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3화
군터에게 느닷없는 자유 시간이 주어졌다.
물론 위글로우에서부터 왕도까지 쉴 틈 없이 호위를 서며 온 그에게 휴식을 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오직 사흘 뒤에 있을 무투회의 준비를 위해서였다.
"영주님. 소관은 괜찮습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괜찮았다. 무슨 전장을 나간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하는 일이라곤 막시밀리언을 따라다니며 시간을 죽이는 것뿐이다. 그런 일을 사흘이 아니라 한 달 동안 한다 해도 그의 강철 같은 육체는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
"하다 못해 칼이라도 갈고 있게. 이제 내 체면은 자네에게 달렸음이야."
하지만 막시밀리언은 드물게 강권했다. 때문에 무투회에 참가하는 무관들은 호위 임무에서 빠진 채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사흘 뒤를 대비하여 몸을 가다듬었다. 적절한 긴장을 유지하면서 조금이라도 무뎌진 감각을 깨웠다.
군터를 뺀 두 사람은 서로 간단히 대련을 하면서 땀을 흘렸다. 그들은 조심스레 군터에게도 함께 할지를 물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그에게 그런 싱거운 몸풀기는 전혀 의미가 없었다.
챙! 챙!
나름대로 구슬땀을 흘리는 두 무관을 보고 있는데 부족한 점이 적지 않게 눈에 들어왔다. 누구랄 것 없이, 둘 모두 다 빈틈투성이였다.
'누굴 데려와도 저놈들 보다는 나았겠군.'
둘 모두 미트라스의 수하다. 그래도 미트라스가 나름대로 괜찮은 자들로 뽑았을 것인데, 군터의 눈에는 전혀 차지 않았다. 그의 수하 장교들 중 누구를 데려와도 저 둘보다는 나을 것이다. 당장 이번에 왕도로 온 그의 수하들 중에서만 봐도 저들보다 나은 이들이 적지 않다.
'어쩌면 일부러 적당한 놈들로 보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저 둘은 머릿수 채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최정예로 3명을 꾸릴 것이었다면 살라스와 할렌을 데려와야 했다. 군터를 제외하면 그들의 실력이 최고라는 것을 영주도 잘 알고 있으니.
챙!
"흐압!"
칼이 부딪치는 소리. 세차게 내지르는 기합 소리.
눈을 뜨면 꼴사나움에 눈살이 찌푸려지지만, 눈을 감으니 그들이 내는 소리들이 경쾌하게 들렸다. 비록 이성을 마비시키는 살의와 치열함은 없지만 아주 약간은, 전장의 근처에 옮겨온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이다.
"엇. 군터 경."
"간단하게 어울려보지."
의미 없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몸이 근질거렸다.
"함께 와보게."
손에 든 검을 까딱이니 두 사람이 망설임 없이 자세를 취했다. 비록 줄을 대고 있는 쪽은 미트라스이지만, 그들 역시 베이고르의 무관으로서 군터에 대한 존중의 마음은 가지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그들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지경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잘 부탁 드립니다."
군터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
위글로우에도 투기장이 있다. 일전에 영주의 생일을 맞아 급조했던 투기장을 이후에 보수하여 정식으로 경기장으로 만들어 운영했다. 그곳에서는 투기를 비롯하여 각종 시민들의 즐거움을 위한 여러 경기들이 열리곤 했다.
그런 비슷한 경기장이 왕도에도 있었다. 이전에 왕도에 왔을 때 이런 것을 본 기억은 없었으니 만든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인데, 그래서 쉬이 믿기지가 않았다.
와아아아아아아-!
어떻게 이런 괴물 같은 것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만들어질 수 있었는지 말이다.
"왕도에 있는 노예의 반이 투입 되었다고 하더군."
왕도에 노예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저 정도의 건축물을 지으려면, 못해도 수천 명이 매달려야 하지 않았을까?
둥! 둥! 둥!
