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7화
"누가 이길 것 같소?"
"글쎄요. 쉽사리 예측이 안 되는군요."
무투회에 나선 무인들 모두가 이곳에 있는 영주들의 휘하다. 대놓고 둘 중 누가 이길 것 같다 하는 것은 선택 받지 못한 무인을 휘하에 둔 영주를 무시하는 말로 비칠 수 있다. 때문에 이런 곤란한 질문이 나왔을 때의 답은 사실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르겠다거나, 너무 어렵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지금, 고개를 젓는 영주들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이 배제된 진심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실제로, 경기장에 있는 저 둘 중 누가 이길지 판단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둘 모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여기까지 올라왔다. 당연히 전력을 내보인 적도 없으니, 그 진실된 저력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둘 중 누가 이길지는 모르겠으나, 이 경기가 사실상의 결승이지 않을까 싶소이다."
"그건 이 사람도 같은 생각입니다."
조용조용한 말들이 오가는 가운데, 오직 두 사람만은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며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리에론 공작과 코누디스 자작.
한때는 당수와 당여의 관계였지만 이제는 정적이 되어버린 두 사람은 주변에서 떠드는 이야기와 한참 동떨어져 침묵했다.
그들의 주변에 자리한, 두 무리의(한쪽은 다른 쪽에 비해 비교하기도 뭐할 만큼 확연히 수가 적었지만) 영주들도 덩달아 조용히 있었다. 태연하게 입을 놀리는 것은 왕당파, 그리고 칸디시아렌 공작 쪽의 영주들뿐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번 경기는 굉장히 흥미로운 유희였다. 두 쪽 모두 세 명의 참가자 가운데 마지막 남은 하나다. 이 경기가 끝나면 둘 중 하나는 참가자를 모두 잃게 된다. 어느 쪽이든 체면을 구기게 되는 것은 분명하고, 그것이 리에론 공작 쪽이 된다면 특히 더 그럴 것이다.
"어찌 보는가?"
주변에서 떠들어댈 동안 가만히 있던 칸디시아렌 공작이 문득 옆에다 대고 물었다. 그의 옆에는 프롱기우스 후작이 뚱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었다.
"이제껏 있었던 그 어떤 경기보다 수준이 높겠군요."
"그런 것을 물은 게 아니지 않나."
"그러니까 말입니다. 의미 없는 물음이라는 것을 아시면서 어찌 물으십니까."
"자네가 보기에도 그런가?"
"둘 다 밑바닥을 보인 적이 없는데 어찌 비교를 하고 예상을 하겠습니까. 차라리 동전의 앞 뒷면을 맞추라 하십시오."
나라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 권력자를 향해서 거침없이 말을 뱉는다. 제 아무리 후작이라지만, 프롱기우스 후작의 언사는 굉장히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칸디시아렌 공작 앞에서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내였다.
"좋아. 그럼 예상은 됐고, 골라보게."
"그건 또 무슨 말씀이십니까."
"동전의 앞면이 나올지 뒷면이 나올지, 그냥 한 번 불러나 보라는 말일세."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말 한 마디 하고 안 하는 데도 의미까지 따져야 하나? 너무 딱딱하군."
칸디시아렌 공작이 짐짓 너스레를 떨자 프롱기우스 후작이 헛웃음을 지었다.
"뭐…그도 그렇군요. 허면 저는 코누다이안 쪽을 택하지요."
"망설임도 없군. 역시 이름값인가?"
"그런 것보다는, 아무래도 저 친구 같은 경우는 직접 제 눈으로 본 게 있어서 말입니다."
"아아. 맞아. 그랬지. 직접 보았나? 저 친구가 아그니스 체스퍼와 겨루는 모습 말이네."
프롱기우스 백작이 답을 하려던 순간. 사회자의 우렁찬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코누다이안의 군터 경!
"정말 놀랍군. 무투회가 시작된 지도 한참인데, 여전히 저렇게 소리를 질러댈 수 있다니. 저것도 재능이겠지."
"독전관으로 쓰면 딱 좋을 것 같습니다. 자기가 먼저 겁을 집어먹고 떨지만 않는다면 말입니다."
