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1화
"어찌 생각하나?"
군터는 야스메티를 불러 그가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하고 의견을 물었다.
"첫째로는…왕으로서의 권위를 높이기 위함이겠지요. 명령을 해서 영주들을 따르게 한다는 단순한 행위만으로도 권위는 높아집니다."
"계속해보게."
"둘째는 추측입니다. 틀릴 가능성이 적지 않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갑작스러운 지시가 내려온 것을 보면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인이 며칠 전에 데이븐랏지의 총독이 졸하였다 말씀 드렸던 것을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데이븐랏지의 총독이자 제레이스 가문의 가주이며, 동시에 제국 7황자의 외조부이자 후견인이었던 노인. 그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군터는 그저 그런가 보다 했었다. 대단한 인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쪽과는 별 상관 없는 일이라 여겼던 것이다.
"세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길, 제국의 7황자는 굉장히 호전적인 인물이라 합니다. 그런 자가 제국이 황좌를 둔 내란에 휘말리고 지금이 되기까지 잠잠했던 것은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이해가 되지 않은 일이지요."
"죽었다는 총독이 그 특별한 이유인가?"
"예. 그는 7황자의 후견인임과 동시에 족쇄였습니다.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7황자가 그의 말에는 순순히 따를 수밖에 없었지요. 하지만 이제 그 족쇄가 풀렸으니, 7황자는 본인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지금의 일과 무슨 상관인가?"
"7황자는 황위를 탐합니다. 그가 황위를 얻기 위해서는 경쟁자인 자신의 형제들을 물리쳐야 하고, 황도 리비암을 손에 넣어야 하지요. 그가 이제부터 해야 할 일은 남진인데, 그러자니 그의 입장에서는 걸리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
"아국, 베이고르입니다."
"아국은 7황자와 친선을 도모하지 않았나."
"그랬지요.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그마저도 안 한 것보다는 낫기는 하지만, 친선이라고 해봐야 단순히 말 몇 마디로 맺은 것이 전부가 아닙니까. 7황자의 입장에서는 어찌 되었든 아국의 존재가 거슬릴 수밖에 없겠지요."
"좋아. 그렇다 치고. 계속해보게."
"7황자는 남진을 해야 하고, 그에 앞서 아국과의 관계에 대해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군사를 일으켜 멸할지, 아니면 확고한 동맹으로 관계를 재정립할지를 말이지요."
참 기이하다 싶었다.
어딘가 모자란 게 아닐까 싶은 느릿하고 어눌한 말투로 하는 말이 이토록 귀에 쏙쏙 들어오니 절로 믿음이 간다. 이미 한 번 능력을 확인하여 뭘 해도 신뢰가 생기는 걸까?
"그래서, 왕이 유난을 떠는 게 7황자 쪽의 움직임과 관련이 있다 보는가."
"7황자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아국이 강력하다면 창칼보다는 손을 내밀려 할 것입니다. 그는 남진을 해야 하는데, 아국과 전쟁을 치러서 손해를 보려 하지 않겠지요. 반면에, 아국이 그의 생각보다 약하다 느껴진다면 가차없이 군대를 일으킬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왕실에서 이번 탄신절을 빌미로 위세를 부리려 하는 것이다?"
"탄신절은 아국의 경사입니다. 형식적으로나마 친선 관계를 맺은 7황자 쪽에서도 사절을 보내겠지요. 그들로 하여금 강성한 아국의 모습을 보게 한다면, 그들은 돌아가서 본 것을 그대로 전하겠지요."
"유치하군."
"예?"
"약해 보이지 않으려고 억지로 위세를 부리는 것. 어린 아이들이나 할 법한 짓이 아닌가."
"어린 아이나 어른이나 같은 사람입니다. 나라라는 것은 그런 사람이 모여 만들어지고, 운영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리 생각한다면, 아이들의 골목 싸움이나 나라 간의 싸움이나…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의문이 다 풀리는 느낌이었다. 야스메티를 불러 물어보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하는 일은 잘 되어 가는가?"