정오인데도 땅에는 그늘이 크게 졌다. 고개를 위로 최대한 꺾어도 거대한 건축물을 시야에서 치워낼 수가 없었다.
"만 명이 넘는 인원을 수용할 수 있다더군."
"만 명…입니까."
군대처럼 도열시켜놓은 것도 아니고, 관객들을 만 명 이상 들일 수 있을 정도라면 그 규모는 밖에서 보는 것보다 더 크다는 뜻이다.
"이곳이네. 이곳에서 자네가 내일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야."
활약이라.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었다.
광대놀음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지만, 부정적이었던 인식은 상당히 바뀌었다. 진지하기 그지없던 타 영지 무관들의 모습과, 웅장하다는 말이 절로 나오는 거대한 무대를 보니 무언가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를 위해서만이 아니야. 자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해. 내일은 온 나라가 자네를 주시할 게야. 내일 이곳에서 자네가 마지막까지 서 있는다면, 자네는 베이고르 최고의 무인이 되는 것이야. 더할 나위 없는 명예요 영광이 아니겠는가."
명예와 영광이라.
광대놀음에서 그런 단어를 쓴다는 것 자체가 간질거리지만, 어쨌든 듣기에는 썩 좋은 말이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군터는 함께 무투회에 나서는 두 무관, 글라눈과 탈린을 대동하고 일찌감치 경기장 내에 마련된 대기실로 향했다.
"이쪽입니다."
대기실이라고 하지만 넓은 크기는 아니었다. 두 개의 긴 의자에 열 명 정도가 앉으면 꽉 차는 공간. 흡사 감옥처럼 생긴 곳이었는데, 창살의 바깥쪽을 온통 가죽으로 덮고 있었다.
"이봐. 이런 곳에서 기다리라는 건가?"
대기실을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린 탈린이 돌아가려는 병사를 불러 세웠다.
그가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니었다. 대기실이라고 내놓은 곳은 척 보기에도 감옥과 같았으니까. 가죽을 덧대놓기는 했지만 특유의 눅눅함과 미미한 악취는 남아 있었다. 죄를 짓고 갇힌 것도 아닌데 이런 곳에서 대기하라고 하니 화가 날 법도 했다.
"죄송합니다."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야. 죄송하다고만 하지 말고……."
"그쯤 하지."
"군터 경."
일개 병사가 죄송하고 말고 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그가 이곳을 대기실로 삼은 것도 아니고, 그저 명 받는 대로 안내만 할 뿐인데 말이다. 정작 병사에게 명령을 내린, 대기실을 이런 곳으로 잡은 이에게는 제대로 말도 못할 거면서 애꿎은 병사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건 안쓰러운 분풀이에 불과하다.
"우리만 그런 것도 아니지 않나."
다른 영지의 참가자들 또한 같은 처지였다. 시끄러운 목소리들은 여기저기서 들려오고 있었다. 간간이 욕설도 섞여 있는 것 같지만, 그들 역시 결국엔 수긍하게 될 것이다.
"괜한 일로 기운을 빼지 말고 눈이라도 붙이고 있는 것이 좋아."
군터가 이리 말을 하니 두 사람도 더는 열을 낼 수 없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병사를 놓아주고 못마땅한 얼굴로 자리에 앉을 뿐.
와아아아아아-!
관중들의 함성이 지하까지 울렸다.
지금쯤 본 무대에 앞서 시민들의 흥을 돋우기 위한 경기들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함성이 그칠 즈음에 기다림도 끝날 것임은 확실하다.
그때를 기다리며 군터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대단합니다 전하. 이 정도 규모의 경기장은 제국에서도 흔치 않습니다."
"하하. 그렇소? 급조한 것이라 부족한 점이 많소. 내 근래에 들어 이런 투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서 말이오."
"정말 대단하십니다."
7황자의 특사이자 사절단의 책임자인 사이주 옌 제레이스는 왕보다 고작 한 단이 낮은 앞 자리에 앉았다. 두 공작들보다도 더 왕에게 가까운 자리였다.
