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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터-336화 (336/1,064)

336화

군터는 막시밀리언의 부름을 받았다. 무슨 일 때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조용하게 오라는 것으로 보아 은밀히 시킬 일이나, 나눌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무슨 일이겠는가?"

영주관저의 하인이 말을 전하고 물러간 후, 군터가 모페이브에게 물었다.

"글쎄요. 내성수비대 재편에 관한 일이 아닐지요?"

"역시 그런가."

생각해보면 그 외에 딱히 은밀히 나누어야 할 이야기 거리는 없다. 내성 수비대는 영주로서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만큼, 그 구성에 개입을 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군터는 할렌과 병사 열 명을 거느리고 움직였다. 사실 혼자 움직이고 싶었으나 바로 얼마 전에 암살 소동을 겪은 만큼 호위를 빼먹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그렇게 영주를 만나러 가서 들은 이야기는 그와 모페이브 등이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예상치도 못했던, 상당히 유쾌하지 않은 이야기.

"내 아들을 볼 때마다 마음이 참 아파.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아이가 어미의 정을 모르고 유모의 품에서만 시간을 보내야 하다니."

엄밀히 말하면 사실이 아니다. 유모의 품에서 보내는 시간이 적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언제든 원한다면 '진짜' 어미의 품에 안길 수 있으리라. 영주 부인마저 사라진 지금 누가 그녀를 눈치 보게 할 수 있겠는가.

"떳떳하게 밖으로 나다니지도 못하는 그녀의 처지도 딱하고 말이네."

이건 진심일 수도 있다. 뭐, 사감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본다면 말 자체는 틀린 말이 아니다.

"안 좋은 시선이나 말들이 많을 겁니다. 안팎으로 말이지요."

"내가 그런 것 따위 신경이나 쓸 것 같나. 어차피 귀족으로서 내 평판이라는 것은 이미 되돌리기에 늦은 길을 걸어왔지. 자네도 알지 않나?"

이 또한 틀린 말은 아니다. 막시밀리언 코누디스라는 이름은 베이고르의 귀족들 사이에서 배신자, 기회주의자로 통했다.

물론 그런 말을 감히 당사자의 앞에서 지껄일 수 있는 자들은 극히 적은 몇 명을 제외하고는 없겠으나, 뒤로는 얼마든지 그런 좋지 않은 이야기들이 돌았다. 막시밀리언은 그것을 잘 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입으로 떠들어대는 놈들은 그것밖에 하지 못하기에 떠드는 것이야. 난 허명을 버리고 실리를 취했지. 이번에도 다르지 않아. 나는 내 아들을 위해서, 그리고 내 아들을 낳아준 여자를 위해서 약간의 불명예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걸세. 바깥에서 무슨 소리들이 오가던 그것은 문제가 아니야. 문제는 자네가 말했듯, 안에서 퍼지는 잡음이지."

"결심이 서셨다면 소관이 무슨 말을 드리겠습니까.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괜찮겠나?"

"무슨 말씀이신지."

"자네와 라일라 사이에는 좋지 않은 기억이 있지 않나."

"이미 오래 지난 일입니다. 또, 당시의 상황은 지금과 달랐지요. 만약, 부인께서 그것을 마음에 두시고 소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계신다 해도 소관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감내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 말 말게. 그녀 역시 이해하고 있을 것이야. 그 정도 분간도 못하는 여인은 아닐세."

막시밀리언이 그리 말했으나, 모를 일이다.

그 당시에도 라일라라는 계집은 상당히 괴이한 계집이었다. 그로부터 제법 긴 세월이 흘렀으나 그때의 그 계집이 어찌 바뀌었을지는 모른다. 무자라는 족속들이 원체 기이한 구석이 많은 이들이니 보통 사람처럼 여길 수는 없으리라.

신경이 쓰이기는 했다. 그러나 별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그 계집이 자신에게 무슨 악감정을 갖고 있든, 해를 끼칠 수는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달갑지 않은 이야기를 끝내고 귀가한 그는 다시 모페이브와 이야기를 나눴고, 같은 결론을 냈다.