정보조직을 꾸리는 일을 말함이다. 야스메티는 시원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아낌 없이 재물을 쏟아 붓고 있으니 안 될 일이 있겠습니까. 정보원들을 행상들로 위장해 전국에 뿌리고 있습니다. 7황자의 영향력 아래 있는 남방 4주에도 뻗고 싶습니다만…그것은 당분간은 쉽지 않을 것 같아 길게 보고 있습니다."
"사실 자네가 정보조직을 꾸려야 한다 했을 때, 굳이 그렇게 해야 할 필요가 있나 생각했었네."
정보원이라고 할 만한 이들은 그 전부터 두고 있었다. 그러나 야스메티가 말하는 정보조직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규모 자체부터가 비할 수 없었으며, 그 역할도 훨씬 치밀했다.
생각하기로, 영지의 일개 기사가 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자기 몸집 만한 칼을 휘두르는 셈이랄까. 영주 정도는 되어야 격이 맞다 싶었다. 하지만.
"말씀 드렸듯, 큰 것을 보지 못하면 작은 것 역시 볼 수 없습니다."
"그래. 그 말에 내가 설득이 된 게지."
확신이 있었다. 야스메티가 하는 말들이, 그가 하는 일들이, 자신을 조금 더 큰 사람으로 만들어줄 것 같다는 확신이.
'좋은 말을 얻었다.'
이 말을 타면 더 빨리, 더 멀리 달려 나아갈 수 있다.
욕심이 아니다. 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신선함이다. 호기심이라고 해야 할까?
'이룰 것은 다 이뤘다 생각했었는데.'
어렸을 적 꿈꿨던 것은 부귀와 영화. 그러나 그것들은 모두 이뤘다. 만족스런 가정까지 꾸렸고, 거슬리게 구는 놈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수롭지는 않다. 말하자면, 앞날에 걱정은 없다.
묘한 허무를 느꼈다. 이제 고작 서른을 넘었고, 육신에는 점점 더 힘이 흐르는데 그것을 어디에 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때문에 그저 영주의 야망에 편승하여, 그가 바라보고 걷는 험로에 동행했다. 그게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이 외견상 보잘것없는 애송이가 새로운 길을 제시하고 있는 듯하다.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 없다. 즐겁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없는 동안에 모든 일을 살라스와 의논하며, 그에게 도움을 주도록 해라."
"그리 하겠습니다."
옹알이 하는 것 같이 어눌한 말이 믿음직스러웠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탄신절이 한 달 앞으로 다가왔다. 이맘때쯤이면 슬슬 출발을 하거나, 그 준비가 막바지에 다다르기라도 해야 하는데 막시밀리언은 평소와 달리 출발을 늦췄다. 7황자 쪽에서 사절단을 보낸다는 소식을 접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지난번과는 다른 대규모 사절단을.
막시밀리언은 그들과 함께 할 생각이었고, 이미 그러기로 합의도 본 상태였다.
"괜찮겠습니까? 다른 눈으로 보는 자들이 있을까 우려가 됩니다."
위벨이 염려를 표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국경을 책임지는 영주가 타국과 친밀한 것 같은 모양새를 비치면 언짢게 보며 의심을 피울 자들이 한 둘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막시밀리언은 위벨의 말을 수긍하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그럴 놈들은 뭘 해도 삐딱하게 볼 놈들이다. 사절단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누군가의 눈에는 유착으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누군가의 눈에는 혹시 모를 움직임을 제어하는 견제로도 보일 수 있지 않겠는가. 타국의 손님에 대한 호송이다. 명분은 충분하지. 걱정할 것 없다."
그런 말로 우려를 일축한 막시밀리언은 7황자의 사절단이 국경 부근까지 이르렀다는 보고를 받자 그제야 병사들을 이끌고 위글로우를 나섰다.
