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9화
영주의 혼사가 치러졌다. 혼담이 나오고 두 달이 채 안 되었을 시기였다.
막시밀리언 코누디스 자작과 젠탄테르 가의 영애 아리안 젠탄테르는 정식으로 부부가 되었다. 영주가 영지 경계까지 마중을 나갔고, 새 부인과 함께 수백 병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위글로우로 돌아왔다.
동원된, 혹은 자발적으로 나온 시민들이 거리를 가득 메우고 영지의 새로운 안주인을 반겼다. 사실 그들이 보고 싶었던 것은 평소에는 그림자도 볼 수 없는 자신들의 주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큰 목소리로 위글로우의 성문을 처음으로 넘은 젠탄테르 가의 여인을 환영해 주었다.
"시민들의 표정이 밝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영주님께서 어찌 영지를 다스려 오셨는지 알 것 같습니다."
"딱딱하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되오. 이제 우리는 부부가 아니오."
"예. 그리하겠습니다."
아리안 젠탄테르, 이제는 아리안 코누디스가 된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조심스러웠다. 멀찍이 선두에서 말을 몰던 군터는 그들 부부의 대화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가 느끼기로, 새로운 영주 부인은 살짝 겁을 먹은 것 같았다. 주눅이 든 것 같기도 했다.
'당연한 일인가.'
새로운 영주 부인의 나이가 얼마라고 했던가. 열 여덟? 열 아홉? 하여간 스물이 채 안 된다고 했다.
일반적으로 보면 어린 나이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많은 나이도 아니다. 그런 그녀가 준비할 시간도 거의 없이 집과 가족을 떠나 혼담이 오가기 전까지는 이름만 알았던 사내와 부부의 연을 맺게 되고 한 번도 와본 적 없는 새로운 땅에서 삶을 이어가게 됐으니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전의 영주부인이었던 카트리나 리에론이 어찌 되었든 불행한 결말을 맞았으니 잘잘못이나 책임을 떠나 꺼림칙한 마음이 들만도 하다.
와아아아아!
영주님 만세!
창을 통해 마차 밖으로 얼굴을 비치며 손을 흔든다. 시민들의 환호가 도시를 울리는 가운데, 병사들을 앞세운 행렬은 외성을 지나 내성으로 향했다.
수비대장 살라스가 일찌감치 병사들을 도열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군터와 눈을 마주친 그는 간단히 목례하며 영주와 새로운 영주부인에게 몸을 낮춰 예를 표했다.
*
늦게까지 이어진 연회자리에서 몸을 빼 집으로 돌아왔는데, 벨리사의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 이유를 짐작한 군터는 몇 마디 말로 그녀를 위로할 생각은 일찌감치 접었다.
그리고 어린 딸 실비에게 어머니에게 가보라 언질을 준 후에 조용히 집무실로 자리를 옮겼다.
모페이브가 종이 몇 장을 겹쳐 들고 그를 따랐다.
"요 한 달 간 지출이 너무 늘었습니다."
야스메티의 활약이다. 그런데 활약을 해도 너무 활약을 해서 이 너그러운 집사의 얼굴에까지 주름을 만들고 말았다.
"지출 내역을 보내지 않았던가?"
"예. 하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라서 말입니다."
"내가 한 말이 있는데 좀스럽게 굴 수는 없지. 그리고 야스메티가 재물을 제법 쓴다고 해도, 그로 인해 내가 곤란해질 정도는 아니지 않은가."
"장주님. 이제껏 제가 장주님이 하시는 일에 반대하거나 의문을 가진 일이 없었습니다만, 이번 만큼은 여쭙겠습니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 할 일입니까?"
"야스메티는 내게 능력을 보였네. 녀석은 똑똑해. 그런 녀석이 필요한 일이라 하니 해보는 것이야."
"헛된 일이었을 경우에는 지금까지 들어간 재물은 물론, 앞으로 들어갈 재물까지 모두 날리는 일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리 되면 야스메티는 내 신뢰를 잃게 되겠지."
"어렵군요. 제가 그래도 장주님을 꽤 오래, 꾸준히 뵈었다고 생각했습니다만 여전히 짐작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으십니다."
"글쎄. 그런가? 잘 모르겠군. 아무튼 야스메티의 일은 그가 알아서 하도록 놔 두게."
"예. 그리 하겠습니다."
"자네가 하고 있는 연구는 잘 되어 가는가? 일전에 작은 성과가 있었다 한 뒤로는 딱히 들은 이야기가 없는 것 같은데."
"하하. 안 그래도 말씀을 올리려 했습니다.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일전에 말씀 올렸던 자그마한 성과에서 한 발 더 나아갔지요."
군터는 모페이브와 함께 지하에 위치한 모페이브의 연구실로 향했다.
"일전에 제가 보여드렸던 것처럼, 온전한 '돌'을 만드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실 온전하다는 말에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기운의 순환구조를 완성했을 뿐, 내장된 기운이 한 번 소모가 되면 다시 회복이 되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말은 그리 해도, 일전에 자랑스러운 얼굴로 연구 성과를 이야기하던 모페이브였다. 잘은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스스로도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갔다는 것이고.
"그래서. 그 막히는 부분에 대해 성과가 있었나?"
"아…조금 다릅니다."
"다르다?"
"기운의 복구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무리 파고 들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인 것 같아 방향을 틀었지요. 제 본래 의도대로 말입니다."
일전에 가볍게 술자리를 가지다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있었다.
