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5화
한 사람이 걸었다.
그저 걷고 있을 뿐이지만, 이상한 점이 많았다.
분명 걷고 있지만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나아가는 것이나, 그러면서도 아무런 소리나 기척이 나지 않는 것이나, 사람들의 주변을 스쳐 지나가지만 그 누구도 그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듯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것 등.
보통 사람보다 머리 하나가 더 튀어나오는 장신인 그는 유령처럼 이동해 한 저택으로 들어섰다.
날랜 고양이처럼 뛰어오른 그는 벽을 몇 번 차더니 저택의 꼭대기 층 창문 앞에 내려앉았다.
창문은 열려 있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창문을 넘어 안으로 들어갔다.
"오셨소?"
창 너머 방 안에는 한 사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책상 위에는 뭔지 모를 서류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고, 그 중 일부는 사내의 손에 들려 있었다.
[내가 온 것을 알아차렸나?]
"아니. 단지 방 안의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꼈지."
[감이 좋군.]
"오랜 세월 간첩 일을 하다 보면 저절로 이리 되더이다."
[간첩?]
"뭐, 그런 게 있소. 그보다 어땠소? 뭔가 성과는 있었소? 그 자가 '파편'이더이까?"
[모르겠다. 내 눈으로는 알아볼 수 없었다.]
그 말에 사내, 하이윈즈 백작은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곤 믿을 수 없다는 듯 되물었다.
"정말이오?"
그는 본래 이런 식으로 두 번 묻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는 그가 접하는 대부분의 것들을 이해할 줄 알았다. 한 번에 이해하면 두 번은 필요 없는 법이다. 때문에 지금 그가 되묻는 것은 그만큼 믿기지 않는다는, 믿을 수 없다는 뜻이었다.
[우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놀랍군."
'그'의 인정에 비로소 하이윈즈 백작은 이 믿기지 않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알았다.
잠깐이지만 현실부정을 할 정도로, '그'에 대한 하이윈즈 백작의 믿음은 확고했다. 그에 대해 안다면,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특히나 하이윈즈 백작은 그가 행한 기적과도 같은 일을 직접 목도한 사람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하이윈즈 백작은 잠깐, 눈 앞의 '그'가 어떤 존재인지를 떠올렸다.
지금도 이따금씩 악몽으로 나타나는, 타칸 연합과의 결전.
짐승의 군대를 이끌고 엄습해 오던 대족장, 타르가이 베르겐.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인간의 모습을 집어 던지고 짐승, 아니 괴수가 되었다. 두 팔은 맹수의 그것처럼 변했고, 가로막는 모든 것을 찢어발겼다.
만약 요정왕과 그의 자식들이 앞을 막아서는 것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틀림없이 베이고르는 왕을 잃었을 것이다. 물론 그 옆에 있었던 하이윈즈 백작 자신 역시 무사하지 못했겠지.
폭주하기 시작한 대족장은 그야말로 인세에 나타나서는 안 되는 재앙이었다. 암울한 신화시대가 다시 세상을 집어삼킨 것마냥, 그가 펼쳐내는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자. 요정에게는 이름이 필요 없다 하여 요정왕의 둘째 자식으로만 여겨지고, 불리는 그는 그 살아있는 재앙에 맞선 기적 중에 하나였다.
그가 그의 석검(石劍)으로 대족장의 왼 팔을 잘랐다. 그가 만든 틈으로, 요정왕은 다른 요정들의 것보다 훨씬 거대한 석검을 휘둘러 대족장에게 치명상을 입혀 싸움을 끝냈다.
그때 요정왕이 마지막으로 날렸던 눈부신 일격 역시 더 없이 인상적이었으나, 그보다 더 강렬하게 하이윈즈 백작의 머릿속에 남아 있었던 것은 그 바로 전에 대족장의 왼 팔이 잘려나간 바로 그 장면이었다.
"허면 어찌 하실 생각이오? 그대가 알아보지 못했다면, 다른 이가 와서 확인을 해야 하는 건가?"
[내가 알아보지 못했다면 누가 와도 마찬가지다.]
