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4화
"내성 수비대장과…청인서관 자리가 비게 되었네."
"청인서관까지 말입니까? 미트라스가 용케도 물러섰군요."
막시밀리언은 코르넬의 말에 피식 웃었다.
"물러설 수밖에 없지. 그렇지 않으면 크게 대일 테니까."
청인서관은 비록 관등(官等)이 높지는 않지만 그 직무의 특성상 요직이라 할 수 있는 자리다. 그 어떤 관직이라도 그들의 천거 없이는 오를 수 없으니, 최종적으로 승인을 내리는 영주를 제외하면 실상 인사를 총괄하는 자리라 해도 무방하다.
그런 자리를 내놓게 되었으니, 지금쯤 미트라스는 속이 많이 쓰릴 것이다.
"이런 덫을 놓다니. 군터 그 친구도 꽤 변했군요."
"굳건한 바위도 바람에 깎이는 법인데, 하물며 사람이 불변하리라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뿐.
"나쁘지 않아. 그 동안 군터는 미트라스의 대항마 역할을 했지만, 그저 서 있기만 했을 뿐 본격적으로 주고 받지는 않았지."
하지만 이제는 달라질 것이다. 구실을 누가 주었던 간에 군터는 미트라스에게 한 방을 날렸고, 이제 미트라스는 이를 갈게 될 것이다.
"내성 수비대장 자리에는 살라스를 앉히고, 청인서관에는…누가 좋을까."
"염두에 두고 계시는 이가 없으십니까."
"누굴 앉히든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어인 말씀을."
"백부장이었던 시절과는 다르다네.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상황이 바뀌면 모든 것이 바뀐다.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는 일이다.
"일전에 말하지 않았나. 높이 오를수록 발 디딜 곳은 점점 줄어든다고."
시선을 나란히 하는 이들이 사라진다. 이전에는 그저 내려보면 그만이었던 것이 점차 까마득하게 변해간다. 그에 따라 내려보는 일도 줄어들거나, 사라진다.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 스스로 이리 될 줄 알면서도 계속해서 오르고 올랐으니, 자연히 그 대가를 치르는 셈이다.
"미트라스 쪽과 선이 닿지 않는, 되도록 척을 진 이들 중에서 한 명 추리게. 힘을 실어줘야 한다면 군터 쪽이 더 낫겠지."
"예."
막시밀리언이 몸을 일으켰다.
"어디로 가십니까."
"아들 놈 얼굴을 보고 싶군."
"하오나 곧 회의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야."
막시밀리언은 붙드는 말을 일축하고 자리를 떴다. 근래에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
쾅!
"말해보시오! 내가 이걸 대체 어찌 받아들여야 하오?!"
"진정하시오. 미트라스 경의 앞에서 이 무슨 무례요?"
"무례? 맞소. 무례지. 허나 생각해보시오! 그대가 내 입장이 되어보란 말이오! 내가 지금 예를 따지게 생겼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씩씩거리는 중년인. 미트라스는 그를 나무라는 대신 눈을 감았다.
"다닐로프 공의 심정을 이해하오. 나를 탓하는 것으로 공의 노여움이 조금이라도 가신다면 내 얼마든지 들어드리리다."
"그런 말은 필요 없소이다! 내가 듣고 싶은 건, 어째서 내 아들이 느닷없이 파직되었어야 했는지요!"
켄달과 같이 파직된 청인서관 모엔은 다닐로프의 아들이었다. 그것도 장남. 장차 그의 가문을 이어받아 꾸려갈 후계자였다.
그런 그가 한 순간에 불명예스럽게 직위를 잃었으니 아비인 그가 이렇게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에는 좋은 말만 하며, 미트라스와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피하던 그가 이렇게 도끼눈을 하고 노발대발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고.
"영주의 뜻이었소."
"아무리 영주의 뜻이었다 해도, 그걸 가만히 보고만 계셨소? 생각해보시오! 켄달 공의 천거는 확실히 내 아들이 했으나, 그것은 독단이 아닌 우리 모두의 뜻을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소. 아니 그렇소이까!"
누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다닐로프가 외치는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켄달에게 돌아갔던 자리는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정한 것이었으며, 모엔이 한 일이라고는 이 자리에서 결정된 일을 글로 써서 올린 것밖에 없었다.
"진정하시오 다닐로프 공. 그대의 말이 옳음은 여기 모두가 다 알고 있소. 허나 그대도 알고 있지 않소? 명분을 얻은 영주가 뜻을 굳힌다면 어찌 거스를 수 있겠소? 그것은 미트라스 경이라 해도 불가한 일이오. 우리가 아들의 일로 경의 마음이 크게 상한 것은 이해하나, 그대 역시 미트라스 경의 사정을 이해하셔야 하오."
"……."
눈을 질끈 감은 다닐로프가 크게 심호흡을 하며 자리에 앉았다.
"…좋소. 이제 어찌 해야 하겠소?"
"이미 일이 벌어졌는데 무엇을 할 수 있겠소."
나직한 미트라스의 말에 다닐로프가 다시 눈을 치떴다.
"허면 이대로 그냥 당하고 끝내잔 말이오?!"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되오. 무모한 짓은 삼가시오. 애당초, 대로에서 암살자를 부린다는 얼토당토않은 일만 없었다면 이렇게 몰릴 이유도 없었소이다."