그렇게 국경 쪽으로 움직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절단을 만날 수 있었다. 대규모라는 말에 어울리는, 자그마치 오백이 넘는 사절단이었다. 개중 병사들의 수가 사백 가량이었고, 나머지는 귀족과 관리, 그리고 종을 포함한 그들의 수행원 등이었다.
두 무리가 마주치자 그들 중 책임자로 보이는 젊은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코누디스 자작을 뵙니다."
"반갑소. 그대는?"
"데이븐랏지의 총독 카니에 델 제레이스의 차남, 사이주 옌 제레이스입니다."
"신임 총독의 자제이셨군."
사절단의 우두머리치고는 매우 격이 높다. 관직이 높지는 않지만, 관직보다도 더 우선하는 혈통이 최고위급이다. 제레이스 가문은 한 주의 총독 가문일 뿐 아니라 7황자의 인척이기도 하니, 혈통으로만 봤을 때는 황실의 핏줄인 7황자 일가를 제외하고는 최고인 셈이다.
게다가 신임 총독이며 가주의 차남이니 직계 중의 직계. 무게감으로 따지면 이전에 베이고르의 땅을 밟았던 인사들 중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다.
'이번 사절단의 방문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뜻이군. 그렇다면 역시…….'
막시밀리언이 앞으로 나가 제레이스 가문의 차남과 이야기를 주고 받는 동안, 군터는 병력의 선두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위글로우를 나서기 전에 야스메티가 해주었던 말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사절단을 만나게 되면, 그들의 구성을 살피십시오. 특히 사절단 수뇌부들의 면면을 살펴보시는 것이 좋습니다. 제 예상이 맞는다면 전에 보지 못한 고위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야스메티의 말이 꼭 맞았다. 다른 인물들은 살펴볼 필요도 없이, 제레이스의 차남만 봐도 답이 나온다.
"하하하! 과연 제레이스인가. 왕도까지 가는 길에 내 말동무나 좀 해주시게."
"저야말로 코누디스 자작님을 뵙게 되어 기쁘기 한량 없습니다. 많이 가르쳐주십시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좋아 보였다.
막시밀리언의 지시가 떨어지고, 군터는 병사들을 인솔해 사절단 일행과 합류했다.
*
왕도 배나시드는 활기가 넘쳤다. 외성벽이 어렴풋이 보일 때부터, 성문 바깥으로 길게 늘어진 인파를 통해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야말로 발 디딜 곳이 없을 만큼 붐볐지만, 코누다이안과 7황자의 사절단 무리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통과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성벽 가까이로 다가갔을 때부터 왕도에서 마중을 나온 무리가 그들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성문 앞을 가득 매웠던 인파가 쩍 갈라졌다. 무수한 시선을 받으며 그들은 당당히 왕도에 들어설 수 있었다.
"오신다는 소식을 전하께서 진즉 들으셨습니다. 바로 뵈러 가시지요."
"당연히 그리해야지."
막시밀리언과 사이주 옌 제레이스는 소수의 수하들만 거느리고 왕궁으로 향했다.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뒤를 바짝 따랐다.
"여기서부터 호위는 대동하실 수 없습니다."
군터는 대전의 앞에서 제지를 받았다. 그는 앞으로 팔을 뻗은 무관을 슬쩍 내려다보았다가 막시밀리언을 보았다.
"예서 기다리고 있게."
"예."
계단을 오르는 막시밀리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고 몸을 돌렸다. 무관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들이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방금 전에 앞을 막아 섰던 무관이 위협하듯 팔을 뻗었던 것에 불쾌함을 느꼈었는데, 살짝 기세를 흘려버렸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 바짝 긴장을 하다니.
'애송이들이군.'
십중팔구 제대로 된 실전 경험도 없이, 안전한 곳에서만 칼을 휘둘러본 녀석들일 거다. 몸에 제대로 된 흉터 하나 없다는 데 돈을 걸 수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