"하하하."
-리에스의 그림왈드 경!
"이번엔 제가 여쭤보지요. 누가 이길 것 같으십니까?"
"질문이 잘못됐어."
"아, 그렇군요. 그럼 다시 여쭙지요. 누가 이기길 원하십니까?"
"조금 낫군. 하지만 역시 잘못됐어. 의미가 없지. 당연한 것을 어찌 묻나?"
"간단히 묻는 한 마디에 의미까지 따져야 합니까? 너무 딱딱하시군요."
"응? 하하하! 그도 그렇군."
정작 이야기를 나누는 당사자들은 태연한데, 뒤에 서 있던 호위들이 안절부절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칸디시아렌 공작은 시원스레 웃으며 멋스럽게 난 그의 수염을 쓰다듬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
사회자가 경기 시작을 외쳤음에도 두 사람은 움직이지 않았다. 각자의 무기를 치켜 들고 상대를 겨누었으나, 그뿐이었다.
먼저 입을 뗀 것은 그림왈드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반갑기 그지없소이다."
"……."
"일전에 내 이리 될 거라 말하지 않았던가? 결국 내 말대로 되었구려."
"변했군."
"음? 그게 무슨 뜻이오? 당연한 말을 하시는군."
"전에도 자신감이 있었지만, 지금은 넘치는군."
"아니. 이건 자신감이 아니오. 한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따지자면…그래. 적의(敵意)라 해두십시다."
힘이 넘치는 무인들이 날이 바짝 선 무기를 들고 겨루는 자리다. 전장에서 만난 적을 대하듯 하지는 않지만, 승리를 위해 치열하게 맞붙다 보면 이런저런 사고도 생기기 마련. 실제로 이번 무투회에서 발생한 사상자의 수가 적지 않았다.
군터의 경기에서는 한 명도 없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딪치는 양쪽의 격차가 너무 크기에 가능했던 일.
크게 다치거나, 혹은 죽거나. 모두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시작하기도 전에 살기를 풀풀 풍기는 경우는 크게 다친 이가 나온 경기에서조차 한 번도 없었으리라.
적의라. 대체 무슨 악감정이 쌓였기에 이렇게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살기를 풍기는지, 화가 나기보다는 의아했다.
"내게 쌓인 것이 많은가?"
"아니. 내가 그대와 봤으면 얼마나 보았다고 쌓이고 말고 할 게 있겠소. 단지 리에론의 기사로서, 간적(奸敵)의 주구를 앞에 두고 있자니 자연히 마음이 편치가 않구려."
의아함은 사라졌다. 이제는 노여움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이 아니다."
"무엇을 반박할 수 있겠는가. 그대의 주인이 부린 패악질은 세상이 다 아는 바. 내 일전에 보았을 때는 그대를 호방한 무인이라 여겼소."
"방금 전 말을 그대로 돌려주지. 나에 대해 알면 뭘 얼마나 안다고 마음대로 지껄이나."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았다. 불쾌함을 창 끝에 담아 단번에 내질렀다.
캉!
불똥이 튀겼다. 달려든 군터도, 받아 친 그림왈드도 뒷걸음질을 쳤다.
'뭐지?'
칸젤이 그림왈드의 평범해 보이는 장검을 가르지 못한 것은, 이해할 수 있다. 리에론의 기사 쯤 되면 무구도 평범한 것을 쓰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충분히 힘을 실은 찌르기였다. 그런 공격이 튕겨져 나온 것치고는 손아귀에서 느껴지는 반발이 너무 작았다.
흘리기는 아니었다. 충돌하는 순간 무기를 비틀어 상대의 힘을 흘리는 기술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누구나 사용할 수는 있지만, 이 정도로 빠르게 반응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런 것이었다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리가 없다. 방금 전 그림왈드의 손목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만약 그의 기술이 군터의 눈까지 속일 정도라면, 그림왈드의 무공이 그보다 적어도 세 수는 위라는 뜻이다.
'뭔가 있군.'