분명 뜻이 전해져 오는데 말소리는 나지 않는다. 그것이 새삼스레 신기해, 하이윈즈 백작은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핏기 없는 회백색 얼굴에, 얼굴의 반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큼지막한 흉터가 가로지른다. 이목구비가 싹 다 뭉개져도 이상하지 않을 크기인데, 그 흉터는 피부를 파고든 것이 아니라 문신처럼 겉에 남아 있었다.
대족장의 발톱이 남긴 흔적이다. 저 흉터 아닌 흉터를 볼 때마다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이 되살아나는 듯했다.
의식적으로 시선을 돌린 하이윈즈 백작이 그의 답을 기다렸다.
생각에 잠겼었는지, 그의 대답은 조금 늦게 나왔다.
[눈으로만 봐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다른 방식으로 알아보는 수밖에.]
앞 뒤 다 잘라먹은 저 말투. 그런데도 저런 말투가 어울린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요정들은 인간 세상의 통념에 얽매이지 않는다. 그의 저런 말투는 그가 모시는 왕의 앞에서도 똑같았다. 그의 존대(소리로 나오지 않으니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오직 그의 부모이자 왕인 요정왕에게만 적용 되는 것 같았다.
"허면, 내가 어찌 도와야겠소? 전에도 말했지만 거친 방법은 불가하오. 그 군터라는 자는 아국의 관리이며, 코누디스 자작의 총신이요. 해를 끼쳐서는 안 되오."
[이미 늦었다.]
"…뭐요?"
[이미 일전에 칼로 시험을 해본 적이 있다. 직접 한 것은 아니었지만.]
"어찌 그런 일을 상의도 없이!"
하이윈즈 백작이 언성을 높이며 벌떡 일어났다. 그럼에도 '그'는 미동도 않았다. 잘못했다는 인식 자체가 없는 듯했다.
[간단한 시험이었다. 직접 나서지도 않았지. 너희의 규칙을 존중했기 때문이다.]
"끄응!"
그걸 생색이라고 내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마지막 선은 지켰다는 이야기에 하이윈즈 백작은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런 식의 돌발 행동은 삼가 주시오. 우리는 동맹이나, 동맹이라 하여 모든 행위가 다 용납되는 것은 아니오. 당장 우리가 그대들의 산에 아무렇게나 발을 디딘다고 생각해보시오."
[맹약에 의거하여, 발을 디딘 자는 모두 죽을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오. 국법에 의거해, 일전에 그대가 벌였다는 일로 그대를 당장 잡아가둘 수도 있다는 뜻이외다."
[나를 가둘 텐가.]
"악취미로군. 그대가 똑똑하다는 건 내 잘 알고 있소. 괜한 말로 나를 시험하려 들지 마시오."
[두 번에 걸쳐 보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알 수 없었다. 이제는 직접 겪어보는 수밖에 없다.]
"겪어본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거요?"
'그'는 다시 한 번 답을 늦췄다. 그리곤 옅은 초록빛 눈이 하이윈즈 백작을 담았다.
*
막시밀리언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군터는 그가 왕, 그리고 다른 영주들을 만난 일이 잘 풀렸으리라 짐작했다. 어쩌면 생각보다 리에론 쪽에서 날을 세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여간, 그는 기쁜 얼굴로 돌아와서는 군터를 불러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왕의 강권 비슷한 것으로 열린 대회인 만큼 소극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했었는데, 예상외로 다들 칼을 갈았더군. 왕의 바람대로, 이번 무투회는 영주들의 자존심을 건 대리전 양상이 되었어."
"솔직히 말씀 드리면,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랬다. 한 나라를 움직이는 권력자라는 이들이 그깟 자존심 때문에 왕의 장단에 맞추어 준다?
야스메티는 말했다. 왕은, 베이고르는 7황자 쪽에 무력시위를 하기 위해 최대한 몸을 부풀릴 것이라고. 정확히는 그럴지도 모른다 했었나? 어쨌든, 그 말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지금 무투회의 열기가 과열된 것은 단지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닌 것으로 보였다.
"나도 이해하지 못했었네."
