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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40화 (340/1,064)

340화

굽혀서는 안 되는 무릎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기회가 찾아온 이후로 사내는 줄곧 그리 생각해왔고, 실천해왔다. 누구에게도 비굴하지 않았고, 항상 그의 눈은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때만큼은 예외다. 그는 거친 사내였지만 경우를 모르는 얼간이나 무뢰한은 아니었다. 자칫 허망하게 무너져버릴 뻔한 자신을 끌어올려준 은인을, 외조부의 마지막 앞에서까지 오만함을 버리지 못할 인물은 아니었다.

'당신이 내게 주었던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 제레미스 가문은 나와 함께 영원한 광명을 누릴 것이니, 그곳에서 지켜보십시오.'

가라앉은 분위기. 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기색은 두 가지로 나뉘었다. 우는 자와 울지 않는 자.

그는 명백히 후자였고, 그에게 다가오는 자들 역시 후자였다.

"전하."

"때가 됐습니다 외숙. 외조부께서는 만류하셨지만, 정말 오래 기다렸다고 생각합니다. 더 이상 끌 이유가 없어요."

"……."

"군주들은 개입하지 않습니다. 보시오. 제국의 내란이 일어나고 벌써 수 년째 그들은 자신들의 영지에 틀어박혀 꼼짝도 않고 있지 않소."

"한 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습니다."

"언약비는 출처도 불분명한 한낱 뜬소문에 불과하오. 난 내 아버지를 압니다. 그런 얼토당토않은 것을 만들어놓을 분이 아니오. 그들은 충성의 맹세를 했고, 그런 만큼 황좌의 주인이 정해지기 전까지는 움직이지 않을 거요."

"신은 그저 전심전력으로 전하를 위할 뿐입니다."

"좋소. 제국 37개 주 중 내 휘하에 있는 것은 고작 4개 주뿐이나, 그들은 완벽히 내게 속해 있소. 눈치를 보며 얕게 발을 담근 전력이 아니란 말이지. 이 기반이라면 충분히 대업을 도모할 수 있소."

"지당한 말씀이십니다. 허나 전하. 본격적으로 남진을 하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지 않겠습니까."

사내가 얼굴을 찡그렸다.

"반군 놈들을 이름인가."

"예. 등 뒤에 불온한 세력을 놔두고 움직일 수는 없습니다. 그들과 은밀한 우호관계를 맺었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보다 확실히 해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외숙이 생각한 바가 있으시오?"

"주앙 칼 고르에게 딸이 하나 있다 들었습니다."

"설마하니…반군 수괴의 여식을 안사람으로 맞으라는 거요?"

사내, 자콥 엘 트라소프가 노골적으로 불만스러움을 드러냈다. 그에 외숙이라 불린 사내가 그를 살살 달랬다.

"대업을 위해서는 때로 자그마한 것 정도는 눈 감고 넘겨야 합니다. 또한 베이고르의 왕이 제 정신이라면 감히 정실의 자리를 탐하겠습니까."

"으음. 일리 있는 말이긴 하나."

"또 듣자 하니 그 왕녀의 미색이 나쁘지 않다 하더군요."

"옛날의 내가 아니오. 그런 얄팍한 감언 따위는 집어치우시오."

"용서하십시오 전하. 소신은 단지 이 일이 그만큼 꼭 필요한 일임을 말씀 드리고 싶었을 뿐이옵니다."

"알겠소. 알겠어. 허나 과연 그 반군, 아니 베이고르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소."

"전하."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으니 끝까지 들으시오."

"……."

"내 알기로 곧 베이고르 왕의 생일이라던데, 그 시기에 맞추어 정식으로 사절단을 보내겠소."

"사절단…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사절단을 통해 놈들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하겠소. 놈들이 나의 동맹으로 적합하다면 외숙의 말을 따를 것이나, 그렇지 않다면 남진하기 전에 놈들을 정리할 것이오."

"으음."

"놈들과 손을 잡는 것은 내게도 작지 않은 부담이오. 아국은 여전히 놈들을 반군으로 여기고 있고, 바크렌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런데 황위의 계승을 주장하는 내가 그들과 손을 잡는다면 다른 이들이 뭐라 하겠소?"

