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화
"경박하다 탓하지 않으신다면, 박수라도 쳐드리고 싶습니다."
"잡스런 소리는 미뤄두고, 할 일이나 하지."
"뭐 좋습니다. 짧게 하지요. 그 자리에 같이 있던 이들을 소환하여 물어도 되겠습니다만…아무래도 경에게 직접 여쭙는 것이 가장 정확하겠다 싶어서 말이지요."
미겔의 말에 군터가 코웃음 쳤다.
"이미 순찰병들을 불러 조사했을 것이 아닌가."
"그렇긴 합니다만…역시 아는 게 없더군요. 기껏 하는 소리라고 해봐야 지독한 놈들이었다느니…칼에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중독되어 죽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들 분이었습니다."
"안타깝군. 내가 할 말도 그게 전부인데 말이네. 그걸로 만족하지 못했다면 내게 들을 이야기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야."
"그래도 다르지 않겠습니까? 겁에 질린 눈으로 본 것과, 냉철한 눈으로 본 것은 같은 것이라 해도 다르지요."
"다른지 아닌지는 자네가 알겠지."
군터는 그날 밤의 일에 대해 생각나는 대로 다 말했다. 늦은 시간까지 업무를 보다 수하 몇과 함께 거리를 지나다, 매복하고 있던 암살자들에게 습격을 받고, 그들을 모두 격퇴하기까지.
미겔은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말 한 번 끊지 않고 중간중간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군요. 먼저 들은 이야기와 크게 다른 점은 없는 것 같습니다. 죽은 놈들의 조사도 조사지만, 지붕 위에 있다가 도망갔다는 그 놈들을 잡는 것이 급선무겠군요."
"못 잡을 거다."
"어째서요?"
"잡을 수 있었다면 진즉 잡았겠지. 지금까지 못 잡았다면, 열흘 뒤라고 잡을 수 있겠는가."
미겔이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습니다. 당일 성문을 빠져나간 자들의 명부를 뒤적거리고 있습니다만…그뿐이지요. 출입을 통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말입니다."
위글로우는 코누다이안의 수도다. 매일 수백, 수천의 인원이 성문을 들어오고 나선다.
그것만 해도 통제가 어려울 사유가 되는데, 심지어 위글로우는 상업도시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많은 상인과 상단들이 오가는 도시다. 동부 물류이동의 중심지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그런 도시가 성문을 닫아걸고 출입을 통제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물론 영주가 원한다면 못할 것은 없지만, 그 뒷감당을 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번 일은 그런 뒷감당을 감수하고서라도 성문을 닫아걸 만큼 중하지 않다. 군터가 크게 다쳤거나 죽었다면 혹시 또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니 일을 크게 만들 필요는 없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한다. 이는 영주인 막시밀리언이 군터와 미리 이야기를 나눈 부분이기도 했다.
"이대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상한 사람도 없는데, 호들갑 떨 필요 없지 않나."
"그렇긴 하지만…죽을 뻔하셨습니다. 칼이며 화살에 발린 독은 그야말로 맹독이었습니다. 저 남쪽 지방에서나 구할 수 있다는 뱀의 독이라 하더군요. 스치기만 해도 위험했을 겁니다."
"부추기는 건가? 내가 더 난리를 쳐주었으면 하는 것 같군."
"그건 아닙니다. 단지 신기해서 그러는 겁니다. 제가 경의 입장이었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칼을 휘둘러댔을 것 같아서 말이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모르겠군."
"켄달과 모엔. 나쁘지는 않지만, 역시 부족하지 않습니까. 어째서 멈추셨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이런 기회가 다시 오리라 보십니까?"
"흠."
무슨 소리를 하나 했더니, 결국 그거였다. 기세를 탄 김에 더 몰아쳐서 미트라스를 압박할 수 있었을 텐데, 왜 두 자리만 날리고 멈췄느냐 하는 것이다. 청인서관 모엔을 쳐낸 것이 그가 아닌 영주이며, 사실 처음에 그가 날렸던 이는 켄달뿐이라는 것을 알면 아쉬워서 땅이라도 치려나.
