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4화
"세지모라의 긴도가르 경!"
와아아아아-!
지하에서 듣던 것보다 관중들의 함성이 훨씬 더 컸다. 앞서 있었던 경기들이 그들의 머리에 불을 질러놓은 듯했다.
지하에 있을 때부터 대강 짐작은 했었다. 죄수들의 서로 죽고 죽이는 경기가 있었을 때보다 본 무대가 시작되고 나서 들리는 소리가 훨씬 굉장했었으니까.
"코누다이안의 군터 경!"
와아아아아-!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리고, 관중들이 울부짖었을 때 군터는 그에게 열린 길을 천천히 걸었다. 바람에 불어온 흙먼지가 계단에 묻어 그의 걸음이 찍힐 때마다 작게 흩날렸다.
병사들이 창을 짚고 호위하듯 양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군터의 걸음이 그들을 스칠 때마다 그들의 목젖이 출렁였다.
경기장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 흙이 바람을 타고 코를 스쳤다.
정면. 맞은편에는 먼저 나온 기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세지모라의 긴도가르라고 했던가? 세지모라가 어디에 붙어 있는 영지인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 큰 영지의 기사는 아닌 듯했다.
물론 몸 담고 있는 영지의 크기나, 영주의 작위가 휘하 기사의 실력을 미리 판가름할 근거는 되지 못한다. 하지만.
'긴장했군.'
최대한 안 그런 척 하고 있지만 군터의 눈에는 훤히 보였다.
괜히 발을 조금씩 움직이며 고치는 자세. 미미하게 굳은 것처럼 보이는 몸.
짐작하기로, 그는 이런 무대는 처음이리라. 하긴, 어떤 사람이 이런 경험이 있겠는가. 군인의 검은 즐거움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선후가 바뀌었다면 모를까, 군터 자신과 같이 이런 류의 경험을 한 자는 매우 드물 것이다.
하지만 봐줄 수는 없다. 군터는 이왕 광대가 될 것이라면 최고가 되기로 마음 먹었다. 유치할지 몰라도, 막시밀리언이 그에게 이야기했던 '왕국 최고'라는 말이 가슴을 간질였다.
"시작하시오!"
와아아아아아아-!
시작과 동시에 달렸다. 그의 한 손에는 검이, 다른 한 손에는 칸젤이 들려 있다.
처음 뻗은 것은 검이었다.
쾅!
세지모라의 긴도기르는 번개처럼 뻗은 일 합을 막았다. 하지만 우악스런 힘을 당해내지 못하고 뒤로 크게 튕겨져 땅을 굴렀다. 그 와중에도 검을 쥔 손이 풀리지 않은 것이 칭찬할 만했다.
"커헉!"
몸이 땅에 떨어지고 그의 막힌 숨이 트였다.
그는 바로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어느새 그의 앞에 당도한 군터가 한 발로 그의 검을 짓밟고, 칸젤의 날 끝으로 그의 목을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
경악에 찬 시선과 깊게 가라앉은 눈이 마주쳤다.
말이 나오지 않는 듯, 긴도기르의 입이 몇 번이나 달싹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기도 전에, 뭔가에 홀린 것 같은 사회자의 목소리가 정적을 깼다.
"구, 군터 경의 승리요!"
우…우와아아아아-!
사회자의 목소리 뒤에, 한참 늦은 관중들의 함성이 따랐다.
*
"허어! 상대가 안 되는군."
세지모라 영주의 얼굴이 붉어졌지만 방금 전의 목소리에 반박하지는 않았다. 어찌 반박할 수 있겠는가? 같은 기사끼리 붙었는데 단 일 합 만에 완벽히 승부가 갈렸다면, 거기에 대해 변명하는 것이 오히려 더 수치스런 일이다.
방심했다고 할 수도 없다. 서로 마주본 상태에서 준비를 마쳤고, 경기 시작을 알리는 사회자의 목소리는 두 사람의 귀에 공평하게 들어갔었다. 어디에 방심이 들어갈 여지가 있었는가.
"훌륭합니다. 무공의 고하를 논하기 전에, 힘과 속도에서 너무나 차이가 나는군요."
사이주 옌 제레이스가 탄식 같은 감탄사를 토했다. 주앙 칼 고르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번졌다.
"코누다이안의 군터 경. 그의 무명은 유명하지. 그러고 보니 함께 오지 않았던가?"
"예. 국경을 넘었을 때부터 코누디스 자작님과 함께 움직였었지요. 군터 경과도 몇 번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범상치 않은 무인이란 것은 짐작했습니다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었지요."
거짓이다. 그는 진작부터 군터라는 사내에 대해 알고 있었고, 꽤 호기심을 갖고 있기까지 했다.
'아그니스 체스퍼를 잡았다더니, 요행은 아니었던 거로군.'
제국의 위장(位將)은 황제가 직접 임명한 이들이다. 그런 만큼 그들은 특별하다. 아무리 좋은 가문을 등에 짊어졌든지, 능력이 없다면 자리를 얻지 못한다. 하물며 권세 있는 가문을 두지도 않았다면, 그런 이들이 위장의 자리에 올랐다면 그 능력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아란딜 페레모어가 그랬으며, 아그니스 체스퍼가 그랬다.
그들 두 사람은 젊었을 적부터 무수한 전장을 누볐으며, 숱한 공을 세웠다. 누구도 그들의 과거와 능력을 부정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모두 이 바크렌에서 죽었다. 아란딜 페레모어 같은 경우는 그의 이름값에 걸맞지 못한 비참한 죽음을 맞았지만, 아그니스 체스퍼는 그가 평생 활약했던 전장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래. 지금 저 아래에 있는 바로 저 사내에게 말이다.
와아아아아아-!
