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2화
막시밀리언과 사이주 옌 제레이스가 계단을 오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이들이 속속들이 도착했다. 호위들을 거느리고 온 영주 및 귀족들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계단을 올랐다.
수십이 넘는, 귀족(영주들을 포함한)들이 계단을 오르면서 그들의 호위는 계단 아래에 남겨졌다.
"수백은 되겠군요."
군터는 이번 왕도행에 바오룸을 데려왔다. 본래 그의 부관은 할렌이지만, 지금처럼 위글로우를 비워야 할 때는 믿고 맡길만한 수하를 남겨두고 올 수밖에 없다. 살라스가 있지만 그는 내성 수비대장의 직책을 맡고 있는 만큼, 전처럼 그의 대리인 역할만을 할 수는 없다. 때문에 할렌 밖에는 없었던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데려온 것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바오룸을 데려온 것은 꽤 괜찮은 선택이었다. 그는 그의 배 다른 동생처럼 머리가 좋지는 않았지만 눈치가 있었다.
"만만치 않습니다."
계단을 오르는 것까지 허락을 받지는 못했지만, 대전 앞까지 와서 기다리는 인원은 셋까지 허용 됐다. 각 영주, 귀족들이 대동한 호위들인 그들은 하나같이 출중한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누구 하나가 언성이라도 높이면…당장 칼이라도 뽑을 것 같군요."
설마하니 자신들의 호위를 맡기는 데 어중이떠중이들을 썼을까? 당연히 그럴 리 없다. 부릴 수 있는 수하들 중 최고 실력자들로 꾸렸을 것이다.
"이들도 모두……."
"그렇겠지."
자신들의 주인을 위해 왕의 무투회에 참가하는 이들일 것이다. 군터 자신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말하자면 경쟁자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이들도 알기에 이렇게 가시를 세우거나, 눈을 빛내며 다른 이들을 염탐하는 것일 테고.
"더 이상 떠들지 마라. 되도록 귀찮은 일은 피하고 싶으니."
그리 말을 했지만, 너무 늦어버렸던 것일까.
"이게 누구시오. 군터 경 아니신가?"
뒤에서 들려온 소리에 슬쩍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허나 그러는 도중, 목소리가 정확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다음 순간 고개를 다 돌렸을 때, 낯익은 사내가 다가오고 있음을 보았다.
"그림왈드 경."
체격 좋은 무관(아마도 대부분 기사로 추정되는)들 중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는 거구의 사내가 씩 웃었다.
"기억해주시는군."
"어찌 잊겠는가."
일전에 인사를 나누었을 뿐 아니라, 시원하게 한바탕 붙기까지 했었던 상대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세상에 보기 힘든 천치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반갑게 웃으면서 그간의 이야기라도 나누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이 아쉽구려."
"……."
"오해는 하지 마시오. 그대에게 악감정은 없소. 그대의 비열한 주인에 대해서야 치가 떨릴 지경이지만, 우리 같은 사내들이야 주인들의 손에 쥐인 창칼에 불과하니……."
"말을 조심하는 게 좋을 텐데."
"그대 입장에서는 화가 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지 않은가? 기르던 개가 주인을 물었다는 이야기가 온 나라에 파다하다오. 내 주인께서는 지금도 질녀 분의 꿈을 꾸신다오. 복수를 해달라 피눈물을 흘리며 애원한다 하시더군."
"어찌 말하든 그쪽의 마음이지만, 그 일은 그저 불운한 사고였을 뿐이다."
"그쪽은 그리 말하고 싶겠지. 뭐, 됐소. 재미있지도 않은 이야기는 이쯤 합시다. 간만에 본 얼굴에 아는 체나 하려고 말을 붙인 것이니, 피차 감정을 상할 필요는 없지 않겠소."
"좋을 대로."
몸을 돌리기 전. 그림왈드가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기회가 된다면 곧 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어떻소?"
"뭐가 말인가."
"그대는 코누다이안이 자랑하는 최고의 용사가 아니오. 당연히 이번 무투회에 참여하시겠지?"
"……."
"나 또한 그렇소. 부끄럽지만 공작 각하께 과분한 총애를 받게 되었소이다. 어쩌면 우리가 맞붙을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먼젓번의 빚을 갚아드리겠소."
"흥.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것은 없을 텐데."
"그건 칼을 맞대보기 전에는 모르는 일이 아니오? 그때 이후로 절치부심하여 칼을 갈았으니, 우리가 다시 마주서게 된다면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요. 내 약속하겠소."
"기대하지."
"흐흐. 여전히 오만하군. 하지만 잘 어울려. 그럼, 다시 봅시다."
그림왈드가 자리를 피했지만 분위기는 여전히 살벌했다. 말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은근히 기세를 돋우었던 탓에 주변은 휑했다.
두 사람의 신경전을 떨어져서 지켜보던 무관들은 피부가 저릴 정도로 사나운 기세를 풀풀 풍기는 군터를 긴장한 채 흘겨보았다. 개중에서는 적대 감정을 숨기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아마도 리에론 쪽에 선 이들인 듯했다. 그렇다고 해도 칼을 들고 덤비는 것도 아니고 기껏해야 째려보는 것이 전부이니 별로 신경이 쓰이진 않았다. 그들보다는 그림왈드가 더 신경이 쓰였다.
'확실히…뭔가 변하긴 변했군.'
그들 둘 다 진심으로 기 싸움을 벌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슬쩍 보인 편린만으로도 이전에 비해서 크게 달라졌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의 자신만만한 말이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는 강해졌다. 육체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크게 성장을 한 것은 분명했다. 분명히, 그가 비친 자신감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
"보통 사내가 아닌 것 같습니다."