"옳은 말씀이십니다."

"적어도 내가 입게 될 손해 이상의 실리를 챙길 수 없다면, 내가 그들과 손을 잡을 이유는 없소."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허면 소신은 사절단을 준비하겠습니다."

"그리하시오."

*

베이고르에는 세 가지 연례 행사가 있다. 전국의 국민들이 환호해야 하고, 영주, 귀족들이 왕도 배나시드로 직접 가거나 예물을 보내게 만드는 축일.

하나는 옛 베이고르의 건국절이며, 또 다른 하나는 신 베이고르의 재건절. 그리고 마지막 하나는 국왕 주앙 칼 고르의 탄신절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에서 가장 의미가 큰 날은 단연 재건절이다. 망국이 되었다가 다시 일어난 베이고르에게 있어서는 가장 의미가 큰 날이라 할 수 있다.

따지고 보면 재건절이야말로 신생 베이고르의 건국절이라 할 수 있다. 옛 베이고르의 건국절을 챙기는 것은 어찌 보면 나라의 명맥을 잇는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는다.

이러한 재건절 다음으로 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왕의 탄신절이다. 사실 이는 왕가에서 밀어붙이는 것으로, 국왕과 왕실의 권위를 치켜세우기 위함이었다.

이 날은 전국의 영주들과 고위 귀족들은 되도록 왕도로 와 축하연에 참가하기를 왕실에서 은근히 권하고 있었다. 왕실의 이름으로 된 초청장이 몇 달 전부터 수백의 귀족들에게 날아드는 것도 연례행사였다.

"성가신 초대장이 또 왔군."

"왕도로 와달라고 합니까?"

"올해도 어김 없이."

"내키지 않으시면 가지 않으셔도 괜찮지 않습니까? 어차피 우리는 내지(內地)에 있는 한가한 영지들과는 사정이 다릅니다. 왕실에서도 그것을 모르지 않을 겁니다."

인상을 찡그린 막시밀리언이 입을 열기 전에 위벨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알고는 있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가야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올 한 해 동안 정말 많은 일이 있지 않았습니까. 리에론과 척을 졌고, 영주님께서는 동부를 손에 넣으셨습니다."

듣고 있던 막시밀리언이 끼어들었다.

"아직은 아니지."

"곧 그리 되실 것을 만인이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폴사도는 곧 주인이 바뀔 테고, 새로운 커닐레이 백작은 애송이이니 영주님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넉살 좋게 받아 치는 위벨의 말에 막시밀리언이 피식 웃으니 회의장의 분위기가 부드럽게 풀렸다.

"아무튼 계속 하자면, 리에론은 우리를 가만두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든 손을 쓰려 하겠지요. 그리고 우리로서는 아직까지, 그리고 앞으로 얼마간은 그들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맞잡을 손이 필요하지요. 그것이 왕실입니다."

"그건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왕실과 주고 받았습니다. 왕실은 우리에게 조력해주었고, 우리는 왕실이 원하는 일을 모두 해냈지요. 앞으로도 계속해서 손을 놓지 않고 가야 할 터인데, 아마 지금쯤 왕실에서는 미묘한 공기가 돌고 있을 겁니다."

"위벨 경. 미묘하다 하심은?"

"왕실에서 처음 영주님께 손을 내밀었을 때와 여러 가지로 사정이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동부의 일개 영주에 불과했던 영주님께서는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못하는 동부의 맹주가 되셨지요. 왕실로서는 자연히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혹 영주님께서 다른 마음을 먹으실지도 모른다고 말이지요."

"설마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이제껏 영주님께서 왕실에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요."

"의심은 과거에 머무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미래를 향하지요."

한 관리가 끼어들었다.

아마도 아르벤이라는 이름이었을 것이다. 머리가 좋고 일 처리에 실수가 없어 관리들 사이에서 명망이 꽤 있다고 들었다. 위벨도 그와 관계가 좋은 것으로 알고 있었고.

다만 지금 말하는 것을 보니 성격이 상당히 고약한 것 같았다. 굳이 저렇게 말을 어렵게 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흔히 지자(知者)라 하는 이들이 종종 그리하는 것처럼 무지한 자를 놀리며 우월감을 느끼는 부류일지도 모른다.

