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1화
"흡!"
앞으로 뛰쳐나간 순간 급하게 창을 휘둘러 화살을 튕겨냈다. 지붕 위에서 다 뛰어내린 줄 알았는데, 몸을 숨기고 있던 자들이 더 있었다.
"지붕 위에 적이 더 남아 있다! 화살을 주의해라!"
앞뒤의 적만 해도 충분히 많은데, 지붕 위에서 날아오는 화살까지 주의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 수가 얼마 되지 않아 보인다는 것이지만, 틈을 노리고 날아드는 화살은 위협적이다 못해 치명적이다.
"무리할 필요 없다! 어차피 곧 순찰대가 올 것이니!"
야심한 시각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 소란이라면 순찰병들이 알아차리고 달려올 것이다. 그러니 불리한 상황에서 무리할 필요는 없다. 암살자들을 모두 잡는다 해도 병사들이 상한다면 손해다.
쾅!
부하들에게 그리 이르고, 군터 자신은 적들에게 달려들었다. 일격을 막은 암살자가 부러진 칼과 함께 튕겨 나갔다.
'별 볼일 없는 칼잡이들은 아닌 모양이군.'
막았다고 해도 꽤나 충격이 있었을 텐데 자그마한 신음 소리 하나 없다.
하지만 그런 정신력에 비해서 검술 실력은 그다지 인상적이지 않았다. 매 동작에서 살기가 흐르는 것이 실전으로 다듬어졌다는 느낌이 들었으나 그뿐.
푸욱!
내뻗은 창이 명치를 찔렀다. 얇은 갑옷이라도 걸쳤는지 약간의 반발이 느껴졌지만 칸젤은 쇠로 된 갑옷도 꿰뚫을 만큼 강하고 날카롭다. 명치로 들어간 창끝은 등을 뚫고 튀어나왔다. 꿰인 몸이 잘게 펄떡인다.
턱!
그걸로 끝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암살자는 군터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보였다. 칼을 던져버리고 창을 붙든 것이다.
히죽!
웃었다. 한 순간 시선이 마주쳤을 때, 암살자의 눈은 분명 휘어 있었다.
머릿속에서 경종이 울렸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창을 뺄 틈도 없이, 꿰뚫은 채로 들어올려 휘둘렀다. 양 옆에서 달려들던 적들을 쳐내고, 그때까지도 창을 붙들고 있던 암살자의 머리를 짓밟았다. 우직! 소리를 내며 머리가 부서지고서야 창을 빼낼 수 있었다.
채앵!
화살을 쳐냈다. 먼저 쳐낸 것들과는 달리 손이 아릴 정도로 위력이 있었다. 날아온 곳을 보니 다른 암살자들과는 달리 꼿꼿하게 몸을 세운 인형(人形)이 있었다.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는 다른 암살자들과는 다르다는 걸. 화살에서 느껴진 무시할 수 없는 힘 때문만이 아니었다. 뭔가,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이질감이 있었다.
"방패!"
할렌의 고함소리가 순간의 상념을 깨웠다. 군터는 창대 끝으로 뒤에서 달려들던 암살자를 밀어내고 크게 발을 휘둘렀다. 발끝에 암살자의 턱이 걸리며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걷어차인 암살자가 실 끊어진 인형처럼 나뒹굴었다.
휘익!
잽싸게 고개를 틀었다. 단검 두 자루가 코 앞을 지나갔다. 머리를 뒤로 빼는 것이 조금만 늦었어도 코끝이 잘려나갈 뻔했다.
숨 돌릴 틈도 없다. 전장의 가장 치열한 곳 한복판에 있는 느낌이었다. 등줄기를 옥죄고 있던 서늘함이 가시고 열이 끓었다.
"흡!"
뻗어온 검을 피하고 손목을 낚아챘다. 힘 한 번 주니 손목뼈가 으스러지고, 꼿꼿하던 검이 축 늘어졌다. 식물의 줄기를 뽑아내듯 암살자를 잡아당겨 반대편으로 매쳤다. 또 다른 암살자의 검이 동료의 몸을 찌르고, 동료의 몸은 암살자를 뭉갰다. 고깃덩어리처럼 얽힌 두 사람의 몸을 칸젤이관통했다.