"난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영주님을 모셨네. 그분께서 제국의 백부장이었던 시절부터 그분을 따랐지."
"……."
"영주께서 날 잘 아시듯, 나도 영주님을 잘 알아. 그분께서는 과욕을 부리는 것을 싫어하시지. 당신께서 그러는 것도, 당신의 수하들이 그러는 것도."
"더 나아갔으면 화를 입을 수도 있었다, 그 말씀이십니까."
"그랬을지도, 아니었을지도."
영주는 의심이 많다. 굳이 그의 심기를 거스를 위험을 범할 필요는 없다. 사실 지금만 해도 아슬아슬하다는 생각이 들던 차다. 미겔의 말처럼 기세를 몰아 더 나갔다면, 당장의 이득은 있었을지언정 훗날의 불안을 떠안게 됐으리라.
"신중하시군요. 전장에서는 그토록 과감하시다더니."
"전장과 정치판은 다르지."
툭 대꾸한 말에 미겔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순간 놀리는 것 같아 불쾌함이 들었으나, 곧 그게 아님을 알았다. 그의 눈이 호기심으로 물든 것을 본 것이다.
"어떻게 다릅니까?"
"전장은 단순하고, 정치판은 복잡하다. 전장에서는 살기 위해서 싸우지만, 정치판에서는 그저 더 가지기 위해서 싸운다."
나름 생각해서 한 말인데 미겔은 고개를 저었다.
"일부는 옳습니다만, 일부는 그릅니다."
"어떻게 그른가?"
"더 얻기 위해서 싸우는 것도 있으나, 잃지 않기 위해 싸우기도 합니다. 내가 탐하지 않아도 상대가 탐하면, 결국 싸울 수밖에 없지요. 권력이란 그런 것입니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지켜야 하고, 지키기 위해서는 싸워야 합니다. 어찌 보면 전장의 이치와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죽지 않기 위해 죽이는 것이 아닙니까."
"그럴지도."
방금 미겔이 한 말처럼 단순한 몇 마디로 정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틀리지 않다고는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알겠습니다. 역시 신중한 것이 좋지요. 제 생각이 짧았던 것 같습니다."
"암살자들에 대해 뭔가 알게 되면 말해주게."
"물론입니다. 그리 하지요."
*
"잘 부탁드립니다 부인."
"알겠어요. 뭐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 내 말은 해보겠습니다."
투실투실한 중년 여인이 굽실거리며 물러났다. 루시는 그런 그녀가 몸을 돌려 시야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풉!"
옆에 서 있던 시녀가 긴 옷소매로 입을 가렸다.
루시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웃기느냐?"
"덩치도 큰 여인네가 반발자국씩 움직이니 그 모양새가 재미있지 않습니까. 마님은 안 그러십니까?"
"나름대로 자기 딴에는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우스울 게 뭐가 있느냐. 그런 시답잖은 말이라 하려거든 내가 사람을 만날 때 너는 나가있거라."
"소, 송구합니다 마님."
마님. 마님이라.
루시는 문득 우스워져 피식 웃었다. 그녀의 기분이 풀렸다고 생각한 것일까, 바싹 고개를 조아렸던 시녀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그러거나 말거나, 루시는 부리는 종에게 신경을 끄고 중년 여인이 놓고 간 자그마한 함을 열었다. 자색 비단으로 곱게 싸인 함은 외견에서부터 고급스러움이 흘렀다.
함이 열리고, 안에 숨어있던 물건이 드러났다.
새의 형상을 한 조각이었다. 자그마한 크기에서 나오는 앙증맞음이 있으면서 동시에 그 크기로 구현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세밀한 묘사로 인해 기품이 죽지 않고 절묘하게 조화를 이뤘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재질이 보기만 해도 눈이 부실 정도로 밝게 빛나는 황금으로 되어 있으니 이 자그마한 새는 그 어디에 내놔도 보물이라 할 수 있었다.
루시가 감탄하며 말했다.