모페이브는 집사로서의 책무에 충실했지만 그에 버금가게, 어쩌면 그 이상으로 연구에 매진해왔다. 군터는 그 열의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무엇을 위한 것인지가 문득 궁금해졌었다. 단순히 지식욕, 탐구욕이라고 하기에는 골방에 틀어박혀 몇 년씩이나 몰두하는 그 집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의 물음에 모페이브는 이렇게 답했었다.
"의미를 남기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저는 술사로서 재주를 타고났습니다. 누군가의 눈엔 대단해 보이는 것이겠지만, 실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백 명 중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재주라고 해도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인간이 있고, 술사가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니 저라는 사람은 전혀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보잘것없는 재주를 갈고 닦는다고 해도 얼마나 대단해지겠습니까. 여러 가지 필요에 의해, 술사라는 이들은 더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자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실 저는 꽤 오래 전부터 제게 주어진 이 자그마한 능력이, 오직 사람을 해하기 위함이 아님을 믿고 싶었습니다. 그러니 제가 하고자 하는 일은 증명입니다. 술법이라는 것이, 술사라는 것이 쇠붙이와 다른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당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다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상당히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직은 완전히 안착시키지 못했습니다만."
모페이브가 일전에도 보여주었던 돌을 건넸다.
"뭘 새긴 거지?"
"알아보시는군요."
돌에는 아주 가느다란 줄무늬가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낙서 같이 난잡했으나, 자세히 보면 묘하게 규칙성이 있었다.
"한 번 던져보십시오?"
"던지라고?"
"아, 그러니까…살살 떨어뜨려보십시오. 여기 이 땅바닥에 말입니다."
그가 바라는 대로 들고 있던 돌을 놓았다. 은은한 빛을 발하던 돌이 땅으로 떨어져 내렸다.
"……!"
둔탁한 소리를 내며 튕길 줄 알았던 돌은 지면에 닿을 즈음, 그대로 허공에서 멈춰 섰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에 놀랄 틈은 없었다. 연이어 더욱 놀라운 일이 벌어졌기에.
스으윽-
땅이 일어났다. 바닥을 덮고 있던 흙이 허공에 떠 있는 돌을 덮었다.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르는 게 자연의 섭리일진대, 지금 일어나는 일은 정확히 그 반대였다. 마치 세상이 뒤집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거꾸로 쏟아진, 아니 솟구쳐 오른 흙은 빛나는 돌을 중심으로 뭉쳐 형태를 빚어냈다.
"이게…뭐지?"
아주 자그마한, 사람을 닮은 형상이었다. 단지 그 정밀함이라는 것이, 동전 몇 닢짜리 싸구려 인형처럼 흐릿하고 작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제가 목표로 하는 것은 사람을 대신해 일을 할 수 있는 인형입니다."
"사람을 대신해서 일을 한다? 소처럼 말인가?"
"하하.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릅니다. 소는 인간의 일을 돕지만, 그 역할이 매우 한정적이지요. 제가 만들고자 하는 인형은 보다 정교하고, 더 험한 일까지도 해낼 수 있는 일꾼입니다.
제가 원하는 대로만 된다면, 그 인형들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노동을 대체할 수도 있게 되겠지요. 인간들에게 더 많은 풍요로움을 안겨주게 될 것입니다."
"거창하군. 하지만, 가능한 건가? 소는커녕, 인형이나 대체하지 않을까 싶은데."
우뚝 서 있는 흙 인형은 기껏해야 정강이에나 올까 싶은 크기였다.
"하하. 물론 아직은 어렵지요.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일 겁니다. 하지만 그래도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제 연구가 완성이 되면, 그때는 세상이 저의 이름을 기억하게 되겠지요. 아! 물론 장주님의 존함 역시도."
"자네 이름은 그렇다 치고, 내 이름은 어째서."
"장주님의 아낌 없는 후원이 없었던들 제가 이런 자그마한 성취나마 이루었겠습니까."
"입 발린 소리는 관두게. 아무튼 신기하군. 말은 안 했지만, 난 내심 자네의 연구가 뜬구름을 잡는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네. "
모페이브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는 그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그래. 바뀌었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자네 연구의 완성을 볼 수 있었으면 좋겠군."
"그리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모페이브가 흙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우두커니 서 있기만 하던 흙 인형이 이런저런 동작들을 취하기 시작했다. 걷거나 뛰거나, 앉거나 엎드리거나 하는 동작들은 점 뻣뻣한 감이 있기는 해도 사람과 별 다를 바 없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무엇으로 지었는가?"
"이름…말씀이십니까. 특별히 생각한 것은 없습니다만."
"있어야 하지 않겠나? 세상에 이런 것이 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네. 자네가 처음 만든 것인데, 자네가 이름을 붙여야지. 그래야 추후에 남들이 그 이름으로 부를 것이 아니겠나."
"으음. 그도 그렇군요. 그러면…'골렘'이라 이름 짓겠습니다."
"골렘? 생소하군. 무슨 뜻인가?"
"어린 아이라는 뜻입니다. 이제는 사용하지 않는 언어지요. 의미도 의미이고, 어감이 좋은 듯하여."
"그런가. 괜찮군."
열심히 움직이던 흙 인형, 골렘은 힘이 다했는지 움직임을 멈추더니 곧 무너져 내렸다. 다시 땅으로 흘러내린 흙더미 속에서 빛을 잃은 돌이 뒹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