[죽여라.]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소리가 들린 후, 교활하게 움직이던 암살자들이 갑자기 눈이 뒤집혀 덤벼드는 것을 보고 착각이 아님을 알았다.
그들은 목숨을 도외시하고 덤벼들었다.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눈이 풀린 채로 마구잡이 칼질을 해대며 달려들었다. 군터는 차분히 그들을 쓰러뜨리며 기시감을 느꼈다.
언젠가, 그는 이런 이들을 본 적이 있었다. 이런 적들과 싸운 적이 있었다.
'그래. 그때 그 사교도들.'
정확히는 사교가 아니라 사교의 술법으로 맛이 간 병사들이었다. 아직 제국군에 몸 담고 있던 시절. 그 당시 반군이라 불렀던 베이고르의 병력과 싸웠을 때. 그때 이런 비슷한 적을 맞아 싸웠었다.
'이놈들도 사교인가?'
베이고르에서 사교라는 명칭은 쓰이지 않는다. 제국의 치세 하에서 사교로 몰려 박해 받던 모든 종교며 교단들이 사교의 멍에를 벗고 자유를 얻었다. 그들은 각자의 이름을 가지고 교세를 확장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 그들이 굳이 이런 더러운 판에 발을 들일 이유가 있을까?
푸욱!
그러나 사교인가 아닌가 하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사방에서 날아드는 눈 먼 칼날들이다.
"방패 낮추지 말고! 흩어지지 마!"
그나마 뒤쪽에서는 할렌이 몇 안 되는 병사들과 함께 밀려오는 암살자들을 저지하고 있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상황이 정말 힘들어졌을지도 모른다.
콰직!
물론, 지금 상황도 그렇게 낙관적이지는 않았다. 처음에는 그래도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전투에 임하던 암살자들이 이제는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몸으로 간격을 지우고 덤벼들었다.
때문에 칸젤을 휘두를 수 있는 공간이 줄어들었다. 그나마 칸젤의 창신이 일반적인 창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기형적으로 길기에 완전히 손이 엉키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콱!
목이 갈라진 암살자가 칼도 버리고 창을 끌어안았다. 아니, 엉겨 붙었다는 표현이 더 맞으리라.
즉각 떨쳐버렸지만 호흡이 틀어졌다. 그러자 순간의 틈을 노리고 승냥이들이 득달같이 달라붙었다.
'거리가 나오지 않는다.'
창은 최고의 무기다. 첫째로 비교적 다루기가 쉬우며, 둘째로 장병기로서 거리의 이점을 취할 수 있다. 특히 마상에서는 두 번째 이점이 절대적인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말 위가 아닐 때. 그리고 적들과의 거리를 벌리기가 힘들 때는 그 모든 장점을 잃고 만다. 거리가 좁혀지면 창이 무기로서 빛을 발하기는 힘들다. 기껏해야 몽둥이처럼 휘두르며 쳐내는 것이 전부.
또 한 번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얼굴을 빗겨갔다. 군터는 자세가 무너진 상태에서도 달려드는 적을 힘껏 걷어차고 칸젤을 크게 내찔렀다. 가슴이 뚫린 암살자가 덜컥 멈춰 선 사이, 그는 창대에서 손을 놓고 뒷걸음질 치며 검을 뽑았다.
카앙!
칼과 칼이 부딪쳤다. 양 손으로 쥔 칼을 한 손으로 쥔 칼로 버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암살자의 칼자루를, 칼자루를 쥔 두 손을 쥐었다. 우악스러운 힘이 두 손을 붙들고, 맞대고 있던 칼을 틀어 적의 복부를 갈랐다.
"흐으……."
복부에서 피가 왈칵 쏟아지는 와중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않았다. 암살자의 눈이 번들거렸다. 거기엔 공포도, 두려움도 비치지 않았다. 분명히, 그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다 죽어가는 고깃덩어리를 신경질적으로 밀쳐내며, 군터는 이를 갈았다.
