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6화
자만을 한 적은 없었다. 다만 자신은 있었다. 스스로 이룩한 무공에 대한 자부심은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내색을 하든 안 하든 속으로 어느 정도는 품고 있기 마련이다. 군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협공이었지만 어쨌거나 그 이름만으로도 베이고르가 떨었던 대전사 포라칸을 잡았고, 전력은 아니었다지만 제국의 흑포장군 아그니스 체스퍼마저 꺾었다. 군터는 자신이 직접 창칼을 들고 이룬 것들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영주가 눈에 들어온 자들이 몇 있다고 했을 때도 기대가 되기는 했지만,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랬던 생각이 바뀌었다.
카앙!
빠르고 강하다. 막아낸 즉시 반격을 가했으나 거리를 좁혀온 방패에 제대로 뻗지도 못했다. 상대의 몸이 밀려나지만 제대로 힘을 가하지 못해 피해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
조금은 답답한 흐름. 그러나 군터는 이 순간이 즐거웠다.
검과 방패. 이상적인 조합이다. 이 무투회에서 군마의 사용을 불허했음을, 오직 두 다리를 땅에 딛고 벌이는 지상전임을 십분 이용한 무장이다. 창이 최고의 병기인 것은 사실이지만, 마상이 아니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창이 갖는 장점인 거리를 좁힐 수만 있다면, 한 자루 칼과 방패는 적절한 조합이 될 수 있다.
발렌디아르.
상대로 맞서기 전까지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런 그의 실력은 무장의 이점을 감안한다 해도 위글로우에 남아있는 수하들 이상이다. 심지어는 살라스나 할렌보다도 위인 것 같았다. 이런 실력자가 무명(無名)이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을 정도다.
'자만했었군.'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이 나라에 이런 상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누구에게도 내색은 하지 않았었지만, 내심 자신이 베이고르 최고라고 여기며, 다른 모든 무인들을 아래로 내려다보았었다. 그런 그에게 이 발렌디아르라는 자는 그의 검으로, 정말 제대로 일침을 날려 주었다.
부웅!
허공에 한 번 크게 휘두르니 마음이 상쾌해졌다.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상대가 오랜 시간 정을 나눈 친구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훌륭하다.'
방패를 앞세우고 몸을 살짝 낮춘 자세에 빈틈은 없다. 저 상태에서 거리 조절을 하며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러기를 벌써 십여 합.
'방패가 문제군.'
힘으로 찍어 누르려니 저 방패가 걸린다. 어디서 어떻게 익힌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검술보다도 저 원형 방패를 다루는 솜씨가 감탄이 나올 정도다. 게다가 방패는 전부 쇠로 되었는지, 몇 번이나 강한 공격을 맞았음에도 조금 찌그러졌을 뿐 여전히 건재하다.
와아아아아-!
짧지만 격렬한 경기에 관중들의 열기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러나 바깥의 열기와는 정반대로, 경기장 안에 선 두 사내의 분위기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은 뜨거운 몸을 냉정함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후우. 후우."
다소 거칠지만 숨소리가 일정하다. 크게 무리가 없다는 뜻이다. 말인즉, 이대로 계속 이어간다면 상대의 체력이 떨어지거나 저 방패가 완전히 제 몫을 못하게 될 때까지 공방이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다.
질 거라는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그렇게 끝이 난다면 아쉬울 것 같다. 이 자라면,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도 되지 않을까.
두근!
생사는 동전의 앞 뒷면과 같다. 불씨에 바람을 넣어 화기를 키우듯, 사기를 품어 생기를 끓게 하는 것이 그가 고안한 비술의 근간 원리다.
실전에서 사용한 지도 꽤 오래 되었다. 하지만 훈련은 게을리 하지 않았고, 덕분에 마음을 먹으면 단번에 사용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후우.'
잔잔하게 흐르던 물줄기가 갑자기 격류가 되었다. 체내에서 힘이 끓어 넘치니 순간적으로 몸이 다 뻐근해졌다.
그의 기세가 일변한 것을 느꼈는지, 상대가 움찔거렸다. 그러나 감히 먼저 덤벼들지는 못하고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의도한 것이 아닌, 본능적인 움직임이었으리라.
"흡!"
발을 뗀 순간, 그의 몸은 이미 다섯 발자국 앞으로 나가 있었다. 잔뜩 힘을 머금은 칸젤이 도끼처럼 내리 찍었다.
콰앙!
방패가 그것을 막았으나, 몸이 짓눌리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무릎이 꺾이고,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커헉!"
연이어 찌른 검을 그 와중에도 황급히 쳐냈지만 그의 몸은 뒤로 크게 밀렸다. 군터는 기세를 몰아 쉬지 않고 몰아붙였다.
양 손에 쥔 검과 창이 춤을 췄다. 두 팔에서 이어진 신체의 일부인 양, 그 움직임은 더없이 자연스러웠다.
카캉! 쾅!
발렌디아르의 발이 바쁘게 움직였다. 연신 뒷걸음질 치고, 크게 밀려나면서도 그는 이를 악 문 채로 어떻게든 군터의 맹공을 받아내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강철 같이 단단하였으나, 그의 몸은 그러지 못했다.
쾅!
"으윽!"
찌그러진 방패가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그는 아예 두꺼운 줄로 방패에다 자신의 손과 팔을 묶어놓았던 지라 그의 팔까지 덩달아 어깨에서 떨어져 나갈 것처럼 크게 젖혀졌다.
가슴이 훤히 열린 그 순간. 군터의 발차기가 화살처럼 파고 들었다.
"커헉!"
가슴 한복판을 정확히 차인 발렌디아르의 몸이 붕 떠서 튕겨 나갔다. 거칠게 떨어지고 나서도 몇 번이나 바닥을 구르고서야 그는 막힌 숨을 토하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그가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눈앞에는 시퍼런 창날이 번뜩이고 있었다.
