눈빛이다.
다시 한 번, 몸이 굳었다. 처음보다도 더 강한 압력이다.
탁!
그림왈드가 내달렸다.
한 걸음. 두 걸음.
쿠웅!
그 잽싼 움직임을 쫓던 군터의 두 눈이, 한 순간 핏빛으로 물들었다.
콰직!
무언가 부서지는 듯한, 귀로 흘러 들어가지 않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멈춰있어야 할 군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요동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