챙!
또 한 대 날아온 화살이 등 뒤를 노렸다. 그를 동물적인 감각으로 쳐내고서 건물 위에 우두커니 선 자를 노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달려 올라가 저 꼿꼿한 모가지를 비틀어버리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서걱!
계속해서 찌르고 베었다. 쉬지 않고 움직였다. 움직임이 멎는 순간 눈 돌아간 승냥이들의 이빨이 살에 박힐 것을 빤히 알았다.
챙!
틈이 보일 때마다 날아드는 화살들도 점차 익숙해졌다. 보지 않아도, 듣지 않아도 검을 휘둘러 화살을 쳐낼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적들을 줄여나가고 있으니 멀찍이서 소란스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급한 발소리는 덤이었다.
"웬 놈들이냐!"
"지랄! 빨리도 오는구나! 네 발로 기어왔느냐!"
순찰병들의 대장으로 보이는 무관이 기세 좋게 외쳤건만 할렌의 노성이 바로 그를 덮었다. 움찔하는 그에게 할렌이 눈을 부라렸다.
"군터 경이시다! 이놈들은 군터 경을 노리는 암살자들이고! 당장 합류하여 놈들을 처단해라!"
"구, 군터 경?! 아, 알겠습니다!"
어두워서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을 텐데도 의심 한 번 하지 않는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다급함 하나 없이, 짜증과 살기만이 가득한 외침에 위축이 된 모양. 그게 아니면 군터의 주변에 널브러진 시신들을 보고 믿음을 가졌을 지도 모른다.
칼 한 자루를 들고 마찬가지로 칼을 든 십 수 명을 쓰러뜨릴 수 있는 이는 흔치 않으니.
"이놈들! 순순히 무기를 버리지 못할까!"
어쩌면 그냥 멍청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암살자들은 당연히 무기를 버리지 않았고, 순찰병들을 향해서도 칼을 휘둘렀다. 순찰병들은 악을 쓰면서 그들에 맞서 싸웠고, 덕분에 여유가 생긴 군터는 더욱 사납게 날뛰었다.
서걱!
그렇게 본격적으로 날뛰고 오래지 않아 암살자들을 모두 쓰러뜨릴 수 있었다. 할렌과 병사들 역시 그들이 맞서 싸우던 적을 모두 무찔렀다.
"몇 놈은 살려 뒀습니다."
할렌이 다가와 말했다.
"잘했다."
"정말이지 지독한 놈들입니다. 팔 다리 힘줄을 모조리 끊어놔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도 끝은 아니었다. 팔 다리를 못 놀리게 되자 이빨로라도 씹으려는지 기다시피 하면서 또 덤벼들지 않겠나. 그들은 기어이 뒷목을 두들겨 기절시키고서야 잠잠해졌다.
"지붕 위에 있던 놈들을 놓쳐버렸으니, 후환을 남긴 셈입니다. 놈들을 쫓아갔어야 했는데……."
지붕 위에 있던 암살자들은 놓치고 말았다. 전세가 기운다 느꼈는지, 그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을 쳤다. 할렌 만큼이나 군터 역시 그 점이 아쉬웠다.
'그 놈만은 잡았어야 했는데.'
특히 유난히 강한 화살을 날리던 놈. 홀로 이질적인 분위기를 풍기던 그 놈이 걸렸다.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리'도 걸리고.
'심문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
생포 했다고는 하지만 영 상태가 좋지 않다. 이성이 남아있기는 한 것인지 의아할 지경인데, 그래도 일단 살려만 두면 어떻게든 방법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어이! 왜 그래! 정신 차려!"
다급한 목소리.
순찰대의 병사들 몇 명이 쓰러져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겉보기에 큰 부상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말이다.
"…독이군."
그의 눈에는 보였다. 쓰러진 병사들의, 푸르스름한 얼굴이.
"지독한 놈들입니다."
할렌이 몇 번이고 한 말을 다시 반복했다.
군터는 그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