와아아아아아-!
사회자가 승자의 이름을 부르고, 관중들이 따라 연호했다. 귀가 떨어지는 것 같은 소음 속에서 발렌디아르는 씁쓸함을 애써 감췄다.
"…졌소. 제기랄."
창을 쥔 거한. 그의 불그스름한 눈이 건조하게 그를 비췄다.
"수고했소. 대단한 실력이군."
"놀리는 거요?"
"진심이오."
창이 거둬지고, 그 자리에 큼직한 손이 들어왔다. 끙! 소리를 내며, 발렌디아르는 그 손을 잡았다. 우악스런 힘이 그를 끌어당겼다.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군. 인간의 힘이 아니야. 술법이오?"
"비슷한 거라고 해두지."
붉어졌던 눈은 어느새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발렌디아르는 아직까지도 감각이 없는 팔을 주물렀다. 다행히도 부러지지는 않은 듯했다.
"코누다이안의 군터 경. 이름은 많이 들었지. 하지만 소문이라는 것이 으레 그러하듯, 어느 정도는 과장이 섞여 있으리라 생각했소."
스스로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는 뒷말은 삼켰다. 자그마한 생채기 하나 못 내놓고, 시종일관 밀리기만 하다가 패해버린 입장에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기가 부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반대였군. 오히려 소문이 실제보다 못했어. 내 나름대로는 솜씨에 자신이 있었건만……. 이렇게 아무것도 못해보고 패하기는 난생 처음이오."
"훌륭한 솜씨였소. 덕분에 간만에 전력을 다했군."
짧은 몇 마디로 서로를 칭찬한 둘은 몸을 돌렸다.
한 사람은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돌아갔고, 한 사람은 비틀거리며 돌아갔다.
와아아아!
당당히 걷는 사내의 위로는 우레와 같은 환호가 뒤따랐다.
*
"장주님 덕분에 영주님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습니다."
"싱거운 소리 마라."
군터를 찾아온 바오룸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그는 군터에게 요 며칠 동안 자신이 본 것들을 쏟아내듯 이야기했다.
"높으신 분들의 은근한 신경전이 쉬지도 않고 이어지더군요. 주로 남작, 자작 정도 되는 분들이 자잘한 말로 상대방의 신경을 건드리는 식입니다. 그러면 또 긁힌 쪽에서도 한 마디 하고, 또 다른 쪽에서 두 세 마디씩 하고. 어린 애들의 말싸움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영주님의 곁이나 지켜라. 그게 네 일이다."
"영주님께서 오늘 하루는 자유롭게 지내라 하셨습니다. 당신께서도 오늘 하루는 푹 쉬시겠다 하셨고요. 아무래도 심적으로 많이 지치신 모양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신경 쓰셔야 할 일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말입니다. 비록 겉핥기 식으로 멀찍이서 일부를 지켜본 것에 불과하나, 그럼에도 제가 느끼기에 높으신 분들의 정치란 것이 여간 살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말이나 하려고 찾아온 것이냐. 영주께서 곱게 보시지 않을 거다."
군터는 바오룸이 그를 찾아온 것이 경솔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완전히 근접 경호를 맡은 것은 아니지만(그것은 친위대의 역할이다), 그래도 영주를 따라다니며 호위를 섰던 바오룸이 하루 휴일을 줬다 하여 곧장 그를 찾아온다면 영주가 어찌 생각하겠는가. 누구라도 불쾌할 수 있는 일이다.
"염려치 마십시오. 영주님의 명을 받고 온 것입니다."
"영주님의 명?"
"하루 정도는 푹 쉬라시더군요. 열중하는 것도 좋지만, 너무 날을 갈면 칼이 부러지기도 한다고 하시면서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군터는 실소를 흘렸다.
아무래도 무투회가 시작된 이후로 줄곧 두문불출하면서 훈련에만 매진하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던 모양이다. 괜한 걱정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염려해주는 마음은 고맙게 받아야 한다.
"그리 하겠다고…아니, 그리 했다고 전해드리거라."
"허면 오늘은 쉬실 겁니까?"
"감시라도 할 생각이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바오룸이 품에서 병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이건 비우셔야 합니다. 제국 남부에서 나는 과실주라더군요. 그리 독하지도 않고 맛이 그리 기가 막힌다고 합니다. 같은 무게의 은보다도 더 비싼 녀석이라더군요. 영주님께서 특별히 내리신 겁니다."
군터는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이, 그날 하루는 영주의 원대로 푹 쉬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에 또 다시 한 경기를 치르고, 손쉽게 승리를 따냈다. 두 번째 경기에서 만났던 발렌디아르에 비하면 싱거운 상대였다.
네 번째 경기도 손쉬웠다. 기합을 넣었던 것이 무색하게도, 발렌디아르와 같은 상대는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단 두 번의 경기만 남은 만큼, 군터는 흐트러지려는 마음을 다잡고 다음 경기를 위해 끝없이 몸을 뜨겁게 지폈다.
"알고 계십니까? 장주님께서 다음 경기에서 상대할 자, 일전의 그 자입니다."
"일전의 그 자?"
"그 왜, 장주님과 구면이었던 리에론 가문의……."
"…그림왈드 말인가."
"예. 그림왈드 경. 그 자입니다."
다섯 번째 경기를 앞두고 바오룸이 반가운 이야기를 전했다.
'그림왈드라.'
얼마나 성취를 이룬 것인지는 몰라도, 이전에도 강했던 그림왈드는 더욱 강해졌다. 때문에 그가 높이 올라올 것이라, 언제고 붙게 될 거라 예상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예상은 현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