그가 다시 계단을 내려가 완전히 모습을 감출 때까지 관중들의 환호는 식을 줄을 몰랐다.
그들에게 무술의 이치를 알아보는 안목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다. 다만 그들은 뭔지는 몰라도, 대단하다는 한 가지는 분명하게 알아보았다. 그들이 목이 아플 정도로 환호하는 데는 그 한 가지면 충분했다. 이제껏 보지 못했던 '파격'은 그들에게 신선한 즐거움을 주었으므로.
"네드시리의 로자리오!"
베이고르 최고의 무인을 가리는 이 경기에 참가한 이들이 백을 훌쩍 넘었다. 치러야 할 경기는 아직도 수두룩하게 남아 있었고, 슬슬 쉬기 시작한 사회자의 목소리에서는 피로가 묻어 나왔다.
"리에스의 그림왈드 경!"
기사가 아닌 네드시리의 무관이 먼저 올라오고, 그 후에 리에스(리에론 가문의 영지)의 기사 그림왈드가 올라왔다.
"호오! 저 그림왈드 경은 범상치 않아 보입니다."
체구에서부터 남달랐고, 분위기 역시 독특했다. 긴장한 구석이 역력한 상대와는 달리, 느긋하게 좌우로 목을 푸는 등 여유가 넘쳐 흘렀다.
"기대하셔도 좋소."
이제껏 십 수 경기들을 보면서도 조용히 있었던 리에론 공작이 입을 열었다.
"공작 각하께서 내신 기사이니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겠지요. 헌데…제 견문이 짧아 그림왈드라는 이름은 처음 듣습니다."
주변 영주의 말에 리에론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오. 아직까지는 무명이니."
말을 꺼냈던 영주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는 이름을 떨치게 될 거요. 어찌 되었든 리에론 가 최고의 무인이니까."
"오오. 그렇습니까?"
"공작 각하께서 그리 말씀을 하실 정도라면, 저 그림왈드 경은 필시 강력한 우승 후보이겠습니다."
리에론을 따르는 영주들이 시끄럽게 떠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어미 새에게 부르짖는 아기 새들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렇게 위에서 시끄럽게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아래에서는 경기가 시작됐다.
*
와아아아아아아-!
시끄럽다. 이전 경기와 명확히 구분이 될 정도로 큰 환호가 터진 것으로 보아, 뭔가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저…군터 경."
"음."
병사의 부름에 군터는 다시 몸을 돌렸다.
오늘 경기는 한 번이다. 경기 도중에 혹 있을 수 있는 부상이나, 피로를 우려해서다. 베이고르 최고의 무인을 가리는 이번 무투회는 최소 보름 일정으로 치러지게 되어 있었다.
"영주님께서는 아직 경기장에 계십니다."
"당연히 그렇겠지."
왕이 거기에 있는데 일개 영주가 먼저 자리를 뜨기라도 했겠는가. 아무래도 이 병사는 조금 머리가 모자란 듯했다. 아니면 쓸데없이 과하게 긴장을 했거나.
'바오룸도 아직 저기에 있겠군.'
그의 빈 자리를 바오룸이 채우고 있다. 영주가 경기장에 있으니 바오룸도 그의 옆에 서 있으리라.
병사들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가는데, 묘하게 거슬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을 스치는 사람들의 시선인가 했지만, 그보다 은밀한 구석이 있었다.
'어디냐.'
다만 주시하는 눈길이 있다는 것은 느꼈지만, 그것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무리 사람이 많은 복잡한 곳에서도, 심지어는 전장에서도 이런 일은 없었기에 조금은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비켜라! 코누다이안의 기사, 군터 경이시다!"
사람이 너무 많아 병사들은 길을 열기 바빴다. 사뭇 위협적인 목소리에 시민들은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텄지만, 그럼에도 나아가는 걸음은 다소 지지부진했다.
군터는 내색하지 않고 그에 맞추어 움직이면서도 느껴지는 시선을 쫓으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어느 방향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고개라도 돌릴 수 있다면 좋으련만, 그랬다가는 눈치 챘다는 것이 들킬까 싶어 눈도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온전히 감각으로만 쫓아야 했다.
'암살자인가?'
가장 먼저 생각난 것은 위글로우에서 겪었던 야습이었다. 이 정도로 자신을 감출 수 있는 이들이라면 암살자 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 대로다. 여기서 손을 쓴다면…직접 칼을 들고 설치지는 못하겠군.'
그렇다면 화살인가. 아니면 인적이 뜸해지는 즈음에서 갑자기 나타나 덮치려 들지도 모른다.
긴장감에 몸에 힘이 들어갔다. 허리춤에 찬 칼 쪽으로 언제든 손을 뻗을 수 있도록 길게 늘어뜨렸다.
'언제냐.'
상대를 특정할 수 없었기에, 군터는 그의 주변을 스치는 모든 이들에게서 주의를 떼지 않았다. 동시에 어느 쪽에서 화살이 날아오든 대응할 수 있도록 몸의 긴장을 유지했다.
그러나 그렇게 날카롭게 곤두선 것이 무색하게, 어딘가에 있을 암살자(들)는 그 어떤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이 넘쳐나는 대로를 지나 비교적 한적한 곳에 접어들고, 그마저 지나쳐 코누디스 저택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다.
'뭐지? 암살자가 아닌가?'
어느 순간인가 시선은 사라졌다. 정말 한 순간이었다. 눈 한 번 깜빡 했을 때 느껴지던 시선은 사라져 있었다.
'뭐에 홀리기라도 한 것 같군.'
암살자였는지 아니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전에 경험한 바 없는, 묘한 경험을 했다. 설령 암살자가 아니었다 해도, 그것만으로도 군터의 경각심은 최고조에 달했다.
'뭔가 있다.'
이곳. 왕도 배나시드에는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