"일개 백부장의 안사람이 어디서 이런 귀물을 구했는지 모르겠구나."
"친가가 상인 집안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상인들은 상행을 다니면서 이따금씩 귀한 물건들을 손에 넣는 경우가 있을 테니, 이 또한 그런 것이 아닐지요."
상인들은 온갖 부를 다룬다. 그들은 진귀한 물건과 재물을 위해서라면 세상 어디든 가는 이들이니, 변변찮은 상인이라 해도 운이 따른다면 이런 보물을 손에 쥘 수도 있으리라.
"이만하면 가보라 할 만한 물건인데, 그런 것을 내게 바치다니. 어지간히도 간절한 모양이구나."
"남편의 나이가 사십이 넘어 오십 줄에 가까워지고 있으니 조급한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마흔 넷이었던가 다섯이었던가.
적은 나이가 아니다. 백부장이라는 지위가 결코 낮은 것은 아니지만, 그래 봐야 수십이 넘는 장교들 중 하나일 뿐이다.
야심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마음에 차지 않는 자리겠으나, 그 이상 올라가는 것은 운이 따르지 않고서는 힘든 일이다.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만큼의 공을 세우거나, 위로 붙잡고 올라갈 수 있는 연줄을 마련하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내실(內室)에 가져다 놓거라."
"예 마님."
이러한 귀물들을 모아놓는 방을 따로 마련했다. 그녀가 본격적으로 '선물'들을 받기 시작하면서부터 마련한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고운 비단이며 화려한 금붙이 등이 방의 삼분지 일 가량을 채우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귀한 물건들 몇 개를 보관하기 위한 용도였으나, 어느 순간부터 그곳은 이따금씩 가서 볼 때마다 마음을 들뜨게 해주는 마법의 방이 되었다.
'백부장이라. 적당히 보직을 옮겨주면 되겠지.'
외성의 순찰대에 속해 있다고 했다. 소속을 내성으로 옮겨주는 정도면 될 것이다.
마침 내성 수비대장의 자리에 살라스가 임명되지 않았던가. 덕분에 그녀의 남편, 할렌은 군터 경의 부관이 되었고 말이다.
새롭게 수비대장에 취임을 했으니 그 밑의 장교들을 일신할 것이 뻔하고, 그 중에 한 자리 정도 따로 빼어놓는 것은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녀의 남편은 군터 경의 휘하들 중 첫째 내지 둘째 손가락에 꼽히는 인사였고, 그녀의 부탁을 거절하는 법이 없었다.
"어머니!"
산뜻한 기분으로 정원을 거니는데 두 사내 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늦었구나."
"공자님께서 말을 타자 하셔서 도시 밖으로 나갔다 왔습니다."
"그랬느냐."
그녀의 두 아들, 그라모트와 로우렌은 종종 군터 경의 아들 보리스 공자와 어울리곤 했다. 그들은 어렸을 때부터 동무로 어울려왔다. 군터 경의 부인이자 그녀의 옛 주인이기도 했던 벨리사는 하나뿐인 아들을 밖으로 돌리는 법이 없었고, 때문에 어린 공자의 친우라고 할 만한 존재는 그녀의 아들 둘뿐이었다.
"공자님께서 다음 번에는 같이 사냥을 하자 하셨습니다."
"글쎄. 부인께서 허락하실지 모르겠구나."
그녀는 아들들의 재잘거림을 들어주며 간간이 맞장구 쳐주었다. 그러면서 공자님을 모시는 데 있어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단단히 일렀다.
'보리스 공자는 군터 경의 유일한 후계자다. 그가 군터 경의 지위를 잇는다면, 그 옆에는 내 두 아들이 있지 않겠는가.'
아직은 가깝지 않은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리 먼 이야기도 아니다. 당장 지금으로부터 10년, 아니 5년만 지나도 보리스 공자는 후계자로서 어떤 관직이든 맡게 될 확률이 높다. 그리 되면 그녀의 두 아들 역시 그의 옆에서 보좌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만 가 보거라. 무술 훈련을 해야 하지 않느냐?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또 아버지께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으으. 아버지께서는 너무하세요. 어떻게 해도 항상 나무라시는 걸요."