자신을 조롱하는 말인지도 모르고, 무관은 여전히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그를 위해, 그리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서 위벨이 차분히 풀어 설명해주었다.

"만인의 위에 있는 자는 만인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타박할 거리도 되지 못합니다. 권력자들의 의심은 그가 부리는 권세 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위벨 경의 말씀은, 왕실의 의심을 덜기 위해서라도 영주님께서 왕도로 행차하셔야 한다는 겁니까?"

가셔야 할뿐 아니라, 왕실에 두둑이 예물을 안겨주어 다른 이들이 다 알게 해야지요. 그럼으로써 왕실의 체면을 살려주는 동시에 의심을 불식시켜 관계의 유지뿐 아니라 개선을 도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옳은 말이다."

막시밀리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왕실이 나를 의심하기 전에 나의 충심을 보여야겠구나. 다섯 대의 수레를 준비해라. 그것에 금과 은, 보석을 가득 담아라."

"영주님. 과합니다."

"전혀 과하지 않다. 남아도는 재물을 써서 왕실의 신임을 살 수 있다면 다섯 대가 아니라 열 대 수레를 채워도 아깝지 않아. 넉넉히 준비해라. 누가 봐도 내가 무리를 했다고 생각하게끔 말이다."

회의를 파하고, 막시밀리언은 위벨을 비롯한 세 명의 기사들을 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은밀히 지시를 내렸다.

"이번에 왕도로 가면 은밀히 칸디시아렌 공작과 접촉할 걸세."

미트라스가 우려를 표했다.

"칸디시이렌 공작과 말씀이십니까. 자칫 의심을 살 수 있습니다."

"왕실과의 선을 유지할 테지만, 그렇다고 거기에만 매달릴 수는 없지. 어차피 현재로서는 3파전이야. 그런 와중에 두 공작의 관계는 미묘하지. 겉으로는 왕권에 맞서 신권끼리 연수를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실은 왕보다 서로를 더 경계하고 있어. 칸디시아렌 공작은 왕과 리에론, 둘 중 하나를 누를 수 있다면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것이야. 리에론만 없으면 그의 추종 세력까지 흡수할 수 있다고 여길 테니까."

위벨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일입니다. 칸디시아렌 공작은 영주님과 왕실의 관계를 짐작하고 있을 겁니다. 특히 이번에 왕실에 막대한 예물을 바친 것을 본다면 그 짐작은 확신으로 굳어지겠지요. 양 손에 왕실과 자신을 놓고 저울질을 한다는 것을 바로 눈치챌 겁니다."

"그래도 상관 없네. 속으로야 괘씸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내미는 손을 쳐내지는 못할 테니까. 그는 그런 사람이야. 무섭도록 신중하지. 망국의 잔당이었던 시절에 도망자 생활을 꽤 오래 해서 그런지, 사적인 감정에 앞서 실리를 따질 줄 알아."

"허면, 칸디시아렌 공작 쪽에 건네야 할 재물도 준비해야겠군요."

"그리 거하게 준비할 필요는 없다. 적당히, 성의를 표시하는 정도면 족해."

"예."

"그리고…이번에 왕도로 갈 때는 미트라스와 함께 가겠네. 그리 알고 있게."

"옛."

그러나 이 말은 얼마 후 왕도에서 온 초대장으로 인해 뒤집혔다.

"이거 곤란하게 됐군."

초대장을 읽고서 막시밀리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군터. 아무래도 이번에는 자네가 함께 가줘야 할 것 같네."

"무슨 일입니까?"

막시밀리언이 들고 있던 초대장을 가볍게 흔들었다.

"왕도 제일의 용사를 가린다더군. 국왕전하께서 이름을 걸고 개최하는 무투회가 열린다. 각 영지에서 가문의 이름을 걸고 최소 세 명의 후보를 내라는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 이런 장난을 치는 건지 모르겠어."

여느 때처럼 흘러갈 것만 같았던 국왕 탄신절에 구름이 끼었다. 그것이 흘러가는 흰구름인지, 비를 내릴 먹구름인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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