"끄응!"
"그런 의미에서 내 여기 모인 여러분께 묻겠소."
미트라스가 자리에 앉은 이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이번 일. 여기 계신 분들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겠지요?"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부정했다. 그럴 리 있겠냐며 말이다. 그러나 미트라스는 그들을 쉽게 놔주지 않았다.
"혹여 계시다면, 지금 말씀을 해주셔야 하오. 이미 조사가 진행 중에 있는 것을 다들 아실 거요. 암살자들의 신원을 파악하고 있지요. 나중에라도 흠을 잡히는 일이 생겨서는 안 되오. 켄달 공이 낭패를 보았고, 다닐로프 공은 억울하게 얽혀 들어갔소. 이 이상은 곤란하다는 말이오."
"미트라스 경. 너무 닦달하지 마시지요. 경도 아시잖습니까. 이번 일은 저쪽에서 꾸민 것일 겁니다. 우리가 너무 마음을 놓은 것이지요. 그 무식한 무부 놈에게 이런 잔머리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맞습니다!"
"반드시 되갚아줘야지요!"
자작극?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우리는 크게 한 번 물렸소. 더 이상 틈을 보여서는 결코 아니 되오. 모두 행실에 유의하시고, 혹시라도 트집을 잡힐 일은…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권할 수는 있으나 강제할 수는 없다. 대표이나 주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트라스는 지금 이 순간, 저마다의 생각을 하고 있을 이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더 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지금은 이 정도다.'
그는 여전히 불만에 가득 찬 다닐로프의 얼굴을 보며, 후에 자리를 따로 마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제겐 너무나 과분한 자리입니다."
"너 말고는 없다."
군터는 극구 사양하려는 살라스에게 강권했다. 칼을 뽑을 때처럼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그에게 살라스도 끝내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살라스님. 언제 한 번 미트라스 놈이 움직일 때 성문을 닫아걸어주십시오. 그 놈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꼭 한 번 보고 싶습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씀은 하지 마십시오. 그랬다가는 정말 큰 일 납니다."
글쎄. 정말 농이었을까? 할렌은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군터와 살라스는 피식 웃었다.
"그건 그렇고, 어찌 생각하십니까?"
"뭘 말이냐."
"암살자 놈들 말입니다. 정말 미트라스 쪽에서 보낸 것일까요?"
"글쎄."
어떨까. 처음에는 미트라스가 유력하다고 생각했었지만, 머리가 조금 식은 다음에 다시 생각을 해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았다.
미트라스는 신중한 자로, 되도록 위험부담을 지지 않으려 한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껄끄러운, 잠재적이거나 당장 실재하는 정적이겠으나 그것이 자신의 목을 노릴 만한 이유는 되지 못한다. 성공하더라도 크게 얻을 것이 없고, 반면 실패할 경우에는 잃을 것이 많으니까.
'아마 그쪽에서 벌인 일이라면, 미트라스가 아닌 그 밑에 놈 중에 하나가 주도한 것이겠지.'
미트라스의 세력은 한 마디로 '유지 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 그 중에 가장 힘이 있는 이가 미트라스이기에 그가 대표가 된 것이지, 그 연합에 속한 이들이 전부 미트라스의 수하인 것이 아니다. 모르긴 몰라도, 한 세력 안에 속해있으면서도 미트라스를 고깝게 여기는 자들이 없지 않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지."
"호위를 더 강화해야겠습니다. 어떤 놈들인지는 모르지만…한 번 이렇게 일을 벌였으니 두 번 못 저지르란 법이 없지 않습니까."
"그 말도 옳지만, 애초에 일을 벌이지 못하도록 해야지.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그쪽에서도 같은 이유로 이쪽을 물어뜯을 테니까."
내성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켄달이 자리를 잃었다. 살라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없다.
"검문과 순찰을 철저히 하겠습니다."
"네가 알아서 잘 할 것이라 믿는다."
시종일관 화기애애한 자리였다. 살라스의 영전을 축하하는 말들이 반이었고, 미트라스 측을 씹어대는 말이 또 반이었다.
군터는 혹 섭섭해 하는 이들이 있을까 싶어 은밀히 수하들의 기색을 살폈지만, 웃지 않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 웃음이 진심인지 가식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시샘하는 자는 없어 보였다.
살라스를 인정하는 것은 군터만이 아니었다. 살라스는 젊지만 실력 있는 군인이었고, 인품 역시 남에게 험담을 듣지 않을 정도로 뛰어났다. 그런데다 오랜 시간 군터와 함께 하였으니, 그가 군터 진영의 2인자임을 부인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좋은 자리가 났다면, 그 자리는 살라스에게 돌아가는 것이 옳다. 허나 머리로는 알아도 가슴으로는 인정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라, 질시하는 이가 있을까 싶었는데…아무래도 괜한 염려였던 모양이다.
"장주님."
"음?"
한창 분위기가 무르익어가는데, 모페이브가 조용하게 다가왔다.
"미겔 공에게서 전갈이 왔습니다."
"…뭐라던가?"
"뵙기를 청하더군요."
"당장 말인가?"
"아닙니다.편하신 때에 감찰대 본부로 와주시길 바란다 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던가?"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이번 일에 대한 조사 건이 아니겠습니까?"
"알겠다. 조만간 내가 찾아가겠다 전하게."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