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2화
포로로 잡은 암살자들은 총 여덟. 그 중에 셋이 심문도 하기 전에 숨을 거뒀고, 살아남은 이들 중 그나마 상태가 멀쩡한 둘을 대상으로 심문을 진행했다. 휘하 병사들 중 고문 기술을 익힌 자를 투입했고, 할렌으로 하여금 참관하게 했다.
그러나 군터는 고문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얻지 못할 거다."
"그래도 상관 없습니다."
바오룸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무슨 뜻이지?"
"중요한 건 명분을 쥐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명분?"
듣고만 있던 살라스가 입을 떼었다.
"정치적으로 이용하자는 건가?"
"짐작하셨군요. 맞습니다. 호기가 아닙니까?"
"영주님께서 판단하실 일이다."
살라스가 책망하듯 말했다.
"물론 그렇지요. 허나 다른 것도 아니라 암살 시도가 아닙니까. 설령 이 시점에, 장주님께서 조금 감정적으로 구신다 해서 크게 책을 잡히겠습니까?"
"암살자들을 미트라스 경 쪽에서 보냈다는 증거도 없다."
"증거는 없지만, 정황이 있지 않습니까."
살라스와 바오룸이 언쟁을 벌이는 동안, 군터는 뒤늦게나마 바오룸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눈치챌 수 있었다.
"이번 일을 빌미로 해서 미트라스 쪽을 치자는 건가?"
"좋은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미트라스 경은 위글로우의 유지입니다. 그는 위글로우 유지들의 대표나 마찬가지이며, 따라서 그를 따르는 무리들은 하나하나 모두 뿌리가 깊습니다. 이런 때가 아니면 그들의 세력을 깎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마 이 일은 영주님께서도 좋아하실 겁니다."
"허면 영주께 아뢰고 진행해도 되지 않겠나."
"그러면 늦습니다. 시가지 한복판에서 벌어진 일입니다. 순찰대의 입을 막았다고는 해도 얼마나 숨겨지겠습니까? 시간을 지체했다가 일을 벌인다면 저쪽에서도 필히 의심할 겁니다."
"의심할 것이다?"
"물론 저들도 짐작은 하겠지요. 하지만 막연하게 짐작만 하는 것과 구체적으로 의심을 품는 것은 다릅니다. 요는, 최대한 빌미를 주지 않게끔 피해자로서 연극을 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연극이라."
"장주님께서는 암살자들에게 목숨을 잃으실 뻔한 겁니다. 암살자들을 모질게 고문한 끝에 실마리를 얻게 되어 머리 끝까지 화가 나신 상태로 들이치시는 거지요. 그리하면 이 일은 내일 아침이면 위글로우 전체에 모르는 일이 없게 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미트라스 경이라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살라스가 끼어들었다.
"깨끗하지 못한 모략입니다. 바오룸의 말처럼 위글로우의 모두가 알게 되겠지만, 머지 않아 그것이 모략이었음도 알게 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암살 시도는 진짜였다는 것이며, 그때가 되면 적어도 미트라스 경의 한쪽 팔은 잘려 있을 거라는 겁니다."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군."
"장주님."
군터는 손을 들어 살라스의 말을 막았다.
"살라스. 확실히 네 말이 맞다. 증거는 없지. 하지만 수십의 암살자가 내 목을 노렸던 것은 사실이지."
군터의 목소리에는 은은한 노기가 섞였다. 흉포한 기세가 뻗어나오니 모든 무관들이 입을 다물고 그의 눈치를 살폈다.
"누군가 어둠 속에 숨어서 내 목을 노렸단 말이다."
살라스도, 바오룸도 낯빛을 굳혔다. 그만큼 지금 군터가 발하고 있는 기세는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이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군터는 정말로 분노하고 있었다. 자기 목숨을 위협받고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이 있을 리 없겠지만, 군터의 분노는 단순히 목숨이 위협받았다는 생물로서의 두려움에 기인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 일을 위협이 아닌 도전으로 받아들였다. 정면에서는 칼을 들 수 없는 것, 혹은 것들이 비열하게 숨어서 칼을 찔러온 것이다.