"못했었다는 말씀은, 지금은 이해하신다는 겁니까?"
"실리라는 말이 있지? 보통 사람들이 하는 말 있지 않은가? 괜한 자존심은 버리고 실리를 챙기라는 등의."
"그렇지요."
"하지만 이 정도…그러니까, 한 나라의 최고 권력자라는 위치 정도가 되면 자존심이라든지 체면이 곧 실리라네."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하하하. 나 역시 그랬네. 이런 것은 직접 당사자가 되어보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허나 생각해보게 군터. 사람의 욕심은 항상 위를 향한다 하지만, 권세 있는 영주라면 고개를 들어봐야 무엇을 볼 수 있겠나."
"……."
"왕위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이상, 그들이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곳은 극히 제한적이야. 권세가 있다면 재물이야 욕심을 부릴 수도 없을 정도로 썩어 넘칠 테고, 결국 남는 것은 권력 정도인데…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가 더 많은 것을 갖기란 쉬운 일이 아니지. 전국(戰國)이라면 군사를 이끌고 나가 피로써 쟁취하면 된다 쳐도, 그게 아니라면 영지전이라도 벌이지 않는 한 힘든 일이 아니겠는가. 허면 무엇이 남겠나? 자존심이야. 직접 군사를 이끌고, 칼을 들고 부딪칠 수 없는 경쟁자들과 으르렁대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고, 상대보다 더 크게 으르렁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지."
군터가 묘한 표정을 짓자 막시밀리언은 피식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나? 하지만 인간이란 본시 그런 생물일세. 똑같이 두 발로 서고, 코로 숨을 쉬며, 한 입으로 음식을 먹지만, 인간은 나 아닌 다른 인간을 절대 이해하지 못해. 그것이 인간이야. 하물며 나라의 권세를 쥔 권력자들의 생리를, 그들이 아닌 이가 어찌 이해할 수 있겠나. 자네도 지금은 그리 이해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지만, 자네가 직접 당사자였더라면 달리 생각하고 있었을 게야."
"받잡기 버거운 말씀을."
"말이 그렇다는 것이네. 말이."
막시밀리언이 자신의 잔을 채웠다. 군터의 잔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딱 두 번이 비었다. 술 좀 마신다고 해서 몸이 흐트러질 일은 없지만, 다가올 경기를 위해서 적당히 가다듬을 필요는 있다.
이왕 하기로 한 것, 제대로 하기로 마음 먹은 군터였다. 막시밀리언은 그런 그를 이해해주었고, 당연한 말이지만 응원해 주었다.
"어떤가?"
"무슨 말씀이신지."
"처음에는 시큰둥했지 않나. 자네가 그런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나, 내 그 정도 눈치는 있네."
"……."
"배에 기름 낀 자들의 대리전 양상이 되기는 했지만…자기 칼을 쥐고 나온 자들은 저마다 진심일 것이야. 무인으로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명예가 아닌가? 이 나라 최고 무인의 자리가 걸렸으니까. 온 나라가 우승자의 무명을 듣고, 인정하게 되겠지. 욕심이 안 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하지 않나."
"저 역시도…욕심은 납니다. 물론 처음에는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다지 내키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디만. 이왕에 나섰으니 할 수 있는 만큼은 해보자 마음 먹었습니다."
"좋은 자세야. 허나 그리 녹록하지 않을지도 모르네."
"……."
"그도 그럴 것이, 이 나라에서 무공에 자신 있다 하는 자들은 죄다 나온 것이지 않은가. 기회가 없어 무명을 널리 알리지 못했더라도 묵묵히 실력을 기르고 있던 자들이 대거 나섰을 수 있단 말이지."
"눈에 띄는 자들이 있었습니까."
"몇 있더군."
"그렇군요."
"묻지 않는가?"
"여쭈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어차피 실력 있는 자들이라면, 소관이 떨어지지 않는 한은 언젠가는 겨루게 되겠지요."
"하하하. 그도 그렇군."
두 사람은 나란히 잔을 들이켰다.
석 잔 째. 그날 군터가 마신 마지막 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