바오룸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낮췄다.
"보통은 아니지."
"옛?"
"리에론의 칼로서 나선다 하지 않느냐. 보통의 실력을 가지고서 그리 될 수 있었겠느냐."
"음. 그도 그렇군요."
어째 선전포고 비슷한 것을 당한 것 같기는 한데,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렇기는커녕, 오히려 기꺼운 마음이 들었다.
왕의 이름으로 무투회를 열고, 모든 영주 및 귀족들에게 참여를 강제하다시피 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무슨 광대놀음을 벌이려고 그러나 싶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그림왈드를 보고, 그가 이번의 무투회라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여기고 있음을 엿봤다.
여기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약해 보이고 싶지 않은 왕이 광대들을 불러 모아 여는, 여흥 같은 판이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전국의 영주들과 귀족들이 자존심을 걸고 진지하게 임하는 자그마한 전장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대리전이라고 할까.
이 자리에 있는 대다수의 이들이 그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내뿜는 치열함이 다소 느슨하게 늘어져 있던 군터를 일깨웠다.
*
왕도에 있는 코누디스 가문의 저택에 다섯 영주들이 모여들었다. 집의 주인인 막시밀리언을 포함하면 여섯이나 되는 영주들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들은 모두 동부의 영주들이었으며, 막시밀리언이 주도한 동부 연맹의 일원들이었다. 센트리올, 사보스, 젠탄테르, 아힌키우스, 아모트의 영주들이 막시밀리언을 가운데 두고 원탁에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눴다.
군터는 영주들의 회의가 이루어지는 방 안에 들어가지는 않았다. 대신 문 밖에서 입구를 지키고 있었는데, 그의 인간을 뛰어넘은 청력은 두꺼운 벽 너머에서 들리는 말소리들을 듣고 싶지 않아도 뚜렷이 듣게끔 만들었다.
"리에론에서 압력을 가해옵니다."
"직접 손을 쓰지 못하니 으르렁대는 것이오. 그런 유치한 짓거리를 신경 쓸 필요 없습니다."
걱정스레 말하는 한 영주와, 단호하게 답하는 막시밀리언.
막시밀리언은 시종일관 회의를 주도했다. 그는 약한 소리를 하는 이들을 때로는 좋은 말로 다독이거나, 때로는 윽박지르며 이끌었다.
"내 장담컨대 리에론 공작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쁠 겁니다. 우리에게 손을 쓸 여력 따위는 없겠지요."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막시밀리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확신에 차 있었고, 벽 너머에서 꾸준하게 느껴지던 불안감과 동요를 잠재웠다.
'리에론이 그리도 두려운가.'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과 자신의 시야가 같지 않다는 것을 인정했기에, 그들을 한심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높은 곳에서 바라보면 낮은 곳에서 보는 것보다 더 넓게, 멀리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영주가 바라보는 리에론과 일개 무부가 바라보는 리에론에는 차이가 있으리라.
"전하와 말씀 나누신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잘 되었습니다. 서로의 사정을 확실히 이해했고, 앞으로의 일들에 대해 논했소."
막시밀리언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전하께서는 두 공작의 등살에 눌리는 것에 신물이 나신 상태입니다. 우리를 후원하여 리에론을 누를 수 있다면 마다할 분이 아니시지요. 다만, 앞서 말했듯이 왕국의 조정이 두 공작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만큼 전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에도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허면 전하께서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다 하십니까?"
"리에론의 시선을 붙들어 주시고, 동부에서 일어나는 잡음을 못 들은 척 해주실 겁니다."
"자세히 말씀해주십시오."
"구체적인 약조를 해주시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짐작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어인 말씀이신지."
"터놓고 말해서, 전하께서 리에론을 누를 힘을 지니신 것은 아니지요. 허면 답은 간단하지 않습니까. 당신의 힘이 모자란다면 다른 쪽의 힘을 빌려오면 될 일."
"칸디시아렌 공작 쪽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막시밀리언은 답하지 않았다. 아마 고갯짓이나 눈짓으로 답했으리라.
*
왕도는 전에 없이 달아올랐다.
영주들이 이끌고 온 병사들이 도시 바깥에 주둔했고, 왕도 수비대는 전쟁에 나가는 부대처럼 군기를 유지했다.
자칫 시민들이 불안해 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왕도의 거리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로 늘어서서 좌판을 벌린 상인들은 그런 이질감과 불안감조차 느낄 수 없도록 부산스러움을 낳았다.
"뭐랄까…어색하군요."
"무슨 말인가."
"제가 이전의 탄신절에 왕도를 밟아본 적은 없습니다만, 결국 상인들의 목적은 물건을 팔아서 이윤을 남기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런데 결국 수요는 정해져 있을 거란 말이지요. 축제에 들뜬 왕도의 시민들이 아낌없이 지갑을 연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너무 과합니다. 표정도 외각으로 갈수록 상인들의 표정도 그리 밝지 않고요. 누가 보면 끌려 나온 거라 생각할 정도로 말입니다."
"끌려 나왔다라……."
그럴지도 모른다. 이번 탄신절은 왕이 공을 많이 들였다는 것이 여러 군데에서 티가 나고 있었으니. 도시 바깥에 늘어선 병력 외에도 거리의 번성함, 내지는 부산함을 보이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필사적이군.'
생각 없이 걷던 거리가 갑작스레 눈에 들어왔다. 곳곳에서 왕의, 이 나라의 절박함이 엿보이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