살라스의 말처럼 증거는 없다. 할렌이 결과를 가져올 때까지 조금 더 기다려봐야겠지만 아마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심증은 있다.
그의 목을 노릴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수십이나 되는 암살자들이 위글로우 내에서, 그것도 시가지 한복판에서 날뛸 정도면 무언가 믿는 구석도 있었을 것이고. 그러니 가장 유력한 배후는 미트라스가 될 수밖에 없다.
*
잠시 후에 할렌이 찌푸린 얼굴로 돌아왔다. 그는 돌아오자마자 면목 없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리곤 곧바로 변명하듯 말을 쏟아냈다.
"지독한 놈들입니다. 완전히 맛이 간 것 같습니다."
군터는 그를 타박할 생각은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이라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으니까.
"고문이 소용이 없었던 모양이군."
"그것이…완전히 백치가 된 것 같습니다. 말을 해도 알아듣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니……."
"백치라."
생각에 잠긴 듯 의자 손잡이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말 한 마디도 못하고, 비명도 짐승들처럼 괴상하게 질러대더군요. 완전히 여기가 어떻게 된 것 같아 보였습니다."
할렌이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렇단 말이지. 그렇다면 별 수 없군."
"허면."
"얻을 것도 없는 놈들을 붙들고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죽여라."
"곧 영주님께서 찾으시지 않겠습니까."
할렌이 우려를 표했다. 그러자 바오룸이 말했다.
"핑계야 대기 마련이지요."
"그게 무슨 소리지?"
"고문을 하기도 전에 자결을 해버렸다든지, 뭐 이야기야 만들면 그만입니다."
"뭘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나. 그냥 있는 대로 보여도 될 텐데."
"알아낸 것은 없지만, 정황이야 있지 않습니까. 장주님을 노릴 만한 간 큰 자가 흔하지는 않으니까요. 이건 기회입니다."
"기회라니?"
바오룸이 할렌에게 그가 오기 전까지 나눈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설명했다.
할렌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좋아. 대강 이해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움직여야 하지? 설마 미트라스의 집을 들이친다거나, 뭐 그런 것은 아니겠지?"
"그럴 리 있겠습니까. 아무리 증거가 있다고 해도 그건 무리지요. 이런 일로 들이치기에 미트라스 ㄱ…아니, 미트라스는 너무 거물입니다. 그 수족 정도면 족하겠지요. 그래야만 합니다."
무의식 중에 '경'을 붙이려던 바오룸이 말을 고쳤다. 지금부터는 대놓고 미트라스를 적으로 규정하겠다는 의미였다.
할렌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군터가 몸을 일으켰다.
"직접 움직이시렵니까? 이번 일은 제게 맡겨주십시오."
살라스가 만류하며 일어섰다. 불과 조금 전에 수십의 암살자들과 맞서 싸운 그가 아닌가.
"괜찮다. 내 목숨이 노려졌는데, 내가 직접 흥분해서 움직여야 설득력이 있지 않겠느냐. 그렇지?"
겉으로 보여주기도 그렇고, 속으로도 화가 끓어 직접 움직이지 않고는 성이 풀릴 것 같지 않았다.
바오룸이 일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으음. 허면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것까지 물릴 생각은 없었다. 사실, 화가 나서 들이친다면 부하들까지 다 끌고 가는 것이 그럴듯해 보이지 않겠나.
"목표는 정해진 겁니까?"
할렌이 물었다. 그러자 이번에도 바오룸이 대신 답했다.
"내성 수비대장 켄달입니다."
"켄달? 켄달이라. 확실히 그 놈이라면……."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아는 자였다. 그는 미트라스의 측근 중 한 명으로, 위글로우의 유지 가문 출신이며 거만함과 사치로 유명했다.