"영주님의 독자를 낳았다고 해도, 결국은 노예 출신의 첩실에 불과합니다. 장주님께서 나서지 않으셔도…그녀는 온갖 이들의 비판과 견제에 맞닥뜨리게 될 겁니다."

이는 지극히 상식적인 생각이었다.

그리고 다음날.

영주 관저에서 열린 회의에서 영주는 이야기를 꺼냈다.

"내 갓난 아들이 어미도 없이 유모의 품에 안겨 있다. 내 아들을 위해서라도, 녀석의 어미를 첩으로 들이고자 한다."

"영주님. 허나……."

반대하는 목소리가 끝에 가서 흐려졌다. 허나 입 밖으로 나오지 않은 말이 무슨 내용이었을지는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안다.

신분이 천하다는 것. 그것도 노예라는 것. 영주 관저의 은밀한 곳에 숨어 살다시피 하는 한 여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제 알 만한 이들은 다 알았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라면, 그 뜬소문 같은 이야기를 한 번쯤은 다 접해보았다.

소문의 내용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던 이들도 방금 전에 영주가 한 이야기로 인해 확신을 가졌으리라.

"음."

영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반대의 목소리를 냈던 관리가 움찔하며 눈치를 살폈다. 영주의 시선이 돌아갔다. 그의 시선을 받은 이들마다 눈을 감거나 하는 식으로 시선을 피했지만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는 바뀌지 않았다.

불쾌함. 반발심. 기타 부정적인 감정들이 흘러나왔다.

군터는 그때 나섰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공자님을 위해서 필히 그리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오, 군터 경. 진정 그리 생각하는가?"

이미 다 알고 있었음에도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인 양 반색을 한다. 그 노련한 표정의 변화를 마주하면서 군터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영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공자님께서는 너무도 어리지요. 유모의 품에만 맡겨두는 것은 너무 가혹한 일일 것입니다."

"경의 마음이 곧 나의 마음과 같군."

군터가 나서서 판을 흔들자 관리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못마땅한 기색은 여전했지만, 대놓고 반대를 말하는 목소리는 쑥 들어갔다.

"그럼, 모두들 이의가 없는 것으로 알겠네."

영주는 자신의 의견을 거의 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밀어붙였다. 관리들은 불만을 가졌지만 감히 그것을 겉으로 드러내지는 못한 채 고개를 숙이거나, 돌릴 수밖에 없었다.

후에 이런저런 말들이 나올 것을 당연히 알 터인데도 영주의 표정은 밝았다. 처음 찬성 의견을 낸 후에는 별 다른 말 없이 묵묵히 있던 군터는 그런 그의 표정을 일견하고 다시 눈을 감았다.

*

"말들이 많습니다."

"무슨 말들 말이냐."

살라스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살라스가 그의 집을 찾는 것 자체는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나, 그가 전한 말은 평소와는 달랐다.

"관저 회의에서 나서신 일로, 장주님을 두고 이런 저런 안 좋은 말들이 돌고 있습니다."

"안 좋은 말들?"

"그것이……."

살라스가 망설이는 모습을 보였다.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듯했다.

"괜찮으니 있는 그대로 말해라. 변변찮은 놈들이 날 두고 뭐라 떠들어대더냐."

"음…출신이 천한 자들끼리 통하는 것이 있다느니, 장주님께서 벌써부터 줄을 대고 있다느니 하는 말들입니다. 같은 초원 출신들이라며 묶어서 이야기하기도 하는 모양이더군요."

"흠."

괜찮다고 한 말이 무색하게 화가 치밀었다. 하지만 한 순간이었고, 그 화는 가슴에서 더 뻗어 오르지 못한 채 사라졌다. 그리고 열린 입에서는 노성 대신 실소가 튀어나왔다.

"재미있군."

그런 시선이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다.

지금 베이고르의 관료사회를 이루고 있는 자들 역시 대부분이 제국 출신이다. 고위 귀족층으로 올라가보면 옛 베이고르의 유력자들이 꽤 있지만, 코누다이안에는 그런 자들이 없다.