"그게 다 너희를 위해서다. 집에서 부족함이 있을 때야 한 번 혼나면 그만이지만, 전장에서 부족함이 있으면 목숨이 위태롭다."
둘째 아들 로우렌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알아요 알아. 아버지가 맨날 하시는 말씀이잖아요."
"알았으면 어서 가서 훈련하거라."
두 아들은 불만스런 얼굴을 하고서도 곧장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버지가 무서운 것도 있고, 그들 자신이 무술에 재미를 붙이고 있는 탓이다.
공부에는 소질도, 흥미도 전혀 없지만 그나마 무술에라도 적성이 있어 다행이었다. 그녀의 남편도 그러하지만, 그녀 역시 한 가지 재주만이라도 있다면 족하다 여겼다. 당장 저 군터 경 역시 칼 재주 하나로 지금의 위치에 오른 것이 아닌가.
"마님. 주인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하인이 전하는 말에 루시가 발걸음을 빨리 했다.
"오셨어요."
"아. 별 일 없었소?"
"별 일이랄 게 뭐가 있겠어요. 아! 아이들이 보리스 공자님과 함께 말을 달렸다고 하더군요."
"잘 됐군. 어린 나이에 갑갑하게 도시 안에만 있는 것도 안 좋아. 바깥 바람도 쐬고 사냥도 다니고 그래야지. 공자님도 그렇고, 애들도 그렇고. 이제 마냥 어린 나이는 아니잖아? 초원에서는 그 나이부터 부족 전사들과 함께 사냥을 다닌다고."
"거기하고 여기하고 같나요."
루시가 슬쩍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할렌은 뭐가 그리 좋은지 껄껄 웃다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애들은? 이 녀석들이 아비가 왔는데 얼굴도 안 보이나?"
"아직 모르는 거죠. 지금 연무장에서 정신 없이 땀을 흘리고 있어요. 당신한테 혼나기 싫어서요."
"흐음. 그래?"
"너무 혼내지만 말고 칭찬도 좀 해주고 그래요. 기가 꺾인다고요."
"쯧! 곱게 자라서 그래. 기가 꺾여? 초원이었으면 기 대신 목이 꺾였을 거야. 적들의 칼은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비껴가지 않는다고."
"다시 말하지만, 거기하고 여기하고 같아요?"
이번에는 루시가 대놓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할렌이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아니,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알았소 알았어. 내 오늘은 심하게 하지 않으리다."
"그래요. 아 참. 살라스 나리 말이에요. 휘하 장교들 인선은 끝나셨대요?"
"응? 아니. 이제 막 시작했을 거요. 잘 해야 한다는 부담이 있으니까. 엄히 가려서 뽑을 모양이던데?"
"흐음. 그래요."
"멍청한 놈들이 이를 단단히 갈고 있거든. 여차하면 물을 뜯을 생각만 머리에 가득하겠지. 그나저나 그건 왜 묻소?"
"아니, 그냥 궁금해서요."
할렌은 더 이상 파고들지 않았다. 사실 공무에 대해 아내의 조언을 듣는 것이 익숙한 그였다.
그는 창칼은 잘 써도 머리를 쓰는 데는 미숙했고, 그의 아내는 제법 머리가 좋은 편이었기에 여러 부분에서 그가 먼저 조언을 구하곤 했다. 그리고 그러한 조언들이 대부분 나쁜 결과를 낳은 적이 없었기에 그는 아내의 말을 꽤나 신뢰하는 편이었다.
"이놈들. 어디 얼마나 하고 있는지 한 번 볼까."
"너무 심하게 하지 말아요."
"알겠소 알겠어. 내 오늘은 다정한 아비가 되어 아들들과 놀아주리다."
옷을 갈아입은 할렌이 씩 웃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낮에는 엄청 덥더니만, 밤이 되니 그래도 선선하네요. 앞으로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이 날씨로 쭉 갔으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