군터 일파에 속한 이들과도 몇 번 사소한 마찰을 일으킨 적이 있는 자였고, 할렌도 그 중 하나였다. 급하게 내성으로 들어올 일이 있어 말을 달렸는데 그가 성문을 닫아 걸고 제지하여 시간을 지체시킨 일이 한 번 있었다.
그 때문에 할렌이 욕지거리를 하며 검을 뽑으려고 하기까지 했으니, 아직까지도 묵은 감정이 없지 않았다.
"그런데…정말 이거 괜찮은 건지."
하지만 개인적인 감정은 감정이고, 이건 이거였다. 할렌은 이렇게까지 해도 될까 의문이 들었다. 약간의 걱정도 함께.
암살시도가 있었다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별 피해도 없었다. 뒤늦게 합류한 순찰대 병사들 몇이 죽기는 했지만, 그것을 가지고 미트라스를 쳐도 되는 것일까? 게다가 켄달은 미트라스의 후광이 아니라도 그 개인의 위세가 작지 않은 자였다.
"당하고서 가만히 있으면 놈들이 나를 우습게 보겠지."
"그렇긴 합니다만……."
"죽이지는 않는다. 가만히 당하고만 있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일 뿐이다."
결정을 내린 군터는 즉각 움직였다. 바오룸의 말처럼, 되도록 빠르게 움직여야 그의 행동이 조금의 설득력이라도 더 갖는다.
"동시에 영주님께도 사람을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리 해라."
이번 일로 바오룸에 대한 인상이 바뀌었다. 급한 성미를 고쳤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머리를 쓸 줄 아는지는 몰랐었다.
'좋군.'
유능한 수하가 생긴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특히나 머리를 쓸 줄 아는 수하는 더 그렇다.
그의 밑에는 창칼을 잘 다루는 이들은 넘쳐났지만 이렇게 머리를 쓸 줄 아는 이는 극히 드물었다. 이제까지는 살라스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하나 더 생긴 모양이다. 그리고 이 머리는 그늘진 생각도 할 줄 아는 머리인 것 같다.
"암살자들의 수급을 준비해라."
"수급 말씀이십니까? 수급은 어째서……."
"켄달의 앞에 던져줄 생각이다."
군터의 입매가 흉측하게 비틀렸다.
*
"이, 이러시면 안 됩……."
콰앙!
막아서던 병사들이 문을 박살내며 나가 떨어졌다.
곧 저택을 지키던 병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군터는 박살이 난 문 앞에서 가만히 그들을 기다렸다.
"구, 군터 경?!"
그렇게 몰려나온 이들 중에는 군터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도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짓입니까!"
"개에겐 할 말이 없다. 네 주인을 데려와라. 지금 당장."
굳이 그런 말을 할 것도 없었다. 병사들이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켄달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몰골은 잠에서 막 깬 몰골이었으나 눈빛만은 날카로웠다. 평상복 차림에 칼을 들고 나온 그는 군터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부릅 떴으며, 그가 뒤에 거느린 수하 병사들을 보고는 아예 돌덩이처럼 얼굴이 굳었다.
"군터 경.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소관에게 똑똑히 설명해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군터 경이라 해도……."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할렌에게 큼지막한 자루를 건네 받은 군터는 냅다 그것을 켄달에게 집어 던졌고, 그것은 정확히 켄달의 발 앞에 큼지막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이게 무엇이오."
이제는 존칭마저도 사라졌지만, 그들 중 누구도 그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확인해라."
켄달이 찜찜한 표정으로 칼을 휘둘러 자루를 갈랐다. 그러자 그 안에 가득 담겨 있던 수급들이 흘러나왔다.
"이게 무슨……."
"이유를 대라."
"…뭐요?"
군터의 살기가 켄달을 덮쳤다. 켄달의 안색이 대번에 창백해졌다.
"내가 널 죽이지 말아야 할 이유를 대란 말이다."
그제야 켄달은 무언가 잘못 되도 대단히, 아니 심각하게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