"대단하기는. 왕이 되어 여흥에만 심취했다 하여 핀잔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지 않겠나."
"예로부터 용맹한 왕들은 평화의 시기에도 치열함을 가까이 했습니다. 새로이 왕조를 일으키시고, 저 거친 야만인들을 굴복시키신 전하가 아니십니까. 그런 전하께서 투기에 관심을 두심은 당연한 일이라 할 수 있지요. 그것을 두고 다른 말을 하는 이들은 보는 눈이 없으며, 생각하는 머리도 없고, 그저 가슴 속에 불충만을 간직한 역신들이 분명할 것이니 엄히 벌하셔야 합니다."
"하하. 자네는 제국의 신하인데도 나의 신하인 것처럼 듣기 좋은 말을 잘도 하는군."
"소신은 자콥 전하의 신하입니다. 양국의 친선을 위해 온 몸인데 전하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지요. 허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방금 소신이 드린 말은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입니다."
"나무란 것이 아니니 너무 정색할 필요 없네. 그나저나…끝났군."
와아아아아!
죄수들의 경기였다. 두 패의 균형을 절묘하게 맞춘 덕에 그야말로 처절한 경기가 펼쳐졌다. 승자는 자유를, 패자는 죽음을 갖는 싸움에서 양 쪽은 모두 있는 힘을 다해 싸웠다. 전장의 축소판 같은 경기에 관중석의 시민들은 열광했다.
국왕 전하 만세!
베이고르 만세!
"시민들이 전하를 찬양합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이 몸을 뒤로 틀었다.
왕은 웃으며 화답했다.
"아직 이르지."
제대로 된 무대는 아직 보여주지도 않았다.
이제까지의 경기들이 피로 사람들을 열광시켰다면, 이제부터는 일반 시민들이 살아오면서 구경도 못해보았을 무공으로 눈을 즐겁게 할 차례다.
"시작하라."
승리한 죄수들이 걸아 나가고 패배한 죄수들은 병사들에 의해 짐짝처럼 끌려 나갔다.
약간의 기다림 후. 한 사내가 몸을 일으켰다.
다른 귀족들과는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관리 몇 명과 함께 자리를 지키고 있던 란도흐 바라누엔 백작이었다.
"배나시드의 시민들이여! 베이고르의 백성들이여!마음껏 즐기도록 하라! 이 자리는 국왕 전하께서 그대들에게 베푸시는 성은이니!"
무지한 시민들 중에는 그의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이들도 있었다. 하지만 옆의, 혹은 가까운 어딘가의 다른 시민이 함성을 질렀을 때 그들은 풀에 불이 옮겨 붙듯이 덩달아 목이 터져라 외쳤다.
국왕 전하 만세!
"죄수들의 시시한 살육전은 끝이다! 이제부터는 베이고르의 명예로운 전사들이 자신들의 솜씨를 뽐낼 것이다! 시민들이여! 그들의 이름을 연호하라! 베이고르의 전사들을 맞이하라!"
*
"세이레의 월더 경! 세이레의 월더 경!"
"내 차례인가!"
관리의 호명에 또 한 명의 기사가 일어났다. 지하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무수한 이들의 함성소리는 여전히 끊이지 않고 있었다.
"으음."
코누다이안의 무관, 글라눈이 초조함을 지우려는 듯 괜히 살짝 몸을 털었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은근히 긴장이 되는군요."
먼저 호명되어 나간 탈린이나 그나, 결코 경험 없는 애송이가 아니었다. 그들은 이전의 전쟁들에서 몇 차례 실전도 겪은 노련한 무인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그들조차도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그 누가, 만 명이 넘는 사람들 앞에서 칼부림을 벌여봤겠는가. 그건 이제껏 본 피의 양과는 상관 없는 이야기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코누다이안의 군터 경!"
차례가 되었음을 알리는 목소리에, 군터는 눈을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