하여간 이런 제국 출신 관리들은 초원 출신들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을 가지고 있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인간이 징그러운 벌레를 보며 혐오를 느끼듯이, 오랜 시간 동안 초원인들을 보며 야만인이라 욕했던 그들의 관습과 기억으로 인해 깊숙이 새겨진 인식이다.

이제껏 그들은 군터 자신을 보며 그런 혐오감을 일말이라도 느꼈을 것이다. 다만 감히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을 뿐.

막시밀리언이 위글로우의 사령관이 되고, 코누다이안의 영주가 되면서 그러한 인식이라든지 차별을 없애려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아직까지 완전히 효과를 보지는 못한 모양이다. 군부 같은 경우야 함께 땀과 피를 흘리면서 유대감을 쌓아갈 기회라도 있지, 책상 앞에 앉아 일을 보는 관리들은 그럴 기회조차 없으니 말로만 차별하지 말라 우리는 다 같은 베이고르인이며 코누다이안의 시민이다 라고 해봐야 얼마나 효과를 보았겠는가.

어쩌면 지금과 같은 반응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멋대로 떠들게 둬라."

"하오나……."

군터가 피식 웃었다.

"그렇다고 떠들어대는 입들을 죄다 칼로 찢어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느냐."

"…그렇기는 합니다만."

"그보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예? 무엇을 말씀이십니까."

"내가 정말 그 계집과 어떤 교감이라도 나누었다고 생각하느냐. 후계자가 될지도 모를, 갓난아이에게 연줄을 댔다고 생각하느냐."

"아닐 것이라 생각합니다."

망설임 없는 즉답이었다.

"어찌 그리 확신하느냐."

"장주님께서는 그…여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지요."

"단순히 좋고 싫은 이유로?"

"제가 아는 장주님은 욕심이 크지 않으신 분입니다. 모험이나 다름 없는, 내키지도 않는 일을 권력욕 때문에 하실 분은 아니지요."

"정확히 보았다."

"허면 어째서."

"이미 짐작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냐?"

"……."

"짐작하는 이유가 맞을 게다."

살라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영주님께서…부담을 지우시는군요."

"나밖에 목소리를 낼 사람이 없었지."

"그게 다는 아니었을 겁니다."

"무슨 뜻이냐?"

"이번 일로 장주님과 거리를 두는 자들이 명확히 갈리지 않았습니까. 평판…역시 좋지 않아졌고 말입니다."

"…계속해라."

"관리들과 거리가 벌어졌지요. 미트라스 경 쪽에서 이번 일을 구실로 그들에게 더 편히 다가갈 수 있게 되지 않았습니까. 실제로, 오늘 미트라스 경의 집으로 간 고위 관리들이 몇 있었습니다. 아마 집주인의 초대를 받았겠지요."

"이를 영주님께서 의도하셨다, 이 말이냐."

"장주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셨었지요. 영주님께서는 장주님과 미트라스 경을 서로 견제케 하십니다. 일전의 암살자 건으로 장주님께서 득을 보셨으니, 균형이 어그러진 것이 아닙니까."

"……."

"소관의 부족한 사견일 뿐입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두시지는."

"아니. 네 말이 맞다. 그럴 수도 있겠지."

살라스는 괜한 말을 했나 싶어 후회가 들었다.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을 좀 더 다듬지 못하고 바로 내어버렸다. 평소 같지 않은 실수였다.

자책하면서 상관의 기색을 살피는데, 뜻밖에도 그의 상관은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영주에게 약간의 배신감이나, 아니면 서운함 정도는 느낄 법도 한데 말이다. 부족한 사견이라 했지만 살라스는 이번 일이 그의 상관에 대한 영주의 견제라 확신하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고 말고가 있느냐. 내겐 나의 사정이 있듯, 영주님께는 영주로서의 사장이 있는 것이지. 그리고, 어차피 이번 일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그런 놈들과는 어울릴 생각이 애초에 없었다."

그 말을 하는 표정이 너무도 담담하여, 살라스는 차마 진심이시냐고 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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