확신했다. 군터는 한층 더 경계심을 높인 채 공격을 쏟아 부었다. 한 자루 창과 검. 매섭게 몰아치는 공세에 맞서 그림왈드는 차분히 두 손으로 쥔 검을 놀렸다.
채챙! 챙!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는 무기들. 육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쉴 새 없이 움직이는 흐릿한 형체들과, 그 사이에서 튀는 불똥뿐이었다.
와아아아아-!
강한 만큼 화려한 검투의 향연에 관중들은 환호했다. 그들은 몇 번씩이나 자리를 바꿔 가며 싸우는 두 명의 기사들에게 눈을 떼지 못했다. 그들의 격렬한 움직임, 자그마한 심호흡까지도. 살벌함을 넘어 어떠한 아름다움까지 느껴지는 투기(鬪技)였다.
쾅!
그림왈드가 뒤로 주욱 밀려났다. 손목이 뻐근한지 가볍게 움직인다. 그러나 드러난 표정에 변화는 없다. 슬쩍 들린 입 꼬리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군터의 입장에서는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다. 방금 전의 공격은 전력으로 후려친 것이었기에 더 그랬다.
'힘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뻗어나가는 도중에는 문제가 없다. 이변은 마지막 순간에 일어난다. 정확히는 그림왈드의 검과 그의 창검이 부딪치는 그 한 순간에.
힘이 죽고, 무거워야 할 충돌은 가벼워진다. 합을 나눔에 있어 충격을 줄 수 없다는 것은, 틈을 벌리기가 어려워진다는 것과 같다. 이는 큰 문제다.
"술법인가."
처음에는 확신하지 못했다. 하지만 연달아 부딪치는 순간마다 미세하게 일렁이는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알아차리셨군."
그림왈드는 부정하지 않았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요상한 기술이군."
"그러는 그대에게도 요상한 힘이 있지 않소? 피차 간에 숨길 것 없이 꺼내놓음이 어떠할지."
발렌디아르와의 경기에서 잠깐 사용했던 비술을 알아본 모양이다. 어차피 리에론이 아니더라도, 알아볼 자들은 알아보리라 생각했었다. 굳이 숨길 이유도 없는 것이었기에 거리낌은 없었다.
"글쎄. 굳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군."
상대방의 도발에 넘어갈 필요는 없다. 지금 상태에서 길게 이어진다고 해도 군터에게는 나쁠 것이 없었다. 유효한 공격을 넣지 못하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그림왈드 역시 제대로 된 공격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추측하기로, 저 술법은 방어용인 것 같았다.
'그게 아닐 수도 있겠지만.'
그렇기 때문에라도 아직 비술은 사용할 수 없다. 비술을 사용하면 넘치는 힘을 얻지만, 그 힘에는 반동이 따라온다. 몸에 부담을 주는 기술을 사용했다가 그림왈드의 정체 모를 술수에 덜미를 잡힐 수도 있으니까.
뭘 더 숨기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이상, 이전에 쓰러뜨렸던 하수로만 여길 수는 없다. 군터는 지금의 그림왈드를 호적수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호적수를 상대로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고, 그 역시 마땅히 그리 할 것이다.
"그래. 여전히 자신만만하시군."
상대로서 인정했기에 신중해진 것이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림왈드는 그것을 잘못 이해한 것 같았다.
슬쩍 올라가 있던 입 꼬리가 꿈틀대고, 턱 근육이 부풀었다.
"언제까지 여유를 부릴 수 있을지, 어디 한 번 봅시다."
그림왈드가 땅을 박찼다.
움직임에 맞춰 군터도 대응했다. 칸젤로 찌르고, 다른 손의 검으로 상체를 가렸다.
그러나 그림왈드가 뻗은 창 끝에 닿으려던 순간.
"……!"
갑작스레 몸이 굳었다.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무언가가 몸을 움켜쥐는 것 같은 압박감.
그림왈드는 내지른 창을 몸을 낮추며 피해냈고,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다가왔다.
상체를 가리고 있던 검이 움직였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림왈드의 검이 예기를 뿌렸다.
서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